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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6일 목요일

유적탐험대 팜&이리 1권 제4장 백마탄 왕자님

1

 비탄의 왕비, 리피아나의 고성을 뒤로한 팜과 이리 두 사람은, 작열하는 사막을 빠져나와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왕가의 증표'를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나머지 두 개의 비보를 모으지 않으면 현재 목표인 '만능의 힘'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껏 실존하는지도 불확실했던 '만능의 힘'이라는 존재가, '왕가의 증표'에 의해 말 그대로 확실한 증표가 되었다. 팜과 이리의 대화도 그래서인지 신바람이 나 있는 상태다.

 "다행이다 이리! '왕가의 증표'를 손에 넣어서"

 "뭐 그렇지…… 하지만, 아직도 보물을 두 개나 찾아야 한다니, 충격인걸……"

 "그래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어서 좋잖아!"

 그런 팜에게, 이리는 질린 표정으로 대답한다.

 "……하아. 너 너무 낙관적이구만……. 또 그 두 놈들에게 방해받을지도 모른다고"

 가슴을 팡 두드리며 팜이,

 "괜찮아! 그런 녀석들, 내 마법으로 혼쭐을 내줄 테니까"

 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그런 팜을 놀리듯이 이리가 되묻는다.

 "오, 말했겠다? 좋─아, 그럼 오늘밤은 주문 다섯 개를 외우도록 해보자구? 외울 때까지 재우지 않을 거니까, 알겠지?!"

 "에?! 아~~~ 정말, 이리 못됐어!!"

 "하하하하하"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태고의 동서교역루트를 거꾸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루다크 왕국의 수도라 불리우는 도시, 루다키아를 중심으로 그 주변 곳곳에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어있는 상태다. 그리고 많은 탐색자들이 각각의 유적을 빠짐없이 찾아보았지만, 비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왕가의 증표'도 의외의 장소에 숨겨져 있었으니, 근본부터 생각을 고칠 필요가 있겠어"

 이리의 말대로, 왕비의 무덤이었던 유적은 여태껏 루다크 왕국의 전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던 곳이다.

 "하지만…… 생각을 고친다고는 해도, 어떻게 하려고?"

 그런 팜의 질문에, 이리가 씩 웃으며 대답한다.

 "어젯밤에 들렀던 마을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어"

 "어떤 이야기?"

 "여기서 서쪽으로 가는 산 깊은 곳에, 묘한 마을이 있다는 모양이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몇년 전에 갑자기 폐허가 되어버렸다더라고"

 "에~~~?! 팜은 싫어, 그런 무서운 곳 가기 싫어"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만능의 힘'과 관련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주머니 사정도 위험해졌다고. 여기서 한탕 벌어두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도 몰라"

 "……그치만~~~"

 불만을 토로하는 팜이었지만, 금전적으로 빈곤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왕가의 증표'를 손에 넣은 뒤로 벌써 보름이나 지났다. 정보 수집을 위해 마을에서 묵는 날도 많았고, 그 사이에 유적 탐색도 못했으니 수입도 거의 없는 상태다. 어제도 중요한 이동수단인 말을 울며 겨자먹기로 팔아버린 참이었다.

 "아무튼 내일도 다음 마을에서 정보수집이야. 낭비할 돈도 없으니 이 근처에서 노숙할 거야. 팜, 장작 주워와!"

 "네───……"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 속은 낮이라고 해도 어둡기 마련이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오렌지색으로 변하기 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금새 밤의 암흑 속에 파묻히게 된다. 귀를 기울여 물소리를 확인하면서 바위 틈새에 짐을 내려놓는다.

 "그럼 난 물 떠올게"

 이리는 그렇게 말하며 가죽을 씌운 수통을 들고 물이 나오는 곳을 향했다.

 캠프나 야영이 유행하는 오늘날에는 잘 알려진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야영지를 고르는 데에도 여러 지식이 필요하다. 이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짐을 내려놓은 장소도, 실은 여러 조건을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면, 물이 흐르는 곳과 너무 가까우면 물이 갑자기 불어나거나 물을 마시러 온 짐승의 습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 암반이 많은 곳과 너무 가까우면 떨어지는 바위에 당할 위험이 있다.

 물론 이리는 그런 지식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다. 오랜 여행 생활로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행동이다.

 한편, 위건족인 팜은 이리같은 경험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정령이나 동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날씨 변화나 과일이 있는 장소 등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의 결점을 적절히 보조해주는 좋은 콤비다. 매번 '간신히'이긴 하지만, 수많은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는 점도 수긍할 만 하다.

 이래저래하는 사이에 야영 준비도 끝나고, 장작을 모아 만든 모닥불이 부드러운 온기를 느낄 쯤에는, 이미 해도 지고 주변은 밤의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하늘에 별들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치솟는다. 낮 동안 둥지를 짓거나 식량을 모으느라 소란스럽게 나무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동물들도 조용히 잠들고, 그들과 교대하듯 밤의 파수꾼인 올빼미가 큰 눈동자를 반짝인다.

 조용하게 들려오는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때때로 터지는 모닥불의 소리만이 멤돈다.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고, 편한 복장의 이리가 육포를 뜯으며 직접 만든 마법 메모를 뒤적인다.

 "음──어디보자……아, 있다! 이번엔 이걸로 가보자! 망가진 물건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이지. 준비 됐어? ……'대지를 구성하는 자들이여……' 자, 계속해봐! 야, 팜?!"

 이리가 고개를 들어보자, 당사자인 팜은 여행의 피로때문인지 먹던 사과를 손에 쥔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팜!!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한 건 너잖아!!"

 무심결에 큰 소리를 내고 만 이리였지만, 한 번 잠들어버린 팜은 그 정도로는 눈을 뜨지 않는다. 대답하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사과가 툭 떨어진다.

 "진짜! 일어나!!"

 화난 이리가 주먹을 들어올린다.

 콩……

 눈을 번쩍 뜬 팜이 반사적으로 머리를 싸맨다.

 "아파~~~~~~~!! ……정말, 뭐하는 거야, 이리?!"

 "뭐하냐니! 알겠어? '왕가의 증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곤 해도, '만능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보물을 찾아야 된단 말이야!!"

 이리의 말에 맞춰서 소리치는 팜은, 이제 질렸다는 모습이다.

 "정말! 툭하면 '만능의 힘'이라니까!!"

 "앞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네가 마법을 외우지 않으면, 그냥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라고!!"

 "정말, 이제 됐어!!"

 아무래도 한계에 달했는지, 팜이 주먹을 꾹 쥔 채 기세 좋게 일어선다.

 "어…… 어디 가려고?"

 이리도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약간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세수하러!!"

 투덜대면서 팜은 물가를 향해 걸어갔다.



