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난 그녀와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얼마나 적당하고 좋은 말인가. 애초에 이렇게 가슴을 펴고 표명할 수 있게 되는 건 꽤나 시간이 지나서이며, 만났을 당시의 인상이라면... 최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녀에 대해선 '어리석음'이라는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다. 그건 동시에 스스로 '어리석은 자'라고 단정하는 것과 같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래, 그녀가 어리석은 자라면, 나 자신은 그녀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의 어리석은 자가 된다. 그녀와 만났을 때에는,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어리석은 인간과 만나버린 불행을 저주했었다
...신에게 버림받고, 육친에게 버림받고, 친구에게 버림받고, 자기 자신에게 버림받고, 달에게도 가지 못한 이 혼에게, 스스로 무엇을 저주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저주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이 불행한, 그리고 최악의 만남을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와 그녀의 만남은, 최고도 최악도 아니었다
운명의 만남. 이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만큼, 나와 그녀의 만남에 상응하는 단어는 없다
그리고 나와 그녀의 운명은, 중년 아저씨이며 담배냄새가 나고 이마가 넓은 그녀의 아버지가, 바보 멍청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했다
***
에토우 에이지는 가족을 사랑한다. 2명의 딸들은 특히 귀엽다. 언니도 동생도, 문제점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딸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매년마다 큰딸의 생일 선물을 적당히 사는 것은, 결단코 사랑이 식었기 때문은 아니다. 연말에 바쁜 일이 많고, 크리스마스에 가까우니까 크리스마스 선물에 너무 힘을 내버려서, 생일 선물은 아무거나 대충 골라버리게 되버린다... 아니아니
나는 대충 골라서 선물한 기억은 없다! ...라고 기운차게 주먹을 쥐어보고 싶지만, 무심코 근처에 있는 물건을 선물 대신 줘버리곤 했다. 미안하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히로는 기쁘게 받아주니까 괜찮잖아! 라고 주장하지만, 그 동생인 후미카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서, 가끔 차가운 시선을 보내곤 한다.
아버지에겐 아버지 나름대로의 변명이 있다, 라고 에이지는 말하고 싶다. 애초에 이 겨울에 선풍기를 사서 어쩌자는 말인지. 곧 찾아올 더운 여름을 위해 갖고 싶어하는 모양이지만, 상대는 그 히로다, 겨울인데 선풍기를 켜고 소란피우겠지. 볼거리랑 홍역 외에는 아파본 적이 없는 히로라곤 해도 감기에 걸려버릴지도 모른다. 후미카는 '바보는 감기 걸리지 않아'라고 자기 언니를 바보취급하므로, 한 번 정도는 감기에 걸려도 괜찮지 않을까, 잠시 이런 몹쓸 생각을 했다
히로가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은, 바보라서가 아니라 건강해서다. 그렇다.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히로는 병이 걸려본 적은 없지만, 상처는 잔뜩 생긴단 말이지...)
스스로 선물을 사두지 못한 변명을 계속하면서, 결국엔 씁쓸한 기억까지 떠올려버린 에이지였다
(...어째서 히로는 그렇게 눈을 좋아하는 걸까...)
태어난 날에 눈이 내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정일을 넘어서 태어났기에 꽤나 걱정했기 때문에, 태어났던 날은 기뻐서 약간 흥분하고 말았다. 밖에서 작은 눈사람을 가져와 그 아이의 손에 쥐어준 기억이 난다... 아내에게 혼났지만
그런 12년 전의 추억을 떠올려보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시각은 오후 10시를 넘었다. 평범한 가게는 벌써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어디서 딸의 선물을 조달하면 좋을까
어쩔 수 없으면 또 자신의 콜렉션에서 적당히 골라줘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좀 그렇다. 이제 손에 남아있는 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은 물건 뿐이다. 21세기가 되면 열려고 생각했던 술을 선물로 줘버리고, 나중에 회수할 수 있지만... 그런 짓을 해버리면 히로는 몰라도 후미카가 화내겠지
(...아이고, 춥다...)
