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위험한데…… 이거, 대마초 아니야?
숲에 뜨거운 햇살이 내리쬔다.
코미케에서 산 한여름의 미소녀가 표지로 장식된 책처럼, 멋진 예감이 넘쳐나는 섬머. 하지만 나는, 눈앞의 범죄성 식물에 시선과 야망이 못박히고 말았다.
습도와 풀내음과 벌레의 울음소리. 다른 사람의 모습은 없다. 난 주변을 신중히 둘러보고나서, 금단의 식물에 손을 뻗었다.
틀림없어, 진짜다.
일확천금. 아니,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찬스 도래. 이 세상에 마약 문화가 있을 리 없잖아. 혹시 처음이라면, 오늘부터 내가 톱이 될 수 있다. 마약으로 벼락부자가 된 영 갱이다.
서브 웨폰인 숏 소드를 써서, 캘 수 있을만큼 수확한다. 위험한 웃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위험한 비트가 심장에 새겨진다.
타락, 쾌락, 약에 절은 인생, 시작하려는 나, 암속성. 소년의 여름을 끝내고, 잔인한 죄를 맛보고, 살아가겠다고 리얼, 살아간다고 리얼충. 오늘부터 너희들 전원 루저. 왜냐면 나 홀로 용자니까. 진홍의 엔드리스레인이 날뛰는 필드, 결정타를 날리는 위드. 마리화나의 주변에서 피어나는 부처. 롸큰롤을 돌려. 웰컴 투 언더그라운드 인 어나더 월드. 치바 이즈 갓. 미안하고 고맙다.
진홍의 엔드리스레인이 날뛰는(이하 후렴 반복)
"아, 보르도풀이네. 팬티 마음껏 빨 수 있겠는걸. 살았다"
창관 뒤뜰에서 빨래를 하던 하루에게,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캐온 대마를 자랑해줬더니, 이상한 소리를 한다.
팬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녀석?
"봐, 이 세제 봉투에도 이파리 그림이 그려져 있잖아. 업자 아저씨한테 가져가면 세제로 가공해주거든. 사는 것보다 싸고"
"잠깐, 거짓말이지. 진짜 그냥 세제라고? 그렇게 더운 곳에서, 필사적으로 수확해왔는데? 어둠의 테마송까지 작사작곡했는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런 건 모르겠고. 그보다 이거, 받아도 되지? 다 같이 나눠서 쓸게. 진짜 고마워. 러브 폭발"
망할 열받는 얼굴로, 하루는 내게서 대마인 줄 알았던 보르도풀을 가져간다.
말도 안 돼─. 이 무슨 몰상식한 이세계란 말인가. 왜 대마를 팬티 세탁 같은 곳에 쓰는 거냐고. 공항 세관이냐.
하─아. 진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이세계구만. 대체 왜 존재하는 건지.
돌아가서 그거하고 잠이나 잘까──라고, 생각했던 차에, 기척을 느끼고, 발을 멈췄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까.
수수께끼의 생명체가, 떨어트린 보르도풀의 이파리를 입처럼 생긴 부위로 먹고 잇었다. 무의식 중에 전투 태세를 갖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은 보르도풀에 쏠려있는 듯, 한결같이 지면에 몸을 웅크리고 먹어댈 뿐이었다.
생물이라 부르기에는 기괴했지만, 마물이라고 하기에는 또 이형이다. 역전의 모험자인 나도 긴장해버릴 정도로 이해를 초월했으며, 게다가 '친숙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 챙챙 소리를 내본다. 벌레같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더니, 버둥버둥 지면을 뒹군다.
크기는 강아지 사이즈라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감이나 애정과도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 형상.
동정 몬스터다.
루페 엄마한테 들은 적 있다. 숲 안쪽에 서식한다는 전설의 생물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로 들었던 것 이상으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완전히 다 드러낸 상태라는 느낌이다.
어쩌면 보르도풀의 냄새를 맡고 왔을까? 내가 데려와버린 건가?
그건 곤란하다. 살아있는 몬스터를 마을로 가져오는 행위는 범죄다. 일단은.
금지되어있긴 하지만, 암암리에 거래되기도 한다고 들은 적 있다.
즉, 이 또한 일확천금 찬스 도래인 줄 알았다. 이 재밌는 생물을 팔면 되잖아.
그렇담 일단, 이곳은 위험해. 하루가 돌아오니까. 난 그 생물을 살짝 안아올렸다. 뜨끈하고 부드럽다. 위험할 정도로 리얼하고.
고간에 갖다놔봤더니 개웃겼다. 아하하, 바보같잖아─.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헛간 벽에서 갑자기 얼굴을 빼꼼 내민 소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자지 개커!"
그것이, 나와 그녀의 첫만남이었다.
동정 몬스터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그녀는 꽤나 놓아주지를 않았다. 아무튼 들키면 곤란하다고 말했더니, '그럼 숨을까?'라며 허름한 헛간 안으로 안내해줬다.
"나도 좀 감추고 싶은 게 있어서, 자주 들락날락하거든. 동물을 좋아하는데 방에서 기르면 안 된다고 하니까, 예전에는 여기서 기른 적도 있어. 술 같은 것도 있긴 한데, 안쪽은 안 쓰는 물건밖에 없어서 뭐든 숨길 수 있지"
평소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으니까, 벽을 뚫고 출입구 대신 쓰고 있다며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건 알겠는데, 먼저 들어갈 때 팬티가 보였다. 고마워라.
"자지도 있잖아, 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키우자. 내가 돌봐줄게"
얼굴을 반짝이며 동정 몬스터를 쓰다듬는다. 동물을 좋아한다는 말은 진짜인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이건 내 사냥감이다. 남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다고.
"아니, 우리 집에서 기를 거니까 됐어. 사람이 없을 때에 데리고 갈게"
"하아?"
속눈썹이 바스스 소리를 내며 커다란 눈동자로 노려본다. 어라, 자세히 보니 꽤 미소녀잖아? 그런데 말투도 성격도 날카로워 보이는 것이 내 취향은 아니다. 게다가 하루랑 겹치기도 하고.
"그보다 그거, 숲에서 사는 생물이지? 살아있는 채로 데려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통보해도 괜찮겠어?"
"어, 아니, 그치만 암거래라는 것도 있으니까……"
"너, 여기 손님이지. 게다가 딱 보니까 그거네. 루페의 손님 맞지. '마마'라고 말할 것 같아. 틀렸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 걸 보기만 해서 알 수 있나? 무슨 공통점이 있다고?
그녀는 싱긋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갑자기 거리감이 좁혀져 당황한 나는 몸을 뒤로 빼고 말았다.
"루페한테도 알려줄까나. 걔, 이런 거 엄청 싫어하니까 말이야─"
정말로, 이세계라는 놈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뭐 됐어. 나도 귀여운 생물은 싫어하지 않고. 이 녀석이 귀여운지 아닌지는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남자라면 남처럼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기도 하고.
"내 이름은 진홍의 엔드리스레인. 우리 둘의 공유 재산으로써 이 녀석을 지켜보자고"
"난 키즈하. 여기 창녀야. 잘 부탁해"
이 녀석, 분명 매상 낮겠지.
성격 나쁘고. 여자답지 않고. 루페 엄마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고.
"자지도 잘 부탁해─"
"아니 잠깐만. 아까부터 멋대로 부르는데, 그 녀석 아직 이름은 안 지어줬거든. 그나저나 여자애가 그런 말 하는 거, 난 별로 안 좋아해"
"그치만 자지잖아?"
"아니아니, 겉모습은 완전 그거 맞지만, 독립된 생물이잖아. 이 녀석의 아이덴티티는 절대 그쪽이 아니야. 모처럼 부르는 거라면, 그렇지, 예를 들면 '진홍의 러스티네일'이 멋있다고……"
"자지가 좋지 않아?"
"자지 자지 시끄럽네 진짜!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키즈하의 경박하고 뻔뻔한 느낌이 하루처럼 느껴져서, 첫만남인데도 불구하고 가볍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내가 큰 소리로 말했더니, 깜짝 놀라 몸을 떨며 눈을 꾹 감았다.
맞는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 손님이 창관에 많으니까.
"……아니, 자지라도 상관은 없지만"
여자애한테는 상냥하게 대하라고, 루페 엄마가 종종 말했다. 키요리가 왜 나랑 잠시 거리를 두게 되었는지(그 녀석이 아직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생각해보라며 숙제를 내준 적도 있다.
한 마디로, 이쪽 세계의 여자는 나이브하다는 거겠지. 남자는 폭력 머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전혀 그렇지 않은데.