 비내리듯 쏟아지는 별빛을 받은 강가가 반짝반짝 빛난다. 조용히 흐르는 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팜은 물이 방울방울 튀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뭐냐구, 이리도 참! 금방 화내고 나한테 화풀이한다니까!! ……애초에 항상 나만 마법을 쓰는 건 아니잖아!!"

 평소에 팜은 입으로 이리를 이기지 못한다. 이런 때엔 입에 담지 않는 말도 줄줄이 새는가보다.

 "그렇게 왱알앵알 말할 것 없잖아! ……정말, 콤비 해산해도 모른다니까……"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에, 조금씩 사고가 엇나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팜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아, 어디 멋진 왕자님 없으려나아. 그럼 저런 다혈질 녀석은 버려두고, 왕자님이랑 같이 여행할 텐데……"

 방금까지 화내던 것도 잊고, 어느샌가 마음은 메르헨 세계를 떠돌고 있다. 얼굴이 풀려서 일어선 팜은, 열이라도 있는 것처럼 휘청휘청 걷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상상의 세계는 점점 넓게 펼쳐지는 중이다.

 "……그래서 결국 왕자님에게 '나랑 결혼해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고, 커다란 성에서 왕비님이 되어 행복하게 사는 거야…… 랄까나. 에헤헤헤!"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부끄러워하는 팜의 모습은, 이미 정신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 상태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도, 이런 때에 한해서 저지르기 마련이다. 이 때의 팜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꾸욱……

 주위 경계가 느슨해진 팜의 발이, 푹 잠들어있던 맹수의 꼬리를 밟아버리고 말았다.

 "아!!"

 팜이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게다가 운 없게도, 그 맹수는 새끼를 막 낳은 암컷이었다.

 "크르르르르르릉……"

 몸을 일으킨 맹수는, 키가 2m정도는 되보이는 데다가, 서벌타이거처럼 긴 이빨을 드러내고 팜을 노려본다.

 "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분노한 맹수에게 팜의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쿠오오~~~~~~!!"

 크게 울부짖으며 덤벼드는 맹수에게 당황해서 도망가려는 팜이었으나, 너무 놀란 나머지 허리가 풀려버려서 움직이지를 못한다.

 "꺄─!! 꺄악─!!"

 필사적으로 기어서 도망치려는 팜에게, 맹수의 손톱이 뻗어온다. 그 순간,

 부웅!!

 팜의 등 뒤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에?!"

 돌아보자, 그곳에는 한 줄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살펴보니 불덩이의 일종이 파열한 것 같다.

 "그르르릉……"

 겁에 질린 맹수는 새끼를 물더니 숲 속으로 도망쳤다.

 "휴~~~~~"

 힘이 풀려 주저앉는 팜은, 틀림없이 이리일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고마워, 이리……?!"

 하지만, 근처에 이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슬쩍 올려다본 바위 위쪽에는, 말에 탄 기사처럼 보이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따.

 "응?"

 이상하게 쳐다보는 팜에게, 그 젊은이가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말한다.

 "여성이 혼자서 밤길을 걸어다니면 위험하답니다"

 그 말을 듣고, 볼을 빨갛게 물들이는 팜이었다.

 "푸르릉……"

 두 사람의 침묵을 신경쓰기라도 하듯이, 백마가 작게 투레질을 했다.


2

 밤새 숲을 지키던 올빼미도 그 역할을 마치고 둥지로 돌아갈 즈음,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빛을 내기 시작한다. 밝은 빛과 따스함을 선사해주던 모닥불도 이미 약해졌고, 빨갛게 잉걸불만이 하얀 재를 피우고 있다.

 나무 사이로 새어나는 빛이 푹 잠들어있던 이리의 볼을 간지럽힌다.

 "……음……으응"

 눈이 부시다는 듯이 얼굴을 가리던 이리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핀다.

 "하~~~~~~~암……"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입을 연다.

 "팜! 오늘 아침 당번 너잖아. 알고…… 응?"

 그러나 주변에 팜의 모습이 없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난 이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젯밤에 좀 심하게 말했나……?"

 그대로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주위 나무를 향해 소리친다.

 "팜! 언제까지 삐져있을 거야!! 사과할 테니까 나와…… 어라?"

 슥 돌아보니, 이리의 짐 위에 한 장의 종잇조각이 놓여있었다.

 "뭐지?"

 손으로 잡아 글자를 눈으로 쫓는 이리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간다.

 '이리에게.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과 만났어. 길안내가 필요한 것 같으니 같이 갈게.

 나도 이대로 이리에게 폐를 끼치는 것보다, 누군가의 도움이 되고 싶어.

 '왕가의 증표'랑 노잣돈은 가져갈게.

 잘 지내, 안녕.

                           팜이'

 "으그극…… 뭐어라고오오~~~~!!"

 팜의 편지를 다 읽은 이리가 당황해하며 자기 짐을 들어올려 땅을 향해 탈탈 털어본다.

 지갑은 커녕, 식량도 없어졌다.

 이리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가방을 있는 힘껏 땅에 내팽개친다.

 "젠장!! 팜 그 년이!"

 분해하는 이리의 모습은, 애처로운 부랑자같았다.



 한편 당사자인 팜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 고삐를 쥐고 고개를 넘고 있었다.

 "이대로 내려가면 마을이 나올 거야"

 이리와 함께하던 때와는 달리 수다스러워진 팜이었다. 말 위에 탄 젊은이가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팜 씨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정말 고맙습니다, 팜 씨"

 '씨'라는 호칭을 듣는 것이 처음인지 부끄러워하며 팜이 대답한다.

 "꺄하……. 그냥 팜이면 돼. 그나저나 넌 뭐라고 부르면 돼?"

 "라엘 레버…… 아니, 라엘이라고 불러주세요"

 "라엘, 이구나……. 좋은 이름이네"

 기분이 좋아보이는 팜이, 가방에서 '왕가의 증표'를 꺼내서 보여준다.

 "이거 봐봐!! 이거, 팜이 찾아낸 거야. 엄청 고생했다니까"

 석상을 보자, 라엘이 깜짝 놀란다.

 "……그건, 분명 루다크 왕국의 문장에 있던 석상 아닌가요?"

 "맞아! 잘 아네. '왕가의 증표'라고 해"

 순수한 팜에게, 난처하다는 듯이 라엘이 말한다.

 "팜. 그건 아마도 어마어마하게 귀중한 물건이예요. 너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하…… 그렇지"

 순순히 가방에 넣으면서, 팜은 라엘을 바라보며,

 "하지만 라엘이라면 보여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

 라고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아무래도 팜은 단순히 라엘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왕가의 증표'를 꺼낸 모양이다.

 너무나도 순수한 팜에게, 라엘은 곤란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하지만…… 정말 괜찮나요? 일행이였던 분은……"

 그 말에 순간 움찔했지만, 팜은 금방 미소를 되찾았다.