사고가 부정적이니 몸까지 추워졌다. 에이지는 접었던 우선을 펴 강풍을 막으며 몸 전체를 둥글게 말고 전진한다. ...조금 더 걸어가면, 우리 집이 있는 주택지에 들어서버린다. 그렇게 되면 이젠 24시간 영업인 편의점 정도밖에 없다.
차라리 정말 편의점에서 떼울까... 라고도 생각해본다. 장난감이 들어있는 과자를 5000엔 정도 사서 그걸 선물 대신 퉁치면. 아니, 차라리 마른 멸치는 어떨까? 확실히 하츠히코랑 함께 멸치를 먹고 있었으니까, 히로는 멸치를 좋아할 거야. 하지만, 그건 너무...
"난 바보냐ㅡ!"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 에이지는 무심코 소리쳐버렸다. 조용히 조용히 쌓여가는 눈 사이로, 그의 외침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남은 건 부끄러움 뿐.
(...아무도, 안...봤겠지...?)
부끄러워할 바에는 처음부터 소리치지 않았으면 됐지만, 그래도 괜시레 소리지르고 싶어지는 나이다. 가끔씩 자신의 멍청함에 참을 수 없을만큼 화가 나기도 하고, 분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런 때에는 소리질러서 곳곳으로 발산하는 에이지지만, 그런 짓을 하면 가족들이 슬퍼하므로 그만두도록 하자. 지금 결심했다. 이제 더 이상 소리치지 않겠다. 아마도 무리겠지만.
멈춰버린 발걸음을 다시 재촉하자. ...라고 생각한 에이지의 옆을, 어린아이가 스쳐 지나간다.
아까 소리친 걸 들었을까, 라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이런 시간에 돌아다니다니 나쁜 아이다, 라는 생각도 든다. 뒷모습은 잘 모르겠지만, 큰딸과 같은 나이대로 보인다.
(이런 야심한 밤에 돌아다니는 아이는 못쓰지!)
내심 강하게 결심하고, 두 자식의 아버지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찰나, 지금 그런 결심을 하고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중요한 건 히로의 생일 선물을 어떻게 해야하느냐다.
정말로, 어떡하지
무심코 아래를 보면서 걷는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아래를 보면서 걷지 마라, 넘어져도 괜찮으니까, 앞을 보고, 가끔씩 위를 보며 걸어라' 라고 말하면서. ...히로는 이 말을 너무 잘 들어서 넘어지거나, 밟아선 안 돼는 것들을 밟아버리지만.
앞을 보고 걷지 않아도 걷는데 익숙해진 길이라면 발이 멋대로 움직여서 집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에이지는 발밑의 눈만 보고, 주변은 전혀 보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하얗지 않은, 눈. 사람에게, 차에게 밟혀서, 검게 되버린 눈.
더러워진 눈을 아무리 밟아도, 그냥 더러운 눈을 뿐이다
새하얀 눈을 밟는 기쁨도, 아름다운 눈을 더럽히는 죄악감도 없다
하지만, 이 검은 눈이 또ㅡ
"...으응?"
어두운 발밑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뻗쳐오는 희미하나 빛이 바로 자기 옆에서 뻗어오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이지는 고개를 빛이 오는 방향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본 기억이 있는듯한 없는듯한 유리문이 있었다. 에이지는 우선 주변을 둘러보며 여기가 어디인지 파악한다. ...눈 때문에 살짝 분간하기 어려운 기분도 들지만, 여긴 분명 에이지가 어렸을 적에 폐점했던 오래된 낡은 책방이 있었던 곳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재건축하지 않고, 녹이 다 슬어버린 셔터가 내려가있던 그 폐건물을, 사람들은 유령의 집이라고 부른다... 라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안타깝지만
(...이건, 가게, 인가?)
거스름이 일어난 나무기둥에 둘러쌓인 유리 너머에 뭐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개인 소유 주택으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무슨 가게같은 곳이겠지, 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간판도 뭣도 걸려있지 않다. 가게라기에는 살짝 의심스럽고, 그리고 수상하다.