"응. 자지가 좋아. 어딜 봐도 자지잖아!"
"그렇지!"
그래도 뭐, 이런 여자라도 상냥하게 해주면 어느새 플래그가 세워져서 이벤트가 발생할지도 모르고. 전혀 기쁘지 않지만.
플래그는 세워졌다. 번잡스런 루트로. 게다가 수정 불가능한 강제력도 있다.
"너 말야, 자지한테 뭔가 했어? 축 늘어졌잖아. 아무리 쓰다듬어줘도 건강해지지 않는데"
"아니, 맨날 보르도풀 세제면 질리지 않을까 해서, 찻잎을 줘봤는데……"
"마음대로 먹이를 바꿨어? 자지가 싫어하는 걸 주면 어떡해. 이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거 먹어야 쌩쌩해진다구. 불쌍한 우리 자지. 쪽 쪽 해줄게"
"있잖아, 역시 자지라는 이름은 좀 그렇지 않아? 네 과보호가 절묘해서 거북한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하네. 자지는 자지잖아. 우리 애한테 이상한 불평하지 말아줘"
"하아아아? 자지는 내 자지인데요? 남의 것에 멋대로 입맞추지 말라고. 제대로 물고 빨아달라고 말하라고!"
"뭐래 이 동정 새끼가. 자지는 내 자지거든요~! 너 같은 녀석이 손대게 두지 않을 테니까. 내가 관리할 거야"
"야 야, 관리라고 했냐, 너. 내 자지를 관리해주겠다고 한 거지. 농담하지 말라고, 아니, 진짜 해주겠다면, 뭐, 아니, 농담하지 말라고 임마. 자지를 돌려줘!"
"까득"
"아파아아아아앗!"
내 것을 물어버렸잖아 이 년이. 아니, 손이지만. 자지를 돌려받으려는 내 손에, 상처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있는 힘껏 이를 박아버렸다.
"내 자지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이 년, 진짜 돌았네.
빡침 게이지가 오르락 내리락. 돌아버리겠다.
흥분해서 거친 숨을 내쉬는 그녀와, 거리를 두고 앉는다.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대화가 되질 않는다.
이런 녀석 꼭 있다니까. 자기 감정을 컨트롤 못 하는 녀석.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빡치고. 자기 생각만 하면서 남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는다. 있지 있어. 누구였더라?
진짜, 이상한 년이랑 얽혀버렸다. 성가신 플래그를 세워버리고 말았다. 뭐, 여자의 잇자국 정도는 레벨 90의 육체를 지닌 나로서는 금방 치유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이건 화내도 되는 상황이라 생각되는데.
"하아, 후우……"
이 녀석을 흥분하게 만들면 안 되겠지 라며, 배려해주고 만다.
처음에 상냥하게 대해준 게 잘못이었다. 아니 얽혀버린 자체가 실수였다. 설마, 이렇게 난폭한 여자였을 줄이야. 도깨비다. 도깨비 공주 같은 느낌.
"……너도 마실래?"
잠시 침묵해서 침착해졌는지, 키즈하가 나한테 다가온다. 아까 화냈던 것도, 나를 물어뜯은 것도, 언제 그랬냐는 듯한 표정으로.
헛간 안에서, 자지와 함께 숨겨둔 작은 병을 하나 꺼내더니, 키즈하가 한 모금 마신다.
"이걸 마시면, 마음이 붕 떠올라. 편안해져. 난 이게 없으면 이제 안 될 것 같아"
입가에 피 같은 액체가 번진다.
붉은 와인 같은 것을, 그녀는 종종 마시곤 했다.
알콜 중독인가? 나는 그런 거 마시고 싶지 않다. 부모의 취한 모습이 보이니까.
"후후훗"
키즈하가 갑자기 쾌활하게 굴더니, 자지를 끌어안은 채 나한테 기댄다. 묘한 냄새가 난다.
"몰라? 양귀비박쥐의 피. 최고로 기분 좋아질 수 있다고. 까딱 잘못하면 큰일이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양귀비박쥐의 피라니. 그거 사람이 마셔도 괜찮을 리 없잖아. 뭐, 어차피 상품명이겠지만.
"이걸 마시고 하면, 엄청 기분이 좋아. 몰랐지?"
단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할까, 범상치 않은 느낌이라는 사실은 둔감 주인공인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거.
"들키면 체포되니까, 여기 숨겨뒀는데"
역시 있었구나, 마약!
내 꿍꿍이를 미묘하게 깨버리는구나, 이세계라는 놈은. 항상 나를 앞서가는 느낌이 든다. 아니면 내가 신이랑 사고방식이 비슷한가.
"어때, 마셔볼래?"
"어, 아니, 그래도, 좀 무서운걸……"
"그냥 조금씩 하면 괜찮다구. 사람에게 맞는 양이 있으니까, 거기부터 해보면 된다니까. 뭐, 하다보면 자연스레 늘어나지만"
"으─음. 아니, 관둘래. 그런 건 역시 좋지 않아. 한 번은 마약왕을 꿈꿨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넘고 싶지 않은 선이라고나 할까. 너도 관두지 그래?"
키즈하는 몽롱한 눈으로 미소짓더니, 한 모금 머금고 얼굴을 들이댄다.
야 야, 키스라도 할 셈이냐, 라고 생각한 순간 혀를 빼앗기고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처음 겪어보는 약 체험에 처음 겪어보는 드러그. 이거 확실하게 훅 가버렸다.
피 냄새. 쇠 맛.
언젠가의 기억이 플래시백하더니, 그대로 의식도 끊어졌다.
***
《이세계 전송까지 5초》
"───코야마!"
갑작스런 고성에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냄새가 변했다. 소리가 변했다. 색감이 변했다.
세계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하아?
거짓말이지.
우두커니 멈춰서버린 나를, 뒤에서 누군가가 밀쳐냈다.
《이세계 전송까지 4초》
중심을 잃어서,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운동화도. 교복 바지도. 무거운 가방도.
그러니까, 거짓말 하지 말라고.
눈앞에서 야구 엑스트라와 세키구치가 충돌한다. 구른다. 아스팔트에 펼쳐지는 검은 액체가 보글보글 거품을 일으킨다. 개노맛이었던 콜라. 미지근한 탄산.
순식간에 부풀어오르는 수많은 기억에, 뇌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라고 명령한다.
뒤에서, 폭주 트럭이 오고 있을 터.
《이세계 전송까지 3초》
야구 엑스트라를 밟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방향은 당연히 정해놨다.
마치 그때와 똑같다. 위험한 약을 먹으면 이상한 꿈이나 환각이 보인다고 하던데, 설마 이런 꿈과 마주하게 될 줄이야.
달린다. 달린다. 아직 '코야마'라는 이름을 지녔던 때의, 머리가 길었던 하루를 향해.
《이세계 전송까지 2초》
"코야마아아!"
닭살이 돋았다. 기억이 통째로 재현되고 있었다.
아니, 이건 꿈이다. 키즈하와 이상한 약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 순간을 떠올리다니 최악이다.
땀이 쏟아진다. 이 다음에, 우리는 이세계로 날아간다. 그건 괜찮다. 이세계로 가고 싶었으니까.
그저, 그 순간이 진짜 최악이었을 뿐이다.
이제 곧 하루가 돌아본다. 난 세계에 절망한다.
《이세계 전송까지 1초》
'얘 누구더라?'
하루가 그런 표정으로 날 본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코야마 하루가 날 인식한 순간.
언제나 같은 교실에 있었잖아. 난 너를 안다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나서 일 년하고 조금 더, 몇 번이나 널 멀리서 봐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도, 넌 이 다음에 나랑 잔다. 네가 먼저 유혹한다고.
우리가 지금부터 가는 곳은, 그런 세계니까. 꼴 좋다!
***
"──일어나!"
누군가가 있는 힘껏 뺨을 후려친다. 눈을 떠보니, 키즈하가 내 위에 있었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는데, 정말이지, 키즈하는 얼굴만큼은 개쩐다 싶었다. 그리고 가슴이랑 엉덩이도.
"아─,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쓰러지더니 심장도 멈춰버려서. 죽어버린 줄 알았다구"
"헐, 진짜? 그렇게나 맛탱이 갔었어?"
몸은 아무렇지도 않다. 정신도 또렷하다. 잠깐 잠을 잤을 뿐이라는 느낌이다. 가사 상태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딱히 변했다는 구석은 없다.
그저.
"어땠어? 기분 좋은 느낌이었어?"