 "하하하, 당연히 괜찮지! 아마 지금쯤 후련해하고 있을걸. 식량이랑 돈도 제대로 남겨두고 왔으니까"

 팜은 자기가 이리의 전재산을 들고와버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런 것보다, 지금의 팜에게 있어서는 라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더 중요한 모양이다. 라엘의 말에 불안해졌는지, 팜은 눈을 내리뜨며 라엘에게 물어본다.



 "……있잖아. 아니면, 팜이 같이 가는 게 별로야?"

 그 말을 들은 라엘이 고개를 크게 좌우로 흔든다.

 "그럴 리가요. 길을 몰라서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하고 있답니다"

 "정말?! 헤헤…… 다행이다"

 금방 다시 웃어보이는 팜.

 "하지만 그런 너무한 녀석도 다 있네. 라엘이 갖고 있던 지도, 완전 엉텅구리잖아"

 팜의 말대로, 라엘이 갖고 있던 지도는 전혀 맞는 게 없는 가짜로, 덕분에 그는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헤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라엘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모습이다.

 "분명 물건을 잘못 건네준 거겠죠. 잘 확인해보지도 않고 와버린 저도 잘못했죠"

 그런 라엘의 반응에, 제아무리 팜이라도 놀란 듯하다. 무심코 발을 멈추고 찬찬히 라엘의 얼굴을 바라본다.

 "? 왜, 왜 그러시죠, 팜?"

 "……라엘은, 좀 별나네"

 "네?!"

 라엘 스스로도 팜의 말에 꽤 놀랐나보다.

 "어, 어딘가 이상한가요?"

 라며 불안해하며 물어본다.

 "응. 말투도 이상하게 정중하고……"

 "죄, 죄송해요. 신경을 건드렸다면 용서해주세요"

 "꺄하!! 역시 별나다니까. 사과할 것 없는데!"

 "그런가요?"

 "사람이 너무 그렇게 착하면 금방 다른 사람에게 속을 거야"

 "죄송해요……"

 "봐, 또 사과한다"

 "아……"

 평소 이리에게 당하기만 하던 팜에게 있어서, 라엘의 반응은 신선했다.

 "뭐, 나랑 함께라면 안심이겠지만!!"

 라며 가슴을 펴는 팜이었다.

 "다음에 라엘을 속이려드는 녀석이 있으면 팜이 혼쭐을 내줄게!"



 "에──ㅅ취!!"

 이 성대한 재채기를 하는 사람은, 바로 그 너무한 녀석인 상인 갈프였다. 옆에는 그의 파트너 길이 앉아있다.

 "으~~~~ 감기인가?"

 라며 코를 훌쩍이며 부르르 떠는 갈프는, 마을 시장 일각에서 노점을 펼쳐놓고 있었다.

 팜과 이리에게 쥐어짜이고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갈프였지만, 실은 둘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던 길의 날카로운 이빨로 밧줄을 풀어 탈출한 것이었다.

 거기다 그런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보통은 발휘못할 상인의 혼을 발휘한 갈프는, 잠들어있는 라샤와 미겔로부터 금품을 갈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뒤로는 각지를 떠돌면서 팜이나 이리와는 다른 루트를 거쳐 이 마을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서교역을 통해 상인들이 수없이 왕래하는 커다란 도시에서는, 갈프같은 양아치 상인을 상대하는 자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갈프의 노점에 눈길을 주는 자도 없는 모양이다. 홀로 떨어진 곳에 남겨진 노점 건너편에서, 갈프는 원통하다는 듯이 길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돈벌이가 안 되는 마을이구나, 그치?"

 끄덕하는 길.

 "……정말이지, 요전번처럼 멍청한 봉같은 형씨가 한 명 정도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다시 한 번 끄덕이는 길. 자포자기 심정이 된 갈프가 큰 목소리를 낸다.

 "자, 어서옵쇼 어서옵쇼!! 고금동서의 희귀한 보물이 잔뜩 있습니다요! 뭘 사든 손해는 보지 않습니다 한 번 둘러보고 가십쇼!!"

 그러나, 손님이 찾아오는 기색은 전혀 없다. 어째서인지 길이 또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그냥 졸고 있는 것 같다.



 북적이는 거리와 바쁜 인파에 휩싸여 넝마가 되어 찾아온 사람은, 불쌍한 이리였다.

 구─────, 꼬르르륵……

 뱃속의 벌레만이 힘차게 울 뿐이었다.

 "어흐흑…… 팜 그 년, 아무리 그래도, 땡전 한 푼 안 남기고 가져갈 건 없잖아……"

 공허한 눈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마을을 배회한다.

 "아무튼 뭐든 좋으니 일을 찾아야지, 이러다 굶어 죽겠…… 응?!"

 주변을 둘러보던 이리의 눈이, 시장 한 구석에 열려있는 노점에서 멈춘다.

 "저, 저건?!"

 비틀거리는 발을 질질 끌며, 이리는 인파를 헤치고 나아간다.

 "어떻습니까, 이 광택! 엄청나죠?"

 그건 마침 사람 좋아보이는 여행객 노부부를 붙잡은 갈프가 필사적으로 물건을 팔려는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순 없지만, 이건 바로 그 왕가의…… 읍?!"

 난처해하는 노부부 건너편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이리가 눈에 보였다.
 
 "우, 우히익~~~~~~~!!"

 순간 갈프는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허겁지겁 주워담고,

 "오, 오늘은 폐점입니다요! 자, 그럼……"

 당황해하며 그 자리를 떠나려는 갈프였으나,

 덥썩!!

 "으왁!!"

 우당탕탕……

 이리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양 손에 껴안고 있더너 장물을 지면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그 틈을 타 도망가려던 길에게, 이리가 소리친다.

 "앉아!!"

 깜짝 놀라는 길이, 그 자리에서 찰싹 주저앉더니,

 "니시시시시……"

 비뚤어진 눈초리로 웃으며 꼬리를 흔들고는 이리에게 아양을 떤다.

 "나 참…… 주인이 이 모양이니 개도 이렇구만"

 질려버린 이리에게 갈프가 애원하듯이 외친다.

 "노, 놓아주세요! 나쁜 짓은 안 했잖아요!! 그, 그 날 이후로 저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구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발버둥치던 갈프의 움직임이 멈춘다.

 "예?! 그, 그럼, 뭔가 달리 볼일이라도?"

 어리둥절한 갈프에게, 이리가 쑥쓰럽다는 듯이 웃음을 띄우며,

 "헤헤…… 실은 말이야……"

 라며 말을 꺼내려는 순간,

 꼬르르그극~~~~~~!!

 이리의 뱃속 벌레들이 아우성친다.

 "……"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이는 이리를 보고, 갈프가 히죽 웃으며 말한다.

 "설마하니…… 배가 고프신가요?"