(이런 가게라도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정말로 '수상한' 물건밖에 팔지 않으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 때는 그 때다. 우산을 접고 각오를 굳히고, 에이지는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 문을 힘껏 열었다.
"흐이엑!"
언뜻 보기에도 문지방이 안 좋아보였던 문은, 굉장히 부드럽게 열렸다. 에이지가 문에 넣은 쓸데없는 힘은 문 위에 있는 처마로 전달되어, 그 처마 위에 쌓인 눈이 등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눈이 떨어지는 소리, 코트 너머의 등으로 전해지는 눈의 차가움, 이 두가지 탓에 에이지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큰 소리는 점내의 정적 속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등의 눈을 털어내는 것도 잊어버릴만큼, 에이지는 자기 눈 앞에 있는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아연해졌다. 가게 외관과는 정반대로, 점내는 굉장히 깨끗했다. 하얀 벽과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 먼지 한 톨 없는 유리 케이스가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있는 모습은 귀금속집을 연상케 한다.
그 유리 케이스 안에 시계나 보석이 전시되어 있었다면, 에이지는 놀라면서도 서둘러 그 장소를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시계는 수년 전 선물로 줬고, 12살 아이에게 보석을 줄 정도로 에이지는 정신나가지 않았다. 그런 돈이 있다면 15주년 결혼기념일을 위해 적금을 해둬야지. 15주년에는 수정혼식*이니까, 돈은 별로 안 든다고 생각하지만, 금혼식*이나 다이아몬드혼식*까지 가버리면 어찌해야할지... 그때가 되면 누군가가 죽는다던가, 아내에게 버려져서 이혼당하는 등의 슬픈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좋은 일만 생각하자. 그러는 편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즐거울 것이다
* 일본의 결혼기념일 종류로 15주년을 수정혼식이라고 함. 금혼식은 50주년, 다이아몬드혼식은 60, 70주년
자세한 이야기는 http://www.eonet.ne.jp/~able/kekkon.html
케이크 가게였다면 팔고 남은 거라도 좋으니 적당히 5~6조각 사서 돌아갔을텐데. 히로가 좋아하는 케이크가 뭐였지. 다 좋아했지만, 확실히 '이거 엄청 맛있어!' 라고 각별히 기뻐하며 먹던 것이 있었는데... 메렝게. 아니, 메렝게 뒤에 딸려오는 녀석이었는데. 분명 생일케이크로써 오늘의 저녁밥 다음에 먹었을 터였다. 작년에 먹었던 음식을 되풀이하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케이스나 벽을 장식하고있는 물건들은, 시계도 보석도 아니거니와 케이크도 아니었으므로, 에이지는 우선 히로가 좋아했던 케이크를 떠올리기를 뒤로 미뤘다.
물건들은 태반이 검은색이었다. 벽에 걸려있는 물건은 1미터가 넘고, 케이스 안에 있는 물건은 30센치정도의 길이였다. 크기는 아무래도 좋지만. 에이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모양이다. 가느다란(개중에는 두꺼운 것도 있었지만) 통에, 손잡이와 방아쇠가 달려있는 그것들은.
통칭 총이라고 불리우는 물건들. 작은 철덩어리를 발사해서 그 앞의 물건을 파괴하는 무기.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물건.
...진짜 총이라면 그렇겠지만.
(깜짝놀랐네)
에이지는 내심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조용하게 눈이 내리는 밤에 발견한, 폐건물같은 수상한 가게. 한걸음 내딛으니 그곳에는 총들이 질서정연하게 전시되어있다. 묘한 시츄에이션 탓에, 묘한 착각을 일으켰다. 정말 사람 놀라게하는 가게로다, 라고 에이지는 멋대로 놀라고 멋대로 가게에 들어온 것을 합리화했다.
일본에서 진짜 총을 팔 리가 없다. 그야 어딘가에서는 암암리에 토카레프나 마카레프같은 걸 살 수 있겠지만, 여긴 아무리 봐도 그런 '어딘가'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건 모델건이겠지.