"아니, 평범하게 기분 나빠. 보고 싶지 않았던 걸 봤어. 아니, 짜증나는 자신과 만났다고 해야되나……"
생각해 보면 그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하루였다. 얼마 뒤에 이세계 투어가 기다리고 있다 해도, 그걸로 퉁칠 수 없는 기억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계다.
"흐─응…… 아직 부족한가. 좀 더 해볼래?"
"아니, 됐다니까. 진짜로 이제 안 해"
애초에, 이 액체는 뭐냐고. 맛도 냄새도 피랑 비슷하다. 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난 이 맛을 안다. 세계를 뛰어넘었을 때의 맛이다. 너무 기분 나쁘잖아.
게다가 키즈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환각을 보는 동안, 죽은 것처럼 되었다고 하고.
그런 걸 몇 번이나 마실 수 있겠냐고. 난 노래방에서 나오는 복불복 타코야키조차 절대 손대지 않는 사나이라고. 먹을 거에 리스크를 짊어지는 게임 감각, 하나도 이해가 안 된다.
"음─"
미지근한 혀가 내게 겹쳐진다.
그러니까 안 마신다고 했잖아!
***
《이세계 전송까지 5초》
"──코야ㅁ"
"키즈하아아아아아아!"
세키구치의 큰 목소리에 지지 않을 정도로 절규를 외쳤다.
트럭이, 직진 차선을 비스듬하게 타고 내려오며 타이어 소리를 울린다.
뒤에서 밀쳐낸 탓에 나는 발을 헛딛고 말았다. 너도 적당히 좀 해라, 야구 엑스트라.
《이세계 전송까지 4초》
웃긴 동영상을 재생하듯, 이번에도 호쾌하게 구르며 나자빠지는 야구 엑스트라와 세키구치가 웃기다.
그래도, 혹시 이 녀석들이, 조금 더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봤다면, 나나 하루가 이세계로 가지 않았을지도?
그렇게 생각해보니 웃음이 싹 가신다. 어쩔 수 없지, 달려볼까.
《이세계 전송까지 3초》
야구 엑스트라와 세키구치를 하나, 둘 즈려밟고 하루를 향해 달린다. 세 번째라 그런지 경쾌하다. 하지만, 혹시라도 여기서 내가 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하루는 휘말리는 일 없이, 이쪽 세계에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저쪽으로 가지 못했다던가.
그런 생각을 해버린다.
《이세계 전송까지 2초》
여기서 하루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 걔는 나 따위 모르니까.
과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건 이세계의 약이 보여주는 이세계의 꿈. 그러니까 달리기만 할 뿐.
《이세계 전송까지 1초》
이제 곧 하루가 돌아본다. 그러고 보니 이 무렵 하루의 얼굴, 지금보다 살짝 통통하고, 어리게 보인다.
이거 어느 정도 전 일이었더라? 우리들, 이세계로 간지 이제 일 년은 됐나?
혹시 거울이 있다면 지금의 내 얼굴과 다르다고 생각하려나.
'얘 누구더라?'
혹시, 나도 내 얼굴을 보면 그런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
"──아, 일어났네"
죽음의 심연에서 꾸는 꿈에서 깨어나, 원래 세계로 돌아온다.
키즈하는, 자지를 쓰다듬으며 피를 마시는 중이다.
나의 무언가가 먹혀버린 기분.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너, 웃기지 말라고. 두 번 다시 마시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에─, 그치만 그건 나랑 키스하고 싶어서, 싫은 척 튕겨본 거 아니야?"
"아니라고!"
깔깔 웃는 키즈하의 목소리에, 난 살짝 기분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그 소녀와 자지와 약으로 절여진 헛간에서의 밀회는, 이 이후로도 계속됐다. 루페엄마한테는 말할 수 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름이었다.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마음과 켕기는 마음이, 에어컨 없는 세계에서 일말의 청량감을 안겨줬다. 이런 나쁜 짓을 함께할 친구라니, 예전 세계에서는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여름이라고 생각했다.
"자지 커졌네"
또 내 고간이랑 착각해 똑같은 리액션 원툴은 여전했지만, 키즈하와 자지와 창관의 뒷뜰에서 지내는 시간은 이미 내 몸에 배어버리고 말았다.
자지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강아지에서 개가 되었다는 느낌. 슬슬 모자이크 처리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최근, 식욕이 개쩔더라"
세탁용 세제인 보르도풀을 펫 사료 대신 주고 있는데, 한 번에 한 봉지 정도는 먹어치우게 되었다. 자지의 적정 체중 따위는 우리도 모르기에, 일단 먹고 싶어하면 먹이고 있는데.
"그보다 말야, 슬슬 숨기고 기르는 것도 한계 아니야? 우리 집으로 데려가자고"
"하아? 싫거든. 여기서 기를래. 자지의 부모는 나인걸"
"이런 좁은 곳에 갇혀 지내는 건 자지도 싫어할걸. 넌 모르겠지만, 땀에 절은 자지가 얼마나 짜증나냐면 팬티 안에 삶은 개구리를 넣은 정도의──"
"그런 말이 더 짜증나"
"아파아앗!"
또 손을 물렸다. 도깨비년 같으니.
"그럼 말야, 한 번 밖으로 데리고 나가볼래?"
내 오른손에 남은 잇자국을 할짝 핥으며, 키즈하가 난데없는 말을 꺼낸다.
"그건 무리지. 들키면 어쩌려고?"
"그냥 자지라고 말하면 되잖아. 네 자지라고. 좋아 결정. 내일, 엄청 빨리 일어나서 집합하자"
"하아아? 너, 진짜 사람 말 좀──"
"결정, 결정이라구!"
키즈하가 밀어붙인 제안으로, 호수까지 가게 됐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낚시꾼이나 빨래하러 오는 근처 주민이 있는 정도겠지. 조금 떨어져서 다니면 애완동물을 데리고 나온 커플 정도로만 보일 터. 그러니 키즈하와 자지와, 셋이서 호수 근처에서 놀았다.
자지는 오랜만의 집 밖으로 외출이라 태양을 쬐느라 열심이다. 그 모습을 키즈하가 넋을 잃고 바라본다.
굉장히 기뻐하는 자지를 쓰다듬으며, 키즈하가 말한다.
"……너 말야, 좀 별나네"
"뭐, 별나다고 해야하나, 괴짜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 난 당연한 말만 했을 뿐인데 말이야"
"남자면서 동물 같은 거 귀여워하고. 그리고, 나한테 손찌검도 않고"
"아니, 그건 의외로 평범하지 않나? 여자를 때리다니 쓰레기잖아. 여자랑 아이, 그리고 귀여운 동물은 때리지 않지"
"이상해. 그럼 남자한테도 손찌검하면 안 되잖아"
"앗, 그걸 말하자면 내 일이라 해야하나, 멋진 부분이 사라지니까……"
"아이를 때리지 않는 건, 아이가 좋으니까?"
"좋아……하려나. 뭐, 귀여운 애는 귀엽지. 말을 잘 듣는다면 좋아하지"
친척 꼬맹이는 놀아준 적도 있고, 게임도 같이 했다.
그런 건 싫어하지 않는다. 이쪽 세계라면, 재능이 보이는 꼬마의 검술 스승 같은 것도 좋겠는걸. 어차피 레벨도 한계점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용사를 육성하는 입장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해피엔딩이지.
"살짝 이해되네. 자지를 보고 있자면, 나도 아이가 갖고 싶다고 생각하거든"
"아니, 넌 관둬라. 애 키우기 절대 무리니까"
"루페한테 키워달라고 하면 되지. 난 귀여워해주기 담당"
"절대 해선 안 되는 놈이잖아……"
"낳아줄까?"
"뭘?"
"당연히 아이지. 너의"
내가 굳어버리는 모습을 보더니, 키즈하가 웃는다.
"농담이지.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바보야"
웃으려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당연하게도 목이 메였다.
아니아니 동요 따위 하지 않았거든. 할 리가 없지. 재미도 없는 개그. 얼굴도 전혀 뜨겁지 않고, 심장도 쿵쾅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고.
"응"
"으으응?!"
갑자기 입술을 빼앗겼다. 당했다, 또 양귀비박쥐의 피냐.
가사 체험을 각오하고, 쓰러졌을 때 후두부가 깨지지 않도록 팔로 감싼다. 그런데, 쓰러지지 않았다.
그건 평범한, 키스였다.
"……슬슬 돌아가자"
휙 떨어지더니, 자지를 안고 키즈하가 먼저 간다.
후두부에서 입술로 팔을 옮겼다가, 역시 닦지 않기로 한다.