 심술궂게 물어보는 갈프에게, 이리가 부끄럽다는 듯이,

 "조, 좀 사정이 있어서…… 일을 찾고 있거든"

 "그렇군요, 그거 참 큰일이군요"

 라며 갈프가 과장스럽게 놀라는 리액션을 취하더니,

 "자 그럼, 저는 이만……"

 이라며 총총히 떠나려 한다. 그런 갈프의 등을 향해 이리가 엇흠 하며 중얼거린다.

 "양아치 상인이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 한 마디에, 갈프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며 다시 이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 때 갈프의 표정은 상당히 경직된 상태로 웃고 있었다.

 "헤헤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만 해주십쇼, 이리 씨"

 씨─익 웃는 이리, 맥이 탁 풀리는 갈프. 그런 두 사람을, 길이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3

 출신이 불명확한 여행자가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기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마찬가지다. 특히 일당 교섭에 있어서는 고용주와의 밀당이 중요하다. 피로와 공복으로 걸레짝이 되버린 지금의 이리에게 있어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순식간에 갈프를 잡아 교섭 장소로 끌고간 것은, 어찌보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리는 길과 함께 노점에 남고, 그 사이 갈프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았다.

 녹초가 된 갈프가 숙소를 겸하고있는 주점의 서빙 일을 가지고 돌아온 때는, 마침 점심식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왜 내가 이런 꼴을 해야만 하는 거냐고!!"

 이리의 고함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퍼진다. 핑크색 미니스커트에 커다란 리본과 프릴로 장식된 앞치마, 그리고 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바스트를 조이는 디자인의 코스튬을 입혀졌으니 무리도 아니다.

 "잘 어울리십니다요"

 히죽대는 갈프가 놀리듯이 말한다.

 이리는 스커트 밑을 훔쳐보려는 길을 걷어차고는 더욱 화를 내기 시작한다.

 "나한테는 무리야!! 왜 하필 또 이런 가게를 고른 거냐고! 다른 곳으로 안내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이리 씨. 이 가게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얻어낸 일자리라구요"

 "아무튼, 싫은 건 싫은 거야!!"

 이 정도면 떼쟁이가 따로없다. 억지로 코스튬을 벗어보려 하지만,

 꾸르르륵~~~~~ 꾸루루루……

 "으……"

 아무래도 이리는 싫다지만, 뱃속의 벌레들이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가게에서 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언제까지 준비하고 있을 셈이야?! 손님들이 기다린다고!"

 그런 건방진 점주의 말에 발끈한 이리가,

 "뭐라…… 읍읍?!"

 불만을 말하려 했으나 갈프에 의해 제지당한다.

 "예, 예이, 지금 갑니다요!"

 대신 대답하는 갈프를 째려보는 이리였지만,

 "배가 고프면 전쟁도 못하는 법, 그렇지 않습니까요?!"

 라는 갈프의 말에, 터벅터벅 대기실을 뒤로 했다.



 목조 2층집에 세워진 그 가게는, 예를 든다면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집처럼 생겼다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카운터 바가 있는 1층은 열 개 정도의 둥근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으며, 식사 뿐 아니라 대낮부터 술이나 갬블을 즐기는 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2층은 숙소인 모양인데, 창관은 아닌 듯하다.

 점주의 취향인지, 외관도 분위기도 청결한 가게다. 아마도 안심하고 장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하는 행상인들의 수요에 맞춘 것이리라.

 목적은 적중했는지, 꽤나 번창한 가게다.

 2층에서 갈프에게 떠밀리듯 내려온 이리는, 화려한 코스튬에 더해 머리를 세 갈래로 땋은 데다가, 프릴이 달린 카튜샤를 머리에 씌우기까지 했다.

 "싫다고, 이런 거! 꼬맹이도 아니고!!"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땋은 머리가 뿅뿅거리며 흔들린다.

 "귀엽지 않습니까! 잘만 하면 어디 사는 부자가 첫눈에 반해버릴지도 모른다구요!"

 "우, 웃기지 마!!"

 아무리 귀여운 차림을 하고 있어도, 마음은 남자 이상으로 다부진 이리였다.

 "식량만 확보되면, 당장 그만둬버릴 테다!!"

 아직까지는 색기보다 식탐이 더 우선시되는 모양이다.

 탕!!

 "창가쪽 손님이다"

 그런 이리의 눈앞에, 맛있어보이는 음식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놓여진다. 거칠어보이는 점주는 창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이리의 눈은 요리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꿀꺽……"

 이리가 무심결에 마른침을 삼킨다.

 "뭘 멍하니 있는 거냐?! 빨랑빨랑 날라!!"

 보채는 점주에게, 이리가 보채는 눈빛으로 말한다.

 "그 전에…… 뭔가 좀 먹게 해주라"

 귀엽게 애교부리는 이리에게 점주는 아무 흥미도 없다는 듯이 정색하며,

 "우리 가게 모토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다. 알겠냐?!"

 그 말에 이리는 울컥해 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점주는 눈하나 껌뻑하지 않고 말한다.

 "미소는 어쨌냐, 미소는?!"

 "큭……"

 아무 반론도 하지 못하는 이리에게, 갈프가 슬쩍 귀엣말을 한다.

 "지금은 참으십쇼, 예!!"

 그 말을 듣고,

 "니───히히히히히"

 이리는 점주를 향해 굳어진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좋아! 갔다 와"

 점주는 웃는 채로 굳어져버린 이리의 손에 요리 접시를 얹더니 가게 안으로 떠밀었다.

 "제길~~~~~! 두고 보라고!!"

 요리를 옮기는 이리는, 웃는 채로 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리가 출발한 것을 확인한 갈프는, 점주에게 슬쩍 귀엣말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대략 좋지 못한 꿍꿍이를 꾸미는 모양이었으나, 물론 이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말 그대로 요리를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면서, 이리는 필사적으로 먹어치우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지정된 테이블에 요리를 날랐다.

 "요리 나왔슴다!"

 내팽개치듯 접시를 내려놓는 웨이트리스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남녀 손님 중 여자 쪽이 고개를 훽 치켜든다.

 "잠깐, 당신! 뭐야 그 태…… 응?!"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이리는 뜨악했다. 고개를 든 상대는 무려 사막에서 버려두고 떠났을 터인 그 라샤였기 때문이다.

 "응? 왜 그래 라샤?"

 라며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가 이리를 향해 돌아본다. 미겔이다.

 "으……"

 식은땀을 흘리며 서있는 이리를, 라샤와 미겔도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볼 뿐이다.

 까딱하면 대판 싸우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대폭소였다.

 "푸하──핫하하하!!"

 "크크큭…… 뭐야, 그 차림새?!"

 일의 변모에 분노보다 먼저 웃음이 터져나온 모양이다.

 "히익──! 히이──!! 배가 아파~~~~!!"