그 증거로ㅡ점내에는 어린 손님들이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쓸데없이 큰 라이플을 올려보는 아이는, 방금전에 에이지랑 스쳐지나간 소년처럼 보인다. 가게 안쪽에 있는 카운터에서는 녹색 에이프런을 한 초로의 남자가 신문에서 얼굴을 들어 무료하다는 듯이 이쪽을 보고있다.
이 때 에이지는 자신이 문을 열어둔 탓에 점내에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어오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등의 눈을 털어내고, 가게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가벼운 문이라는 사실을 잊고 힘을 잔뜩 실어서, 매우 큰 소리가 점내에 울려퍼진다.
"...죄송합니다..."
입 속에서 중얼거리듯 사과하고, 에이지는 장갑을 벗어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이미 이 시점에서 에이지는 결심했다
(...올해 히로의 생일 선물은 모델건이다!)
또 후미카가 화내겠지... 라고, 일단 내심 반성한다. 하지만 분명 히로는 처음보는 물건에 기뻐해주겠지. 그렇게 생각을 다잡고, 에이지는 다시 한 번 가게에 늘어서있는 물건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총 외에도 홀스터나 벨트 등도 팔고 있었지만, 그런 부속품은 딱히 필요없다.
에이지는 그다지 총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일단 리볼버랑 세미오토매틱의 구별은 할 수 있다. 리볼버는 러시안룰렛을 할 수 있는 무서운 녀석이고, 실린더가 빙글빙글 회전하며, 영화 주인공이 자주 들고다니는 일이 많은 큰 총. 세미오토매틱은 손잡이 속에 탄창이 있고, 약간 작지만 총알이 잔뜩 들어간다. 문외한인 에이지의 지식이야 이정도다.
두 종류의 차이점이야 잘 모르지만, 에이지는 리볼버를 사기로 했다. 그 이유는 간단명쾌하다. 리볼버의 모양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총신이 길고, 손잡이가 곡선을 그리는 모습이 좋다. 게다가 크고. 크다는 건 좋은 일이다
찾아보면 작은 리볼버도 있고, 큰 세미오토도 있겠지만, 에이지는 딱히 찾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은 일은 예산과 상담 뿐이다... 하지만, 진열되어있는 모델건은 이것도 저것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다. 이런 물건의 시세를 모르는 에이지는 다소 불안했다.
그리고 벨트의 체인에 이어져있는 지갑을 꺼내서 안을 살펴본 에이지는, 불안해서가 아니라 처량해서 울고 싶어졌다. 5000엔 지폐가 한 장, 1000엔 지폐가 한 장. 딱 그만큼만 들어있다. 잔돈을 합치면 7000엔 남짓 될 지 모르지만, 모델건 한 정을 7000엔에 살 수 있을지
몇 분 생각하고, 에이지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즉 이 지갑에 들어있는 액수를 제시하고,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델건을 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를 상황이 아니었다. 그게 안 된다면 가장 싼 녀석을 사서, 어떻게든 외상으로 해줄 수 없는지 부탁해야 한다. 그래도 안 된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
한순간, 현재 이 가게에 있는 유일한 손님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에이지라도 난생 처음 본 꼬마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다. ...애초에 그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며 에이지는 자기가 가게에 들어오고나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벽을 바라보는 소년의 등을 봤다.
나이랑 키는 히로와 그리 다르지 않아보인다. 학원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기타 케이스를 메고있는 모습을 보니 음악교실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쪽이건, 이런 야밤에 이런 가게를 들락거리다니. 정말이지, 본인도 글러먹었지만 부모도 글렀다. 내 딸들은 이런 시간에 돌아다니게 하지 않으리라, 마음 속으로 그렇게 결심했다.
귀까지 덮히는 따듯해보이는 모자를 쓴 소년에게 눈을 돌리고, 에이지는 바로 카운터로 향한다. 그리고 점주 앞에 서서, 앉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에게 확실하게 말한다
"6000엔으로 살 수 있는 총을 주세요. 가능하면 리볼버 큰 걸로"
이 상황에서 역시 좋아하는 것을 우선하는 에이지였다
그리고 그에게 초로의, 그런 주제에 언뜻보니 자기보다 팔뚝이 두껍고 머리가 살짝 벗겨져 번들번들한 이마에, 그런데도 신문을 잡고있는 손가락은 가늘고 예쁜 점주의 대답은 이랬다.