키스를 당해서 동요하지 않았다고. 그게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
그저, 우리가 그런 싸구려 연애 드라마 같은 짓을 하는 사이에 가장 즐겼던 녀석은 자지인 모양인지, 그 이후로도 밖으로 나가고 싶다며 빈번하게 요구해오게 됐다.
"어쩔 수 없으니 뒷뜰에서 놀게 해준다니까. 아침 일찍에"
"아니, 들키면 큰일이라고 말했잖아"
"안 들키게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이 년이 괜찮다고 한다면 당연히, 괜찮을 리 없었다.
자지의 식욕과 성장도 멈출 줄 모르고, 아침 저녁 두 번의 식사로도 부족해, 키즈하가 뒷뜰에서 놀아줄 때 다른 종업원들이 널어놓은 팬티에 손을 대게 됐다.
보르도풀은, 세탁 후 남겨두었다가 빨래를 건조시킨 다음 마지막에 털어서 떼어낸다. 자지에게는 절호의 간식인 셈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아챈 건 사건이 일어난 뒤였지만, 키즈하 그 년, 한두 장 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식으로 전부터 자지 좋을대로 놔둔 모양이다.
자지의 타액은 하얗고 끈적끈적하다. 그런 게 묻은 속옷은 적당히 버렸다고 한다. 키우는 주인이 책임감을 내다버린 결과, 역시 큰일이 나버렸다.
"어떡하지.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이 녀석, 모든 속옷에 싸버렸어"
"싸버렸다고 말하지 마. 그리고,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방치해뒀냐고. 훈육은 기르는 주인이 할 일이잖아!"
대량의 속옷은 얼버무릴 방도가 없었기에, 세탁하라고 했다. 하지만 키즈하는 폐급이라 빨래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루페엄마한테 부탁해보겠다는 말까지 꺼내는 지경이다.
가능하겠냐, 그딴 거.
어쩔 수 없으니 내가 빨아주기로 했다. 일단 전부 우리 집으로 옮기고, 한 장 씩 빨면서, 와, 이거 졸라 야하네 라고 생각한다던가, 루페 엄마나 하루가 입은 모습 따위를 겸사겸사 상상했더니 시간이 꽤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건조대 근처에 두려고 했는데, 거기 파인 구덩이라는 고전적인 함정에 걸려버렸다는 말씀.
"너였냐, 걸어다니는 성범죄자"
너였냐, 고전적인 폭력 히로인. 부탁이니까 최신 만화나 라노벨 좀 읽어달라고. 히로인 속성 업데이트 좀 하란 말이야.
게다가 날 속옷 도둑 취급하다니 당황스럽다.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팬티 같은 거에 흥미 전혀 없고. 그냥 최고의 천일 뿐이잖아.
하지만 소란스러운 소리에 모여든 종업원들 사이에 키즈하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포기했다. 젠장, 여긴 맡기라고. 넌 자지를 어디론가 숨겨. 소동 탓에 흥분해서 날뛸지도 모르니까.
아이 컨택트가 설마 통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키즈하가 끄덕이더니 슬쩍 빠져나간다. 하루가 생각도 못했던 긴박 기술로 귀갑묶기를 해버릴 때는 놀랐지만. 난 그대로 자지와 교대하듯 헛간으로 내던져졌다. 다행이잖아, 자지를 옮길 수 있어서.
남은 건 이 로프를 풀어서…… 어라?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
절묘하게 묶어놨다. 꽉 조이지는 않는데 중요한 포인트는 확실하게 봉해놨다. 관절을 움직일 수도 없고, 빼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진짜 그 녀석, 너무 잘 묶는데? 창녀란 이런 일도 배우나? 주문에 대응해주기 위해서? 그럼, 앞으로는 제대로 오더를 짜고 방문해야겠는걸.
안쪽 벽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빛이 들어온다. 드디어 와줬구나, 파트너. 늦었잖아. 그래도 살았다고.
"…………"
키즈하는,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불쾌한 표정이었다.
"너 말야. 루페랑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건방진 년이랑도 잤어?"
"어, 하루 말이야? 아, 뭐, 옛날에 좀"
뭐, 잤다기보다 까놓고 말해 아다 떼준 상대였지. 그러고 보니, 전에 무슨 말다툼 비스무리한 걸 하고나서 한 적 없네. 내가 엄마랑 그린라이트 각이라 그렇겠지만.
"믿어지지가 않네. 나, 걔 엄청 싫어. 걔랑 자는 남자도 싫어"
키즈하는 점점 화를 내더니, 내 목덜미를 콱 붙잡는다. 아니, 그보다 얼른 로프 좀 풀어줘. 늬들 교우관계 따위는 관계 없으니까.
"걔는 항상 루페랑 사이 좋게 지내지. 루페의 사람 좋은 점을 파고들어 독점하려 들다니. 루페는 내 마마가 될 여자인데. 걘 우리들로부터 루페를 훔쳐가려 한다고, 비겁하다고!"
나로서는 평소의 그녀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모른다. 그저, 루페 엄마랑 키즈하는 사이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 엄마는 상냥하고 활기차고 겉모습은 로리인데 모성 본능이 두텁다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귀중한 존재다. 하지만 꽤 엄격하게 지적이나 훈계를 하고, 상대를 관찰하고, 아무에게나 상냥하지 않다는 점 정도는 나도 안다.
처음에 난 키즈하가 하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도 지금이라면 안다.
루페 엄마는, 아마 키즈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이 녀석, 신 캐릭 주제에 인상이 너무 강력하다. 드퀘5 리메이크냐고.
"너도 걔 짜증난다고 생각하잖아. 이제 그만, 그 년을 쫓아내려고 생각중이거든. 신입 주제에 '저는 여기 중심인물이예요'라는 태도도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래도, 키즈하도 남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해석하고 싶을 뿐. 있다니까. 그런 녀석 있지. 있었다고.
아아, 어째, 키즈하를 여자로 보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
"그렇지, 하루는 분명 짜증나.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주는데, 내 마음은 알아주지도 않는다니까. 지금도 오타쿠라는 편견에 치우친 눈으로 보고 있을걸. 나도 이쪽에 와서 변했는데 말이야. 성장했다고"
"응 응, 이해해"
"그 녀석 요령만큼은 좋으니까, 자기 혼자서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한다고. 내가 얼마나 그 평화로운 생활에 공헌하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처음 창녀 레벨이 낮았을 때 키워준 것도 나잖아. 그 녀석은 그런 것도 모른다니까. 내가 없었으면, 어떻게 이 험한 이세계에서 살아가겠냐고"
"응. ……응?"
"그래도, 그럴 수도 있다고 요즘 생각하게 됐어. 하루도 이쪽에 오고나서 변했거든. 매일 교실에서 봐온 내가 하는 말이니까 틀림없어. 강도를 올렸다고 해야하나, 어쩌면 지금이 진짜 하루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도 질 생각은 없지만, 그 녀석을 보고 있자면, 내 생각만큼 성장했는지 가끔 의문이 들어. 어째…… 그 녀석이 더 이쪽 세상에서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서"
"저기, 너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말해줄래"
"한 마디로, 나한테 그 녀석 험담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거야. 내가 그 녀석을 가장 잘 아니까. 친구거든, 코야마 하루는"
키즈하의 눈이 가늘어진다. 감정이 이렇게 얼굴에 다 드러나서 창녀 일을 해먹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안 팔리는 거라고.
"……그 년 편을 들겠다고?"
"편을 들어주네 마네가 아니야. 그냥 반 친구 이상 소울 메이트 미만이거든. 게다가 너도 마찬가지고"
"하아?"
"누군가가 네 험담을 하면, 아마 난 기분이 나쁠 거야. 똑같다고. 듣기 싫으니까, 그렇게 말했을 뿐이야"
키즈하는, 한숨을 쉬고는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양귀비박쥐의 피가 든 병을 집어들더니 한 모금 머금는다.
"하아……"
관능적인 한숨. 그건 뭐 좋다고 치고, 슬슬 풀어주지 않을래?
"너 진짜 별나구나. 험담은 그만두라니. 하, 애냐"
"시끄럽네. 부끄러워지잖아"
"절대 험담하지 않는 여자는 루페 정도야.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 리도 없고. 무리겠네"
루페 엄마는 천사니까 당연히 그럴 테고, 평범한 여자는 그만큼 순수한 영혼을 가질 수 없다. 확실히 무리네.
그래도 키즈하는, '알았어'라고 했다. 고개를 든 나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네가 싫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으니 관둘게. 그 대신, 너도 내 앞에서 그 여자 얘기는 하지 마. 내 이야기만 해"
양귀비박쥐의 피를 입에 머금고, 키즈하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붙인다.