 복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가며 떽떼굴 구르며 웃는 두 사람에게, 이리는 도망치는 것도 잊은 채로 큰소리친다.

 "뭐, 뭐가 이상햐냐?! 진짜! 웃지마!!"

 그러나, 한 번 터진 웃음보는 좀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멈추기는 커녕, 이리가 화내면 화낼수록 라샤와 미겔은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웃는다.

 "캬하하하하…… 아니! 누가 좀 멈춰줘~~~!!"

 "햐하하하하!! 완전 개그콘서트라고!! 형씨!!"

 오기가 센 이리의 성격이 역효과가 난 모양이다. 둘이 박장대소하며 구르는 틈에 슬쩍 도망갈 수 있었건만, '형씨'라는 한 마디에 제어장치가 망가지고 말았다.

 "누가, 형씨냐아아?!"

 테이블 위에 있던 접시를 재빠르게 낚아채더니, 있는 힘껏 미겔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퍼억!!

 "으겍!!"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고있던 미겔의 안면을, 케이크로 생일빵을 날리듯 접시가 직격한다. 미겔은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 뭐, 뭐하는 거야!!"

 제정신을 되찾은 라샤가 소리친다.

 휘익!!

 안면직격의 답례라도 하듯이 라샤가 눈앞에 보이는 맥주잔을 잡더니 이리를 향해 뿌린다.

 "어이쿠……"

 이리가 슬쩍 피하자, 맥주잔에 있던 내용물은 당연히 그 뒤에 있던 아무 관계 없는 손님에게 끼얹어지게 되었다.

 "으악!! 차가워!! 뭐야?!"

 운없게도, 카드게임에서 한창 잃고있던 거칠어보이는 남성에게 뿌려지고 말았으니 낭패다.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짓이야?!"

 덤벼드는 남자에게 라샤도 지지않고 대든다.

 "시끄럽네! 멍청히 있으니 맞는 거잖아!!"

 "뭐라고?!"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남자는 카드를 하던 테이블을 집어든다.

 카드와 코인이 바닥에 떨어지며, 이번엔 같이 카드를 하던 남자들이 목청을 높인다.

 "아!! 지금 이기고 있었는데!!"

 "이새끼, 지니까 얼버무릴 셈이냐?!"

 "뭐라고?!"

 빠직!!

 와장창창! 콰앙~~~~!!

 덩치있는 사내들이 엉겨붙기 시작하자, 이제 수습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때리고 날아가는 남자가 다른 테이블로 날아들어 요리나 술을 엉망으로 만들 때마다, 소동은 연쇄적으로 퍼져간다. 정신차리고 보니 가게 손님 모두가 참가하는 대난투가 시작되고 말았다.

 "이 틈에……"

 순식간에 벌어진 소동에 라샤가 벙쪄버린 틈에, 이리가 휙 도망가버렸다.

 "아, 기다려!!"

 정신을 차린 라샤가 바닥에 엎어져있는 미겔에게 소리친다.

 "미겔, 언제까지 자빠져 자고 있을 셈이야?! 당장 저 녀석을 붙잡아서 '왕가의 증표'를 되찾아야지!!"

 "아윽……"

 대답하듯 몸을 일으킨 미겔의 입에는, 뼈있는 치킨이 덩그러니 처박혀 있었다.

 "바보짓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퍽!!

 라샤에게 후두부를 얻어맞은 미겔의 입에서 고기가 떨어져나오고, 겨우 정신을 차린 미겔이 이리를 쫓는다.

 "기, 기다려!!"

 엉겨붙은 남자들 틈새를 비집고 도망치는 이리를, 미겔이 남자들을 걷어차며 쫓는다.

 "비켜, 비켜──!!"

 할 수만 있다면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이리였지만, 가게 입구는 이미 소동 소리를 듣고 달려온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아~~~~~~~ 진짜!!"

 어쩔 수 없이 반대쪽인 가게 안쪽을 향한 이리는, 다시금 난투를 벌이는 남자들의 폭풍 속으로 휘말리고 말았다.

 "야앗!!"

 쿵!!

 방심하다 반대편에서 날아온 남자와 부딪친 이리는,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말았다.

 "꺅!!"

 그 기세로 바닥에 처박히게 될 뻔한 순간,

 확!!

 누군가가 강하게 이리를 끌어안아서 쓰러지는 꼴은 면했다.

 "고, 고마…… 붸엑?!"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든 이리의 눈에 비친 것은, 이리의 몸을 붙잡은 채 씩 웃고있는 미겔의 모습이었다.

 "와악──!!"

 당황해서 도망가려는 이리였으나, 과연 천하장사인 미겔의 팔뚝에는 이길 방법이 없다.

 "자! 날뛰지 말라고!! 놔주길 바란다면 '왕가의 증표'를 내놔"

 "흥! 누가!!"

 궁지에 몰려도 이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버둥버둥 날뛰며 필사적으로 미겔의 팔에서 탈출하려 해본다.

 그런 이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라샤가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며 얼굴을 들이민다.

 "얌전히 석상을 내놓지 않으면 아픈 꼴을 당할 걸!"

 "내가 갖고 있지 않다고! 내 파트너가 가지고 갔어!!"

 하지만, 그런 이리의 말을 고지곧대로 믿을 라샤가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아직도 시치미를 떼겠다는 말이야?! 그 근성은 높이 사겠지만, 너, 미겔의 완력을 너무 얕보지 않는 게 좋아. 머리는 좀 나쁘긴 하지만"

 "이봐이봐, 라샤!"

 "흥!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궁지에 몰린 이리가 태도를 바꾸며 라샤를 쏘아보며 외친다.

 "흥…… 여자를 상처입히는 주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라며, 이리를 비틀고 있던 손에 힘을 준다.

 "큭……"

 각오한 것인지, 이리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 순간,

 챙강──!!

 하며,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미겔의 힘이 느슨해진다.

 "응?!"

 이리가 무슨 일인가 둘러보니, 술에 취한 손님이 술병으로 미겔의 뚝빼기를 깨버리고 있었다. 미겔은 눈이 돌아가며 쓰러지려는 참이었다.

 "아!! 미겔?!"

 당황해 소리치는 라샤를 밀치며, 이리는 뒷문을 향해 달린다.

 "기다려!!"

 소리치면서 라샤는 마법을 발동하려고 이리를 향해 손을 펼친다.

 "대기를 떠도는…… 꺅?!"

 하지만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한 라샤의 엉덩이를 취객이 만지작거린 덕분에, 주문은 도중에 멈춰버리고 말았따.

 "헤헤, 언니, 술 좀 따라봐"

 "이, 변태가!!"

 짝~~~~!!

 라샤가 취객을 쓰러트리는 사이에, 이리는 감쪽같이 뒷문을 통해 밖으로 탈출하고 말았다.