"...당신 바본가? 여기가 어딘지 알고나 있는 게야?"
오늘 막 만난 사람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딱히 화나지는 않는다, 자신이 한 말에 비하면
"모델건 가게 아닌가요?"
밖에서 봤을 때는 전혀 몰랐지만, 이런 안 모습을 보면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가스건인가. 어느쪽이건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을 담아, 에이지는 점주의 얼굴을 본다.
"....하"
점주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저기... 6000엔으로"
"없어"
한마디로 잘라버린다.
"그럼..."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잔돈을 꺼내보는 에이지였지만
"여기는 당신같은 초보자가 올 가게가 아니야. ...얼른 돌아가라구"
주위에서 온화하다고 평가받는 에이지였으나, 점주의 건방진 말을 듣자니 살짝 열이 올랐다.
"확실히 저는 모델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딸에게 줄 생일 선물로 색다른 물건을 주고 싶은, 그런 단순한 이유라구요. 딱히 신품이 아니라도 상관 없습니다. 아무튼 오늘 안에 물건이 필요하다구요. 부족한 돈은 나중에 드릴테니, 아무튼 팔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성심성의껏 진심을 담았다. 내일이면 의미가 없다. 앞으로 한시간과 몇분이면 끝나버릴 오늘 안에 집에 무언가 가져가지 않으면, 생일 선물이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좀 더 빨리 사두면 좋았을텐데라고 매년마다 생각한다. 지금도 반성은 하고 있다. 반성만 할 뿐 전혀 고쳐지지 않지만.
"...이런 거 받고 좋아할 딸은 없어"
"우리 아이는 뭐든 좋아합니다"
"뭐든 좋아한다면 그 주변에 눈으로 눈사람이나 만들어서 선물하라고"
"우리 아이는 눈사람 만들기의 프로라서 허접한 눈사람은 줄 수 없어요"
그런 대화를 하는 두 사람 옆에서, 작은 손이 나와 카운터에 길고 얇은 상자를 올려둔다. 에이지가 옆을 보자, 벽에 붙어있던 소년이 어느샌가 다가와있었다. 이 때 처음으로 에이지는, 그 소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표정이 없는 그 소년은, 등골이 곧게 뻗어있었다. 허리가 휜 에이지가 무심코 부럽다고 생각할만큼.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눈매가 좋지 않다. 어딘가 지쳐보이면서도 달관했다는 듯한, 어린아이답지 않은 눈매다. 에이지가 알고있는 그 어떤 어린아이도 이런 눈은 하고있지 않다. 게다가 어른들도 이런 눈은 하지 않는다.
죽은 생선처럼 생기가 없고, 탐욕스럽게 음식을 찾아다니는 까마귀처럼 굶주려있고, 나무늘보처럼 흐리멍텅해보인다. ...나무늘보의 눈을 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그런 눈이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
한 번 그렇게 느껴버리니, 목에 두른 목도리도, 입고있는 코트도, 어깨에 메고 있는 기타 케이스도, 모든것이 눅져보인다.
"...가져가"
점주의 그 한마디를 듣고, 소년은 놓아둔 상자를 다시 손에 든다. 잘 보니, 상자 옆에 대금이 놓여있다. 그 지폐 수를 보고, 에이지는 졸도해버리는 줄 알았다. 10000엔 지폐가 10장 이상, 적당히 고무줄로 묶여있다. 어쩌면 가장 위쪽이랑 아래쪽 지폐만 10000엔짜리고 사이에 끼어있는 것들은 1000엔짜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꽤나 거금이다.
(...최근 어린애는 이만한 돈을 갖고 다니는 건가...)
에이지가 맥이 풀린 사이에, 소년은 가게를 나가버렸다. 거의 무음으로 문을 여닫은 그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에이지는 살짝 소년의 지갑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타인의 지갑을 선망하고 있을 경우가 아니다. 딸의 생일 선물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무거나 좀"
"당신, 여기서 파는 물건이 정말로 뭔지 모르겠는가?"