"으응……"
혀까지 들어와서,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귀갑묶기를 당한 채로.
***
《이세계 전송까지 5초》
"───코야마!"
꿈속에서 오랜만이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러고 보니 얼마동안 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리운 원래 세계의 풍경. 하루한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녀석에게는 알려줄 수 없는 비밀이다. 가사라는 위험한 도박까지 뛰어넘어야 하니까. 뭐, 나도 강제로 참가된 처지지만.
뒤에서 달려오는 야구 엑스트라를 피한다. 벌써 몇 번째냐고. 이제 그만 좀 해.
《이세계 전송까지 4초》
그래서, 이 다음 세키구치와 야구 엑스트라가 충돌하지. 여기까지는 좋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다음의 if 결말이다.
혹시 내가 하루를 구하지 않았을 경우, 트럭은 나와 하루 중 누군가를 이세계로 데려가줄까.
꿈이라고는 해도 확신을 가지고 싶다. 난 이세계의 부름을 받은 거라고. 이세계에서 용사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아스팔트에 퍼지는 콜라. 진짜 꿈 맞나. 냄새까지 리얼하다.
무서워진다. 혹시 이게 현실이라면, 현실은 언제나 내 기대를 배신했으니까.
《이세계 전송까지 3초》
트럭 타이어가 끼이익 소리를 울리며,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뒤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나는 달리지 않는다. 트럭의 진로가, 우리 중 어느쪽인지 정해질 때까지.
꿈속에서도 떠오르는 풍경은 그 이세계의 광경. 여기가 빌어먹을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꼭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다. 선택받은 자는 나라고.
그런데, 씨발!
난 달리기 시작했다. 놓친 때를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택받은 자는 하루다.
소리를 울리는 타이어가, 차체를 기울이며 확실하게 그녀가 있는 방향을 노린다.
교실 카스트 톱 클래스이자 미스콘 대표이자 다른 학교 학생한테도 인기가 많고 잘생긴 남친도 있는 코야마 하루를.
그녀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이세계로, 그녀 단 한 명을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이세계 전송까지 2초》
"씨바아아아아아아알!"
알고 싶지 않았다. 시험해보지 말 걸 그랬다. 난 선택받은 인간이 아니었다. 단순한 사고다.
신이시어, 나한테 치트를 줬으면서. 용사 후보라고 말했으면서. 하루한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잖아. 아니면, 내가 약해서냐고. 아무런 장점이 없으니까 동정이라도 한 거냐고.
이건 잘못됐어. 이세계는 날 골라야 하고, 하루는 두고 가야 해. 여자에게는 가혹한 세상이잖아. 그 녀석, 그쪽에서 뭐하고 사는지 아냐고. 귀갑묶기라고.
가지 마. 안 돼. 그만둬.
데려가줘. 나도 이세계로 데려가줘. 부탁이니까….
《이세계 전송까지 1초》
──'얘 누구더라?'
세계는 잿빛이고, 쇠 맛이 난다.
그 맛에, 나는 비참한 안도감을 하고 말았다.
***
기분 더러운 채 눈을 뜨자, 먼지가 쌓인 더러운 바닥이었다.
이곳은 이세계, 전에 살던 세계는 꿈. 처음 도착했을 때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세계 최고라고 소리쳤다. 나는 인생의 승리자라고.
그런데, 이제, 두 번 다시 그렇게 눈 뜨는 날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울음이 터질 것 같다.
"좀 무서운데……"
뭔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린다.
몰랐는데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 위를 올려다봤더니 팬티가 보였다.
이세계, 최고.
이상한 꿈 탓에 우울했던 기분도 금방 맑아지고, 현 상황을 떠올린다. 저 팬티와 엉덩이는 틀림없는 루페 엄마다. 여긴 헛간 안이고.
키즈하의 비밀 통로가 발각난 모양이다. 엄마가 지금, 그 통로에서 밖으로 나갔다.
어, 가사 상태였던 모습 들켰나? 혹시, 양귀비박쥐의 피를 먹은 사실도 들켰을까? 그렇다면 키즈하나 자지에 관해서도 줄줄이 사탕처럼 들통났을지도…… 그건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다.
벌레 소리 비슷한 자지의 울음소리가 난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밖을 살펴보자, 방금 내가 걸렸던 구덩이에서, 자지 끝과 키즈하의 손이 손짓한다.
다행히도 하반신은 자유롭다. 난 서둘러 헛간을 빠져나와, 구덩이 안으로 다이브한다. 숨기 좋은 곳이다.
자지를 안고 있던 키즈하가, 눈을 치켜뜨고 있다. 감정적으로 되면 금방 피를 먹이는 이 녀석에게 불평을 해야하나 고민했지만, 일단 이 장소를 알려준 감사 인사만 해뒀다.
"고마워"
"응"
키즈하는, 자지를 꼭 안으며 얼굴을 파묻는다. 자지가 움찔한다. 내 자지가.
그보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피나 자지가 들통나지는 않았겠지?
"어어어어어어어?!"
헛간에서 두 사람의 비명이 들린다. 어, 무슨 일 있나?
고개를 내밀려는 나를, 키즈하가 잡아당긴다.
"들키면 어쩌려고! 좀 더 숨어있어"
"아니, 무슨 상황인데. 이대로 숨어있어도 돼?"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나중에 할게. 일단, 양귀비박쥐의 피랑 자지는 안 들켰어. 그래도 다음에는 방을 볼 수도 있으니까, 자지는 헛간에 돌려놔줘. 난 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마 위험하거든"
"아, 어어. 그 전에 이 귀갑묶기 좀 풀어줘. 하루 녀석, 변태처럼 잘 묶는다니까"
겨우 여고생이 묶은 귀갑으로부터 해방되어(뭐지, 자유와 교환하면서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 드는데) 한숨 돌렸다.
자유 최고. 그리고, 이세계 최고.
"나랑 자지를 위해, 이렇게까지 되다니…… 배고프지"
"어?"
"이거, 먹어"
키즈하가 케이크 같은 걸 들고 있다.
뭐지. 이런 말은 좀 실례일지 모르겠는데, 그냥 독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져온 거 아냐. 루페가 나눠주더라.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쩌다 한 조각 남아서 가져왔을 뿐이거든"
"그렇구나. 미안해, 잘 먹을게"
음, 달다. 뭐, 배는 고팠으니까 먹겠지만, 단 음식은 좀 뭐랄까. 여자애들이 좋아하지 않나.
키즈하가 어째서인지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본다. '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어?'라고 말했더니, 당황해하며 '이제 갈게'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그 전에 내 볼에 키스를 해줬다.
"힘내자. 둘이서 자지를 지켜야지"
엄마와 하루가 복도 쪽으로 간 사이에, 키즈하는 창관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 즉 엉덩이를 바라보며, 최근들어 의문이었던 점을 생각한다.
저 녀석, 요즘들어 점점 키스마가 되는걸. 손님을 너무 못 받아서 영업 방법을 바꾸기라도 했나?
내가 그런 노골적인 기술에 걸려들 리 없는데. 내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루페 엄마의 타산 없는 진심이 유일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헛간에 숨어 케이크를 핥아먹고 있었는데, 하루한테 들켜서 또 귀갑묶기를 당했다. 뭐냐고, 저 녀석. 맨날 뒷북만 치면서 화낸다니까.
호수로 놀러가자고 키즈하가 권유를 해왔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요즘 하루가 키요리랑 여행을 간 모양이라, 루페 엄마랑 단 둘이서 점심을 먹을 기회도 생겼겠다, 좀 귀찮다고 했더니 또 손이 잇자국이 생겼다.
짜증나는 여자라니까. 뭐, 좋아. 엄마한테는 내일 늦을지 모른다고 말해두면 되겠지.
호수에서, 키즈나와 자지와 논다. 뭐라고 해야하나, 이상한 느낌? 평화롭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여러 사건이 있었던 탓인지, 키즈하랑도 꽤 사이 좋아진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해가 중천까지 떴는데도, 어째선지 우리는 질리지도 않고 놀다보니, 낚시꾼도 이웃 주민들도 돌아가고, 호수 근처에 아무도 없는 상태까지.
키스를 했다.
자빠트리고 가슴을 만졌는데도, 키즈하는 싫어하기는 커녕 기쁜 듯이 소리를 낸다.
거기서 놀라 손을 뗀다.
심장이 쿵쾅쿵쾅댄다. 나, 뭐하는 거지?