 "아──, 정말!! 미겔!! 자빠져있을 때가 아니잖아!"

 결국 무의식중에 미겔에게 화풀이를 하고 마는 라샤였다.


4

 우연히 발생한 대소동에, 가게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싸움이다, 싸움이다아!!"

 "가게 안에 난장판이래!"

 긴 여행으로 인해 자극에 굶주렸는지, 구경꾼들 대부분은 여행을 하던 행상인같았다.

 "잘한다 잘해!! 해치워, 해치우라고~~!!"

 "거기야! 거기서 확 하라고!!"

 흥분한 구경꾼들의 입에서 격한 아우성이 튀어나온다.

 그런 싸움을 건너편 노점에서 보고있던 사람은, 라엘과 함께 마을로 온 팜이었다. 두 사람은 때마침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 마을을 둘러보던 참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소동을 바라보던 팜은,

 "무슨 소란이지? ……저기, 라엘? ……응?!"

 하며, 라엘에게 말을 걸더니 이내 침묵한다. 라엘은 팜이 눈을 떼고있던 사이에, 터무니없는 물건을 사려던 참이었다.

 "아! 자, 잠깐 안 돼, 라엘!!"

 "어?!"

 라엘은 무려 횃불 몇 개 분의 가치인 금화를 건네려하고 있었다.

 "왜 그러죠, 팜?"

 라며 되묻는 라엘은,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당황해서 라엘의 손에 있던 금화를 낚아채는 팜을, 라엘이 이상하게 바라본다.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뭔가, 라니…… 항상 이런 식으로 물건을 산 거야?"

 무심결에 목소리를 키우는 팜에게, 라엘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한다.

 "네? 아니, 뭐……"

 그런 라엘을 보며 팜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만다.

 "정말이지! 어디 나라의 왕자님이라도 이런 구매는 안 한다구!"

 팜의 말에 말문이 막힌 라엘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

 아무래도 라엘에게는 아직 팜에게 밝히지 않은 사정이 있나보다.

 하지만, 팜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솔직한 성격이다. 그저 말문이 막혀 고개를 푹 숙인 라엘을 보며, 팜은 자기가 한 말 때문에 라엘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아…… 미안, 나 딱히 화나거나 하지는 않았어"

 그런 팜의 상냥함에, 라엘은 마음을 결정했다는 양 고개를 든다.

 "팜, 실은……"

 라며 말을 걸려는 라엘을, 팜이 싱긋 웃으며 가로막는다.

 "괜찮아! 팜에게 맡겨줘"

 뭔가 털어놓으려던 라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팜은 시원시원하게 물건을 사기 시작한다.

 "횃불이랑, 밧줄도 두 줄 살까. 그래, 그쪽에 그 튼튼한 걸로. 잔뜩 살 테니까 좀 깎아주라, 아저씨!"

 평소와는 입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다. 지금의 팜은 마치 동생을 끌고 심부름에 나온 누나처럼 보인다.

 라엘도 그런 팜을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근심이 가득차보이던 우울한 얼굴이 다시금 미소가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산골짜기 분지에 펼쳐진 이 마을은, 비탈길이나 골목길을 겸한 돌계단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거기에 해발도 천m 가까이 된다. 따라서 이 토지를 뛰어다니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굳이 마을을 뛰어다니는 사람은, 우리 주인공인 이리였다.

 "히익~~~! 히이익~~~!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냐고~~~~~?!"

 가게에서 잘 빠져나오긴 했지만, 웨이트리스 차림을 한 채로 마을로 뛰쳐나온 이리였다. 마치 찾아달라고 광고라도 하는 것같은 차림새 덕분인지 숨기도 쉽지 않고, 그런 상태로 라샤와 미겔의 추적을 받는 중이었다.

 "정말, 끈질기시네!!"

 나무상자를 쓰러트리거나, 빨랫줄을 잡아당기는 정도의 방해로는 두 사람을 뿌리치지 못한 채 골목길을 이리저리 도는 사이에, 드디어 이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막다른 길에 도달하고 말았다.

 "아! 젠장!!"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벽은 터무니없이 높은 데다, 올라가려 해봐도 발디딜 틈이 없다. 게다가 몸을 숨기기 위한 공간조차 보이지 않는다.

 "큭……"

 어딘가 개구멍이라도 없나 둘러보며 벽을 더듬는 이리의 등뒤에서, 라샤의 드높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오─호호호호호! 발버둥은 그만 치시지, 이제 도망갈 곳은 없다구!!"

 그 목소리를 들은 이리가 반사적으로 돌아보고는, 벽에 등을 넙쭉 달라붙인 채로 몸을 겨눈다.

 한편 라샤는 우위를 점했다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이번엔 조심조심하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

 "칫……"

 손 쓸 방법도 없이, 그저 노려볼 수밖에 없는 이리에게, 라샤도 지지않고 노려보며 입을 연다.

 "나는 마음씨가 곱다고들 하더라. 그러니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을게. 자, 조용히 '왕가의 증표'를 내놓으시지!"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했잖아! 나는 갖고있지 않다고! 보면 알잖아?!"

 땀을 흘리며 외치는 이리의 앞에 슥 다가온 미겔이 씩 웃으며 검에 손을 댄다.

 "헤헤……. 그럼, 어쩔 수 없지…… 몸수색 좀 해보실까?!"

 뻑!

 둔탁한 소리를  내며 미겔이 후두부를 끌어안는다. 라샤가 뒤에서부터 걷어찬 것이다.

 "뭐, 뭐하는 짓이야, 라샤?!"

 "말투가 너무 상스럽잖아, 너!"

 "어디가 상스러운데?! 너야말로 무슨 '마음씨가 곱다고들 하더라'냐?! 대체 어디사는 멍청이가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였냐, 어엉?!"

 "조용하지 못해!"

 라며 둘이 싸우기 시작하려던 차에, 이리에게 한 순간 기회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지"

 라며 중얼거리고는, 벽에 찰싹 대고있던 손바닥에 집중하며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엉겨 굳은 위치령들이여…… 그 생명, 지금 해방하리……"

 언쟁을 벌이던 라샤가 정령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잡아냈지만,

 "내 바람에 그 위치를 표하라!!"

 팟!!

 라샤와 미겔에게 몸을 가눌 여유도 주지 않고, 이리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뿔싸!!"

 비통한 외마디비명을 지르는 라샤와 미겔을 향해, 이리의 등 뒤의 벽이 하나하나 떨어지더니 습격하기 시작한다.

 쿠구구구구……

 와르르르르르르르!!

 "우와아───!!"

 순식간에 잔해덩어리에 파묻힌 둘은, 밀리듯이 벽 한구석으로 떠밀리기 시작한다.

 "크윽───!! 으, 으윽……. 내 특기 마법을 어느새?!"