"그러니까, 모델건이잖아요?"
".......하아"
이번엔 아주 긴 한숨을 쉬고, 점주는 곤란하다는듯이 소년이 두고 간 지폐다발을 센다. 무심코 같이 세던 에이지는, 10000엔 지폐가 14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악하면서 어처구니없이, 본적도 없는 소년을 키운 부모에게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라고 묻고 싶어졌다.
"...소비세 포함 14만엔. 뭡니까, 아까 그 꼬마가 샀던 것은"
"당신, 도련님의 어깨에 뭐가 있었나 기억하나?"
아무래도 이 점주는 질문만 할 모양이다. 의도는 전혀 모르겠으나, 어찌저찌 대답해버리는 에이지였다. 집에 걸려오는 묘지 매각 전화에도, 길거리 앙케이트에도, 질문에는 무심코 뭐든 대답해버리는 솔직한 어른이었다.
"기타 케이스라고 생각하는데요"
"...정말로, 초짜로구만..."
넓은 이마를 찰지게 두들기며 그 점주는 곤란하다는듯이 쇼케이스를 본다.
"...뭐, 상관 없나, 도련님은 돌아갔고"
"예?"
"아니, 혼잣말이네... 그래서, 단순히 딸에게 줄 뿐이지 실제로 사용하진 않겠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모델건인가요?"
관상 외에, BB탄으로 발사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용할 수 없지. 사용 못하더라도 괜찮겠지?"
"...네, 그냥 장식용이니까요. 모델건이란 그런 물건 아닙니까"
에이지의 말에, 점주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가게 안 깊숙히 들어갔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팔아줄 모양이다. 지갑을 열어 6000엔을 꺼내든다. 자신의 계획성 없음을 올해도 일단 반성하며, 에이지는 '내년이야말로!'라며, 오늘만 몇 번째의 결심을 한다. 내년이야말로 어쩔 생각인가, 라고 물어보면, '...글쎄, 어떡하지'라는 정말 신뢰성없는 말이 돌아오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엔 그런 질문을 던질 사람이 없다.
그렇게 반성만 하는 사이에, 점주가 종이박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5000엔"
냉담하게 들이밀어진 상자의 대금을 청구받아, 에이지는 쥐고있던 지폐에서 5000엔을 건네준다. 돈을 지불했으니, 내용물이 정말 원하던 물건인지 확인해볼 필요성이 있다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집에 가서 열게. 그리고 딸에게 주던 어디다 장식을 하던 마음대로 하라구. 버릴 때에는 제대로 타지 않는 쓰레기에 버리고. 그땐 저주받을 각오를 해두도록 하고. 물건을 소중히 하란 말이네"
그만큼 말하고, 점주는 다시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는 건 다소 불안하지만, 아무튼 에이지는 상자를 들어올렸다.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안에 뭔가 들어있다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상자를 가볍게 흔들어보니,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불안은 남지만, 아무튼 안에 뭔가가 들어있다.
"그나저나, 내용물은 뭐죠?"
"어딘가의 바보가 커스텀해버린 아스트라M44지"
...잘 모르겠으나, 자세히 물어본들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버리겠지. 그렇게 되면 에이지는 어차피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아스트라, 라는 이름만 기억해두고, 에이지는 상자를 다시금 들어올렸다.
"...저, 포장은 안 해주나요?"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안 해주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상자를 들고 출구로 향한다.
"환불은 받아준다네. 돈은 돌려주지 않지만"
등 뒤로 던져진 말에 에이지가 돌아보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건 환불이 아니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알 수 없는 가게였다
이리하여, 에토우 에이지는 어찌저찌 장녀에게 줄 생일 선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
그게 딸의 평범하고 평온했던 인생을 뒤집어버리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 무슨 바보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은 귀찮은 존재이며 위험물이다
살아있는 자의 혼을 갉아먹고, 죽은 자의 혼을 불러들이는 한니발. 주인에게 충의를 다하며 주인과 함께 죽는 사역마의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주인에게 불의를 다하고 주인을 명부로 이끌면서도 자기자신만은 살아남는, 죽음을 부르는 고양이.