"……왜 그래?"
키즈하가 말한다.
"왜 그래가 아니지"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고, 루페 엄마한테도 미안하니까.
그렇게 대답했더니, '루페도 다른 남자랑 자잖아'라며 키즈하가 끈질기게 달라붙어온다.
루페 엄마도 하루도 창녀가 직업이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뭐, 100% 괜찮지는 않지. 신경 쓰인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엄마랑은 안 하기로 했다.
"그야 창녀니까 그게 일이잖아. 하지만 남자랑 여자에게는 자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그쪽을 고르겠다는 것 뿐이야"
그래. 그녀들은 창녀니까 하고 싶다면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공략 루트적으로 보면 플래그도 호감도도 안 쌓이는 소모성 이벤트가 아닐까라고 최근 깨달았다. 연애 감정에 효과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상태에 따라서는 부정적인 인상을 줄 뿐이다.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점심 데이트 이벤트 쪽이 안전하고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다른 남자랑 차별화할 수도 있고.
그래서 그걸 실천하는 중이다. 루페 엄마는 근시일 내에 공략할 수 있을 거다.
"흐─응.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넌 참, 진짜 별나다니까"
키즈하는 그렇게 말하더니 옷매무새를 고쳤다. 아아, 나도 참 말하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야 여자애를 진짜로 공략해본 적은 없으니까.
"저기, 별꼴리스레인"
"영원히 멎지 않는 비를 의미하는 엔드리스레인이라구"
"그럼, 혹시 내가 창녀를 그만두면, 안아줄래?"
"어, 그만두려고?"
"혹시라고 했잖아"
어, 그치만, 창녀를 그만뒀는데 안아버리면, 그 말은 우리…….
"돌아가자"
키즈하가 등을 돌리며 걸어가기 시작한다.
아, 또 평소의 그건가. 잔뜩 바람넣어놓고 중요한 시점에서 잘라먹는 그 패턴. 나 참, 난 속지 않는다고.
또 호수에 오자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슬슬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자지가 사라졌다.
아니, 우리 자지가 사라졌다.
키즈하가 뒷뜰에서 놀아주다 아주 잠깐 눈을 돌린 틈에, 자지를 놓쳤다고 한다.
그렇게 소중한 걸 잃어버리냐고. 이러니까 여자한테 자지 관리는 시키면 안 된다니까.
"어딘가 보르도풀이 자라있는 곳 아니야? 다른 창녀의 방이라던가"
"찾아봤어. 그런데 없었다구. 자지, 어디로 가버린 거야─!"
"짜증내고 싶은 건 나라고…… 기르는 사람이니까, 제대로 보란 말이야"
"뭐야, 나한테만 돌보게 하고, 잘났다는 듯이. 처음에 둘이서 자지를 지키자고 말한 건 너였잖아. 얼른 찾아내라고!"
"이봐, 누가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때 보고있던 사람이 너였다는 말이잖아. 어디에 있을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화내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난 키즈하를 혼내며 헛간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단서 하나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해서.
들어간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숲에서 레벨 노가다를 하다 마물의 기척을 느꼈을 때와 똑같다.
돌아본다. 입구 위에 뭔가가 달라붙어있다. 자지다. 마치 사슴이나 버팔로 머리처럼 자지가 장식되어있다. 괜찮은데, 저거.
"아, 자지!"
키즈하가 기뻐하며 떼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녀의 손을 당기며 말렸다. 분명 자지는 자지지만 자지가 아니다. 단순한 자지가 아니다. 다가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내 자지가 바싹 오그라들었다.
그때, 마른 가지를 부러뜨리는 소리를 내며, 자지 껍질에 금이 나기 시작했다.
"아야"
무심결에 내 고간을 부둥켜잡는다. 그런데, 금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따듯해서 기분 좋았던 몸통이 단단해지더니, 반으로 갈라진다.
걱정스러워하며 다가가려는 키즈하를 막으며, 껍질에 손을 대본다.
"뭘 하려고 그래!"
그녀의 절규와 동시에, 자지 안에서 검은 무언가가 덮치며 날아온다. 장수도룡뇽을 떠올리게 만드는 미끈미끈한 몸통.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팔다리. 그리고, 유리구슬처럼 커다랗고 둥근 감정이 없는 눈.
그 녀석은 내 오른팔을 물어뜯었다. 이빨은 가늘고 날카롭게 자라있다. 격통이 뼛속까지 울린다. 불타는 듯한 고통. 왼팔로 숏소드를 뽑아, 그 마물을 향해 휘두른다.
"안 돼, 우리 자지라구. 죽이지 마!"
키즈하가 내 팔에 매달린다. 하지만 저 자지였던 생물체는, 더욱 이빨을 박아온다. 까만 눈에 내 얼굴이 비춰진다. 감정도 의지도 없는 눈동자. 비춰진 인간을 습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마물의 기관. 우리 애정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트로이의 목마였나.
우리가 돌봐주며 키워준 얼빠지고 애교있던 모습은, 본체의 성장을 감추기 위한 목마였던 셈인가.
그렇다면 대처법은 매우 심플하다. 이대로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키즈하가 내 팔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외친다.
"너 손대지 않겠다고 했잖아! 저건 우리 자지야. 귀여운 자지잖아. 왜 죽이려는 거야, 거짓말쟁이!"
물린 곳에서 스멀스멀 녹색 액체가 퍼져간다. 독이다. 보르도풀을 독으로 연성했구나.
내가 '상태이상 무효' 스킬이 없었더라면 즉사했겠지. 이 녀석은 흉악하다.
눈을 보면 안다. 사람과는 절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지성을 지녔다. 그게 마물이다.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고, 키즈하가 만지게 할 수도 없다. 여기서, 내가 처리해야만───
"둘이서 지키자고 약속했잖아. 같이 호수에도 놀러갔잖아. 죽이지 마!"
검을 고쳐쥐며 검끝을 겨눈다. 목표는 눈과 눈의 사이. 하려면 일격에 해치운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자지를 죽이면, 널 죽일 거야. 진심이라구. 그만둬, 제발!"
마물의 검은 눈이, 독이 통하지 않는 날 관심 밖으로 던지더니, 키즈하 쪽을 향한다.
난 숏소드를 내리쳤다.
헛간 안에 웅크리고 있는 키즈하에게, 숲에서 꺾어온 꽃을 한 송이 내민다.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색을 한 푸른 꽃이다.
"이 꽃이 피어있던 곳에 묻어줬어. 네 색 같구나 해서"
키즈하는 대답도 안 하고, 내게 병을 내민다. 빨간 액체가 어느 정도 들어있다.
"말했지, 죽이겠다고. 이거, 전부 마셔.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마셔줘"
네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라고, 키즈하가 토해내듯 말한다. 입가를 피로 물들이고.
병을 받아들고는, '입으로 옮겨주지 않는 거야?'라며, 소소한 농담을 쳐봤더니 혀를 찰 뿐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사 상태에 빠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큰일인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모르겠지만, 마시기 전에 선언해둬야겠다.
"마셔도 좋지만, 난 안 죽어. 널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자지한테"
설령 마시고 죽지 않더라도, 가사 상태일 때 심장이라고 관통당하면 당연히 죽는다. 키즈하가 진심이라면 난 끝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자지는 마지막까지 널 걱정했어.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말했거든. 키즈하는 굉장히 정서불안하고, 생활력도 없으니 자기가 없으면 큰일일 거라더라"
피 냄새. 이거, 왜 이렇게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까. 이쪽 인간에게 있어서는 마약이고, 나한테 있어서는 죽음과 이세계 전이의 맛이다.
분명 이건 버그 아이템이다. 실수로 들어온 물건이겠지. 신의 실수라던가 뭔가로.
"자지한테서 유언을 들었거든. 키즈하땅, 언제나 맛있고 위험한 풀가루를 먹여줘서 고마워. 함께 있어서 행복했어. 몸 조심하고 앞으로도──"
"시끄럽네. 빨리 마시라고!"
키즈하는 병을 뺏아들더니, 날 넘어트리고, 자기 입에 머금더니 입을 맞춰온다. 흘러들어오는 피. 입을 떼더니 또 피를 머금고 키스. '죽어'라고 그녀가 속삭인다. '너 같은 거 죽어버려'라고.
둘이서 함께 새빨개지면서, 난 일찍이 없었을 정도로 대량의 양귀비박쥐의 피를 마셔버렸다.
세계의 맛이 난다. 비극의 맛이 난다. 키즈하의 뺨으로 뻗었던 내 손을, 키즈하가 뿌리친다.