 벽에 찰싹 달라붙듯이 잔해를 모아 상대방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마법. 확실히 왕비의 관이 있던 성에서 라샤가 팜과 이리에게 선보인 마법과 똑같은 마법이다. 이리와 라샤 사이에는 '주문 계열'──알기 쉽게 말하자면 '마법의 유파'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 이리가 같은 효력의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리는 깡과 더불어 꽤 우수한 두뇌를 겸하고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수완가인 이리는, 라샤와 미겔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도망칠 기회를 얻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식은땀을 흘리며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응?!"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샤와 미겔의 눈 앞에서 갑자기,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치솟더니, 이리를 감싸버리고 만다.

 "뭐, 뭐여?!"

 연기가 사라지자, 이리의 모습도 사라졌다.

 "이봐 라샤, 이런 마법도 있었나?"

 "있다고 해도, 그런 녀석이 쓸 수 있는 레벨의 마법이 아닌데!"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라샤였으나, 문득 둘러보니 이리가 입고있던 웨이트리스의 옷만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움찔……

 게다가 그 옷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다.

 "뭐지?"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호기심이 동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응시하던 라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려 쥐로 변해버린 이리였다.

 그 모습을 본 라샤가 갑자기 냉정함을 잃고 절규하기 시작한다.

 "꺄악──!! 쥐, 쥐잖아~~~~~!!"

 "응?"

 라샤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미, 미, 미겔! 어떻게 좀 해봐! 나, 쥐만큼은 진짜 무리야~~~~~!!"

 벽에 달라붙은 채로 울상지으며 날뛰는 라샤였지만, 마찬가지로 벽에 달라붙어 옴싹달싹 못하는 미겔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라샤에게 말한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구"

 "싫어~~~~~~~! 그래도 어떻게 좀 해봐~~~~~~~~~!!"

 이제는 그냥 떼쓰는 아이나 마찬가지다. 달라붙은 몸 중에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을 전부 사용해 버둥거리며 울부짓는 라샤였다.

 "헤헤, 이거 좋구만!"

 생각도 못했던 라샤의 약점을 알아낸 이리는 씩 웃으며 옷 아래로 풀쩍 뛰어든다.

 도도도도도……

 쥐가 된 이리는 폴짝폴짝 뛰듯이 잔해덩어리를 달려와 라샤의 코앞에 찰싹 달라붙는다.

 "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우렁찬 절규를 내지르며, 라샤는 그대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더니 흰자위를 내비치며 기절하고 말았다.

 "우히히. 끈질기게 쫓아오던 답례다!!"

 마지막에 승리를 취한 이리는,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설령 부부지간이라도 보고 싶지 않은 라샤의 굉장한 형상에, 미겔은 슬프게 탄식한다.

 "……이런이런"



 앞뒤 가리지 않고 모르는 거리를 달려다닌 뒤에는 보통 길을 잃기 마련인데, 상처 덕분인지 쥐가 된 이리는 마치 레이더가 달린 마냥 곧바로 가게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왼쪽 뺨에 커다란 십자 상처를 입은 쥐의 기분은, 어째 살짝 언짢아 보인다.

 "제길~~~~!! 그 멍청한 노사! 말도 안 되는 주문이나 걸고……"

 달리는 쥐가 된 이리의 뇌리에, 노사의 심술궂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쥐가 된다면 몸이 버티질 못한다고, 젠장!"

 고되보이는 돌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가는 이리에게, 다시금 공복감이 돌아온다.

 꾸르르륵……

 작은 배를 울리면서 필사적으로 달려간다.

 "하아…… 하아…….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진짜, 팜 그 년은 어디로 가버린 거야"

 비참한 이리의 눈앞에, 또다시 시커먼 사람들이 산처럼 모여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5

 "그만! 그만해~~~~~!!"

 머리를 끌어안고 외치는 점주의 절규하는 가운데, 폭도가 되버린 손님들이 가게 안 곳곳에서 난투를 벌이고 있다.

 "으햐~~ 이거 참 큰 소동이 되버렸는걸"

 가게 안으로 들어와 기둥을 타고 계단 손잡으로 총총히 이동하는 이리가 중얼거린다.

 따지고 보면 이리 탓으로 시작된 소동이다. 다소 찝찝함을 느끼지만서도, 지금의 이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을 위해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일단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지"

 아시는 바와 같이, 이리는 이미 두 번 정도, 리피아나의 유체를 봉납한 '왕가의 증표'의 유적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그 때 갑옷이나 의복을 벗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당시 이리가 신경쓰던 알약이야말로 유일하게 쥐로 변해버린 이리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약이었던 것이다.

 웨이스트리스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 의복이나 짐과 함께 알약을 둔 가게 2층 방으로 돌아온 이리는, 그 처참한 광경에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이리의 짐이 멋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데다가,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누, 누구야, 이런 심한 짓을 한 녀석은?!"

 분노를 머금고 둘러보는 이리의 눈길에 포착된 것은, 이리의 가죽주머니를 거꾸로 흔들며 내용물을 뒤적이는 갈프의 모습이었다.

 "젠장~~~!! 저 빌어처먹을 아재가!!"

 앞니를 드러낸 모습이 지금 당장에라도 덮칠 기세다.

 그런 이리의 등 뒤에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르르르릉……"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찾아온 녀석은 때마침 무료함을 달래고 있던 길이었다.

 "힉!!"

 평소에는 그냥 평범한 개지만, 지금 이리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맹수나 마찬가지다. 움찔거리며 돌아보니, 길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씩 웃는다.

 "에헤…… 에헤헤헤헤……"

 그에 맞춰주듯 실실 웃음을 띄우며, 이리는 도망칠 길을 찾기 위해 슬금슬금 뒷걸음질친다. 그러나 재밌어보이는 장난감을 발견한 길이 놓아줄 리가 없다.

 월월월월월!!

 갑자기 덮쳐오는 길을 보며 당황한 이리가 꽁무니를 빼며 도망친다. 마을의 거리를 잔뜩 돌아다녔는데, 이번엔 방 안을 뛰어다니는 꼴이 되버렸다.

 "으~~~~~~~!! 이 망할 개가~~~~~~~~~~!!"

 몸이 가벼운 쥐의 몸이라고는 해도, 지금껏 쌓인 피로나 공복이 피크에 다달았다. 빈혈으로 인한 어지로움을 느끼며, 이리는 길에게 농락당하고 만다.

 한편 갈프는 그런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묵묵히 이리의 짐을 뒤질 뿐이다.

 "길,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마라!"

 이리가 고생하는 모습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왕가의 증표'도 지갑도 전부 팜이 가져간 뒤였다. 갈프가 아무리 짐짝을 뒤져본들 돈이 될만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

 이러쿵저러쿵하는 사이에 가방 안에서 예의 알약이 든 약통이 떨어졌다.

 "응?"