***
《트럭 폭주 사고까지 6시간 45분》
버스 정거장에서 한 손에 콜라를 들고 서있다.
구름 낀 하늘에 기름 냄새가 난다. 이세계의 맑개 개인 여름이 확 뒤집힌 것만 같은 감각이다. 피 맛을 알기 전의 내가, 버스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어, 진짜? 여기까지 돌아왔어?
가방 안을 열어본다. 그리운 교과서와 노트. 라이트 노벨. 필통. 핸드폰. 괜스레 애니송이 듣고 싶어져서 음악 어플을 키다가 떠올랐다. 헤드폰이 박살났었지.
조금 냉정함을 되찾았다.
꽤 많이 날아왔구나. 그날의 아침 시점까지 돌아오다니. 분명 이번 꿈은 굉장히 길다. 이것도 파노라마 기억이라는 놈인가?
미끄러지듯 다가온 버스에 타, 주위를 둘러본다. 누군가 아는 사람을 찾아 대화를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신경이 쓰여서 매일 아침 그런 행동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손톱만큼 자그마한 가능성을 기대했다. 이때의 나는.
라노벨이라도 읽을까 했지만 그만뒀다. 창문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으로 눈을 돌린다.
도쿄.
나는, 이런 커다란 곳에서 살았구나.
정보가 너무 많아서 지친다. 시골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이다. 바위와 숲과 돌로 만든 길거리.
떠올렸더니, 이번엔 그쪽 세계가 그리워진다. 전쟁이나 사건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마왕과의 최전선. 설마 그런 체험을 진짜로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게, 내가 줄곧 동경해왔던 땅이었지.
"아─, 그거 알 것 같은데. 미나미 고등학교 축구부지. 나 친구인데, 아마도"
다음 버스 정거장에서 하루가 탄다. 은은하게 그리운 향기가 났다. 그쪽 세계에서 있을 때와는 다른 향기다. 인공적이고 자극이 강해서, 끈덕지게 코에 남아 냄새를 풍긴다.
길고 둥글게 파마한 머리. 살짝 흐트러진 교복.
그래, 이게 코야마 하루다.
뭐라고 해야하나, 2.5차원의 배우를 현실에서 만났다는 느낌. 이세계에서의 그녀와, 내가 멀리서 보는 그녀가, 처음으로 겹쳐지며 진짜 하루가 되었다. 그게 보고 싶었던 듯한, 보고 싶지 않았던 듯한 이상한 감각. 하지만 코야마 하루도 역시 여기 살고 있었구나 라며 이상하게 이해해버리고 만다.
난 심호흡하고, 결의를 다지고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쉰다.
"안녕"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하루에게 들릴 목소리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인사한다.
주위에 있는 그녀의 친구A와 B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코야마 하루는 가벼운 말투로 미소지으며.
"안녕"
평범하게 친구처럼 대답했다.
그대로 다른 학교 남학생 잡담으로 돌아간다. 나에 대해서는 금방 잊고서.
그래도 이거면 됐다. 하루는 말을 걸면 누구에게나 가볍게 대답해준다. 그러니 쉬운 일이었다. 맥이 빠질 정도로.
난 오늘, 처음으로 코야마 하루와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는 마물이 아니다. 말도 시선도 통한다.
《트럭 폭주 사고까지 6시간 32분》
교실에 들어선 순간, 뭔가 날아오는 기척이 느껴져 바로 손을 뻗는다.
퍽 소리를 내며, 내 손에 야구공이 잡힌다.
"우와, 미안. 괜찮냐?"
야구 엑스트라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아, 그런가. 이런 일도 있었지.
"괜찮아. 자"
던져줄 때 무겁다고 느꼈다. 방금 전까지 엄청나게 큰 소드를 등에 짊어지거나 휘두르던 내가.
현실은 무겁다.
"오, 왔네"
가방을 내려두자, 옆자리 남자애가 친근하게 말을 건다.
세키구치. 그러고 보니 옆자리였지. '봤냐?'라며 물어보는데, 뭘 말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하늘던이라는 제목을 듣고, 어렴풋이 당시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래 그래, 그 장면은 킹갓이었지.
"유후밍이 '만지고 싶으세요?'라면서 가슴 들이밀던 장면 말이지"
"너, 너는 야한 것만 밝히는구나!"
안경을 고쳐쓰며 항의하는 세키구치에게, 난 '완전 평범한데'라며 웃는다. 너도 사실은 좋아하잖아, 그런 거.
"그보다 나, 실은 방금 전까지 이세계에 다녀왔거든. 우리 반 코야마 하루랑 같이. 검도 마법도 치트도 있는데, 마왕 같은 놈도 있고. 레벨 상한이 금방 막혀서 슬로우라이프 장르의 이세계라는 느낌이었지만 말야. 아, 물론 나한테 집적대는 여자는 미소녀밖에 없었고, 거의 전원이랑 뭔가 했고"
벙 찐 표정으로 듣고 있던 세키구치가, 잠시 뒤에 '아아'라며 애매하게 표정을 무너트린다. '그러냐'라고 대답하더니 눈을 돌린다. 동급생이 중2병을 앓을 때의 올바른 대처법이다.
교실 정중앙에서는, 코야마 하루가 모두와 함께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다. 야구 엑스트라랑도 어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쪽에까지 어울리러 갈 용기는 없었지만.
"나, 코야마랑도 했거든"
세키구치는 또 난감해하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야기를 잘라내며 교과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믿을 리 없겠지.
사실인데도 말이야.
《트럭 폭주 사고까지 4시간 7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기지개를 편다.
재미없는 수업이다. 현대 사회 따위 배워봤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난 이제부터 이세계로 갈 테니까.
하루 쪽을 바라본다. 턱을 괴고 노트에 뭔가 적고 있다. 추측이지만 수업이랑은 관계없는 것. 지금 이 교실에서 나와 하루만큼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시험도 수험도 없다.
이세계를 떠올려본다. 숲속에서의 전투. 생명을 베어낼 때의 감촉. 전부 리얼한 기억인데, 마지막에 내가 베었던 마물을 떠올리자 눈이 아파온다.
이 책상도 교실도 리얼한 기억이었다.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두 개의 세계. 재미없는 수업.
난 갑자기 위기감을 떠올리고, 교과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 법률. 이 지식이 쓸모있을지 없을지는,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나도 전부 아는 건 아니니까. 그건 어디 사는 누구나 똑같다.
시간이 없다. 가져갈 수 있는 건 전부 가져가지 않으면 아깝다.
이제 두 번 다시 이곳으로는 돌아올 수 없으니까.
《트럭 폭주 사고까지 2시간 12분》
그래, 이제 곧 세계가 끝난다.
"세키구치랑 치바가 오늘의 장보기 담당이네. 나도 같이 갈 테니 부탁할게"
야구 엑스트라에게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시간은 곧장 흘러간다.
"그리고 여자 쪽은 하마자와랑, 아이리랑 모카, 방과후 부탁 좀 할게"
"에~"
아이리와 모카라는 여자가, 반쯤 웃으며 '힘들어'라는 말을 꺼낸다.
난 식후의 돼지처럼 한숨을 쉰다.
너희들한테 말해두겠는데, 이제 곧 '힘들어'라고 말할 수 없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된다고. 속는 셈 치고 가기나 해.
"아, 잠깐. 나도 갈래!"
하루가 손을 들고, 다들 벙 찐 표정을 짓는다.
그 사고까지 앞으로 2시간.
어째서인지, 위가 아파온다.
《트럭 폭주 사고까지 20분》
긴장된다.
이제 곧 이세계 전이가 시작된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과, 또 가야만 하냐는 기분.
생각해봤는데, 그쪽 세계가 진짜 그렇게나 좋았을까? 이쪽 세계에서 아직 못했던 일이 남아있지는 않나? 오늘이 그렇게 최악의 하루였나?
하루는, 버스에서 '안녕'이라고 대답해줬다.
난 그쪽 세계의 하루도 알고, 오늘이 끝난다는 사실도 아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해본 거지만, 그걸 다 모르는 상태로 도전해봤어도 결과는 아마 같았을 거다.
매일 아침 같이 타는 버스에서, 아주 잠깐 나누는 한 마디 쯤이야, 그 녀석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줄 여자다.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따위야 알 수 없지만, 같은 반 친구한테 그 정도는 해주는 법이다.
그렇기에 나도 시험삼아 해볼 걸 그랬다. 어제 버스에서라도. 뭣하면, 일 년 전에라도.
"고마워, 세키구치. 덕분에 살았어~"
거 봐, 맞지.