 대수롭지 않게 약통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갈프를 보며, 이리는 아연실색한다.

 "아아!! 저걸 가져가버리면 평생 쥐새끼로 살아야 해!!"

 초조해진 이리는 어떻게든 갈프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만,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길을 터주지 않는다.

 "월월~~~!!"

 드리블하는 축구선수처럼 재빠르게 앞발을 들이미는 길에게, 이리는 농락당할 뿐이다.

 "크~~~~!! 방해하지 말라니까!!"

 그런 이리의 외침은 이미 무아지경이 되버린 길에게 닿지 않는다. 침을 질질 흘리며 기쁜듯 날뛸 뿐이다.

 몇 알 남지 않은 통을 바라보던 갈프는,

 "뭐지? 복통약인가?"

 라며,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휙 던져버린다.

 통…… 떼구르르르르……

 바닥에서 한 번 튕긴 약통이 굴러가더니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리의 앞에서 멈춘다.

 "좋아!!"

 이리가 소리치며 무서운 속도로 길의 앞발을 쓱 빠져나와 약통을 향해 몸을 던진다.

 "해냈다, 해냈어! 이것만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약통을 붙잡은 이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길.

 멍?

 "쳇! 나 참,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구만"

 밉살스럽게 이리의 속옷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갈프, 결국 수확은 없었던 모양이다.

 "뭐, 그 막나가는 꼬맹이가 팔려준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할까. 니─히히히히히!"

 슥!

 한참 웃는 갈프의 등 뒤에서, 커튼을 당기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강한 빛이 내리쬔다.

 "응?"

 눈부신 빛에 돌아본 갈프의 눈 앞에 비친 것은, 알몸 위에 잡아뜯은 커튼을 몸에 두른 이리의 모습이었다. 왼발로 길을 짓밟으며 인왕상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이리의 얼굴은, 무엇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어…… 어라~~~"

 그 상황에 갈프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리의 등장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막나가는 꼬맹이라 미안하게 됐네. 그래서? 대체 얼마나 받고 팔아먹으셨을까? 아앙?!"

 "히익~~~~~! 죄, 죄송합니다~~~~!!"

 결과적으로 가장 운이 없었던 사람은 갈프였다. 아침부터 쌓이고 쌓인 이리의 울분을 한 몸에 받아들이는 꼴이 되버렸으니…….



 태양이 서쪽 지평선으로 사라질 즈음, 바쁘게 오가던 여행객들의 모습도 하나둘 잦아들며, 다들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기 위해 숙소나 주점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 와중에 굳이 지금부터 마을을 나가 여로를 떠나려는 자의 모습이 보인다.

 한 사람은 얼굴을 잔뜩 얻어맞은 갈프다. 발치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과 함께, 허리에 밧줄을 묶인 채 두 사람 몫의 짐을 짊어진 채 걸어가고 있다.

 물론 뒤에서 밧줄을 쥐고있는 사람은 이리다. 갈프의 돈으로 비어있던 위장을 가득채운 뒤, 디저트로 나온 건포도를 손에 쥔 채 유연하게 걸어간다.

 "그나저나 아저씨"

 "예, 무슨 일이십니까요?"

 독기가 쫙 빠진 갈프는 기분이 나쁠 만큼 순종적이다.

 "댁이 했던 말 있잖아, 진짜겠지?!"

 "무, 물론입죠!"

 벌벌 떠는 갈프를, 이리가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눈초리로 노려본다.

 "글쎄 어떨까……. 댁, 이번에도 속이는 거라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알고 있겠지?!"

 그렇게 협박하는 이리에게, 갈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이 산 너머에 신비한 힘으로 번영한 도시가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요. 그게 무슨 보물의 힘이라는 부분까지는 제가 이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까요"

 "누가 말했는데?"

 "여행 도중에 만난 기사처럼 생긴 젊은이였습죠"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니, 그동안 약해졌던 갈프의 표정에 추악함이 돌아온다.

 "그 녀석이 또 어마어마한 봉이라서…… 헤헤헤헷"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 갈프에게, 이리가 질린 표정으로 물어본다.

 "그래서?! 그 도시는 어딘데?!"

 이리의 노성에 분위기 파악을 한 갈프가 다시 표정을 굳히며 대답한다.

 "아, 죄송합니다……. 그…… 분명, 사레이엄이라는 이름의……"



 "사레이엄?"

 말에게 건초를 주던 팜이 돌아보며 되묻는다.

 "예……"

 차분하게 대답한 라엘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서히 커져가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다.

 만난 이후로 줄곧 망토를 걸치고 있었기에 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라엘의 차림새는 마치 왕국의 왕자님같았다. 딱 보기에도 고급져보이는 옷에, 부조가 새겨진 갑옷에는 군데군데 금세공이나 보석 장식까지 보인다. 상대가 팜이 아니었더라면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휘황찬 차림새다.

 팜과 라엘 두 사람은 이리 일행보다 앞서 마을을 나와 산마루까지 와있는 상황이다. 말을 타고 길을 따라 왔기에 약간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확실하고 안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 팜의 체력까지 신경쓴 것인지, 라엘은 빠르게 야영 준비를 제안했다. 만약 이리였더라면 호통을 칠 게 뻔했다.

 소풍 나온 기분이 된 팜이 슬쩍 라엘 옆에 앉으며 묻는다.

 "있지, 라엘? 그 사레이엄이라는 도시, 정말로 보물의 힘으로 번영했어?"

 "예……. '정령왕 사가스'의 힘을 빌렸다는 이야기였죠"

 "정령왕?!"

 생각도 못했던 말에 되묻는다. 팜에게 있어서 '정령왕'이라는 존재는 동경의 대상이다.

 정령의 힘을 빌리는 모습으로 마법을 발휘하는 자는 모두들 그 실력을 갈고닦는 수련을 거듭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정령왕'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하늘, 바다, 육지를 포함해 '왕'이라는 칭호를 지닌 정령은 많지 않다. 그 얼마 없는 '정령왕'에게 인정받은 마도사는 명예와 함께 절대적인 마력을 얻는다고 한다.

 햇병아리기는 해도 마도사인 팜이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마어마한 마도사가 있었나보네……. 하지만, 어째서 그런 마을이 멸망해버렸을까?"

 그런 팜의 질문에, 라엘은 슬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들었다.

 "불행이라는 녀석은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지요.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끝없는 어둠 속으로 밀어넣어버려요. ……사람은 약해요, 팜. 고개를 들지 않으면 빛을 볼 수 없다고 알고는 있지만, 마음의 상처로 인한 고통 탓에 무심코 고개를 숙이고 말죠"

 그런 라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팜도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글썽인다.

 "……라엘"

 "미, 미안해요. 이상한 말을 해버렸네요"

 팜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했는지, 라엘은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둘은 그대로,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묵묵히 모닥불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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