저 녀석은 기분 나쁜 오타쿠한테도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여자라고. 아주 약았다니까. 그러니까 나도 거기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제대로 평범하게 이벤트를 밟아나갔더라면.
그리고, 이세계에서의 코야마 하루를 모르는 채, 알고 지내는 사이 정도는 될 수 있는 루트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무서워졌다.
아직 못했던 일이 잔뜩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실수했던 일도, 지금이라면 다시 고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깝다고 생각했다.
아니, 틀려. 나한테는 이세계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더 이상 이곳의 인간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제는.
"그러고보니 물건 사러 가야지"
가야만 한다.
《트럭 폭주 사고까지 5분》
학교를 나온 순간부터 두 그룹으로 나뉘어, 나와 세키구치는 뒤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고 난처해하는 하마자와라는 여자애랑은, 분명 한 번 카드인지 뭔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난 그때, 엄청나게 건방진 시선으로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라도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가능성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하게 된다. 손 쓸 방도 없이 늦어버린 이 상태에서.
앞으로 5분 정도면 전부 끝난다. 코야마 하루는 카스트 꼭대기층에서 전락해 이세계의 창녀가 된다. 밑바닥에 있던 나는 한때 평판 좋은 모험가가 되지만, 금방 만렙에 도달해 막혀버린다.
그 다음은 뭐, 재미없는 노력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세계. 기적도 단 한 번의 치트로 끝이다.
진짜 갈 셈이냐. 난 그저 곁다리잖아. 그러면 여기서 살아가길 골라야 할까. 하루가 없는 세계에서.
《트럭 폭주 사고까지 2분》
그렇구나. 이 시점에서 난 막혀있었구나. 하루를 포기하나 따라가나 변하지 않는다. 세계가 변해봤자, 내가 변하지는 않으니까.
역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내가 변한다고 해서 딱히 상관은 없었다. 오늘도 간단했지 않은가.
하루가 아니더라도, 마음이 맞는 여자가 있을지 모른다. 이런 나라도 지켜주고 싶은 애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있지, 쇼핑 끝나면 어디서 좀 쉬지 않을래?"
야구 엑스트라가, 여자애들한테 제안한다.
세키구치가, 그리고 하마자와도 고개를 들며 뒤를 바라보다, 눈이 맞았다.
난 곧장 하루 쪽을 봤다.
《트럭 폭주 사고까지 1분》
"아, 남친이다~"
카톡 알람음이 울려 화면을 보더니, 하루가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는 중단. 앞서 가던 멤버를 먼저 보내고, 하루는 멈춰서서 통화를 시작한다.
한 톤 올라간 하루의 음색은, 창관에서도 들은 적 있다. 머리를 매만지는 버릇이 있던 그녀도, 그 머리를 이세계에서 짧게 잘라버리게 된다는 사실도 나밖에 모른다.
코야마 하루라는 여자가, 실은 꽤 넉살 좋게 행동하거나 짜증나는 말을 한다던지, 정이 많다는 점이라던지, 금방 화내고 변태였다는 사실도, 난 이세계에서 알게 된다.
알기 전의 나는, 아마 코야마 하루에게 사랑을 품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외모다. 미소녀니까.
그래서 아다를 떼줬을 때 솔직히 기뻤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다고.
하지만 지금은 진심이 아니다. 너 역시, 날 한 번도 진심으로 좋아해준 적은 없었을 테고.
역시 섹스는 하지 말 걸 그랬다. 시간을 들였더라면, 어쩌면 평범한 친구가 되어줬을지도 모르고, 오늘도 널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난 분명, 몇 번이라도 널 구하고 싶어서 달리게 되겠지. 이세계에 가고 싶고, 하루가 멋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고, 할 수 있다면 꼭 하고 싶다.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껴있던 하늘이, 아주 조금 맑아진 틈새로부터 햇살이 그녀를 비추었다.
그야말로 교실의 정점. 오타쿠에게는 높은 언덕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다.
역시 너, 엄청 귀여웠구나.
난 하루의 핸드폰을 빼앗아, 멋대로 전화를 꺼버렸다.
《트럭 폭주 사고까지 30초》
"……하아?"
하루가 눈썹을 치켜뜬다. '얘 누구더라?'라는 느낌으로.
네가 날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오늘부터 알려줄게.
"나는, 널 구할 남자야"
하루는 더욱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먼저다. 트럭한테 치이는 건 아주 근소하게나마 내가 더 빠르다.
즉, 난 이 찰나의 순간에 먼저 이세계로 갔다. 널 지켰다.
"너 뿐만이 아니야. 엄마도 키요리도 키즈하도 내가 반드시 구하겠어. 그러기 위해 이세계로 갈 거야. 다시 하는 게 아니라, 시작할 거라고"
"아니,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뭐야, 너? 좀 무서운데?"
"진짜 무서운 건 지금부터 시작될 일이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운명은 변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죽어"
"진짜 무섭거든?!"
멀리서 무언가를 찢어버리는 듯한, 타이어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린다.
《 사 고 개 시 》
"아, 뭐야 저 트럭은?"
먼저 가던 그룹이 폭주를 깨닫는다.
여기서 남은 시간은 대략 5초 정도.
그리고 추측이지만, 내가 여기 오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세계 전송까지 5초》
"───코야마!"
세키구치 크게 소리친다.
하지만 녀석은 늦는다. 야구 엑스트라도 안 된다. 몇 번이나 해봤자 결과는 똑같다.
그렇기에 나는, 하루에게 등을 돌리고 차도로 나아갔따.
《이세계 전송까지 4초→3초》
바로 지금, 기록 갱신중. 코야마 하루보다 얼마나 빨리 이세계로 갈 수 있을까. 혹은 지금이라면, 트럭 쯤이야 한 손으로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야구 엑스트라와 세키구치도 부딪치며 구르는 중이다. 하마자와는 비명을 지르고, 다른 여자애들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슬로우모션으로 흘러가는 내 주위에서,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
《이세계 전송까지 3초→1초》
잘 있어라, 세상아.
너 엄청 싫었다고. 그래도 다음에는 잘 할 테니까 응원해줘. 배운 것도 잊지 않을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 시간도 없으니 마지막으로 뭔가 하고 싶은 말을 해두자면, 뭐 '신세졌다'라고나 할까.
하루 쪽을 돌아본다. 역시 '얘 누구더라?'라는 표정이라 웃겼다.
네가 날 아는 건 이제부터야. 나도 진짜 너를 모르니까.
혹시라도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이세계에 가 처음으로 진정한 자신을 알게 된다는 점이겠지. 이쪽 세상에서 난 너무 삐딱했고, 넌 너무 유연했으니까.
다들 잘 들어. 내가 누군지 알려주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야. 그리고 얼른 잊어버려라.
목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소리지른다.
"난 진홍의 엔드리스레인이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루페 엄마는, 오늘도 기운이 없는 모양이다.
난 평소처럼 신나서 떠든다.
아마 그녀는 지쳤을 테지. 일 내용도 내용이니, 난 되도록 물어보지 않으려 한다.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묻지 않는다. 즐거운 이야기만 한다.
호감도는 떡상중이다. 나중에 결혼하고 싶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너는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끈기있게 잡담을 계속했더니, 좋은 질문이 들어왔다.
장래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신있다.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신을 때릴 거야"
보다 나은 세상을 재구축. 나에게는 그러기 위한 효율적인 계획이 다 있다.
까놓고 말해서, 마왕을 때려눕히기란 앞으로 몇백 년이 걸려도 무리다. 하지만 그 무책임한 신 정도라면 때릴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수행을 한다면.
그리고 세상의 시스템을 바꾸겠다. 스킬의 분배를 고치겠다. 그때는 성별에 의한 차별도 없애는 편이 좋겠다. 인류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거다. 그럼 마왕도 궁지에 몰리겠지. 엄마도 행복해질 테고.
그걸 신에게 시킨다. 아니 그보다, 처음부터 그 녀석 책임이잖아. 두들겨 패서 눈을 뜨게 만들어줘야겠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루페 엄마는 동요했는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큰일이네.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진짜로 할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이건 아마 크리티컬 히트다. 엄마는 분명 내게 반했을 테지.
그래도 시간이 필요하다. 꿈 같은 말을 한다는 자각도 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진지하게 수행만 하지는 않을 테고, 수없이 좌절할 자신도 있다.
그런데도, 혹시나 기다려준다면. 응원해준다면.
"……정말 때려줄 거야?"
작은 손을 포개잡는다.
언젠가, 히어로처럼 이세계(너)를 구해보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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