얼빠진 남자의 겨드랑이에 끼여, 약간 뜨듯해진 상자 속에서 나는 여러 생각을 했다. ...저 점주는, 어떤 의미로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영수(霊髄)가 흐르지 않는 인간은 내 모습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나는 그런 인간에게는 전혀 무해하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만나고 말았다. 나를 보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을.
그게 바로 그녀였다.
***
고양이가 말한다. 뭐 넓은 세상이니까 말하는 고양이가 있다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 드물긴 하지만.
히로는 자기 허벅지에 있는 고양이를 지긋이 바라본다. 이 아이도 역시 생일 선물 중 하나일까? 확실히 귀엽고, 받아서 기쁘냐고 묻는다면 기쁘지만. 하지만, 후미카는 이 이상 고양이가 늘어나면 화낼텐데. 니케나 하루히코를 마구 괴롭히지는 않지만, 결코 만지려들지 않는 후미카. '고양이 싫어?'라고 물어봤더니 '정말 싫어'라고 대답했던 후미카.
"후쨩한테는 비밀로 기르면 되려나... 아, 일단은 이름을 지어줘야지"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너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현저히 결여되어있다고 생각한다만)
"아, 호칭이 당신에서 너로 바뀌었어. 왜 다르게 불러?"
새끼고양이는 눈을 깜빡거렸다. 할머니가 '고양이는 눈을 깜빡이지 않는단다'라고 했는데, 역시 고양이도 눈을 깜빡이잖아. 왜냐면 눈을 깜빡거리지 않으면 눈이 피로해지니까
(처음 만나는 인간에게 대하는 호칭을 너무 친근하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당신'이라는 2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너같은 어린애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말이야. 그냥 그뿐이다. 다른 의미는 없어)
"뭔가 어려운 말을 쓰네, 이 아이는. 좀 더 간단하게 말해줘"
(...그 전에, 넌 이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응, 이상해"
정말로 이상하다. 고양이가 말하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 좀 더 다른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반응?"
히로는 목을 갸우뚱했다. 확실히, 고양이를 눈 앞에 두고 자신이 취해야할 행동을 취하지 않은 느낌이다.
즉.
"...아아, 안아주기!"
손을 뻗어, 히로는 고양이의 등을 손으로 잡는다. 그 회색 등을 우선 쓰다듬어줘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라?"
등에 두려했던 손이, 어째선지 차가운 바닥을 만지고 있다. ...손목부터 그 앞이, 고양이의 등에 깊히 박혀있는 듯이 보인다.
"으응?"
손을 거뒀다. 고양이의 등에서, 제대로 자기 손이 튀어나온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만져본다. 손에 전혀 감각이 없다. 이 고양이는 털이 제대로 갖춰져있는데도 몸은 공기로 되어있는 걸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했나?)
히로는 생각했다.
어느날 아침, 갑자기 자기 배게맡에 나타난, 말하는, 만질 수 없는 고양이.
즉 이 고양이는, 그거다.
"유령?"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아, 그렇구나. 과연 과연"
어쩐지 만질 수 없더라니. 그래도 히로는, 이 귀여운 고양이에게 닿으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았다. 손바닥을 펼쳐, 살금살금 배를 향해 다가간다. 만질랑말랑한 곳까지 다가가서,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뭐하는 거야?)
"쓰다듬으려고 하는데. 손의 감촉이 전혀 없어서 쓸쓸하네"
(...그나저나)
"넹?"
가느다란 고양이의 눈동자가, 히로를 올려본다. 흑색과 금색이 섞인 그 눈을 정면에서 보고, 히로는 '이쁜 고양이구나'라고 생각햇다.
(너는, 적당히 나라는 존재에게 의문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의문? 왜? 아아!"
고양이에게 손을 뗀 히로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끄덕였다.
"이름, 아직 안 지어줬지. 어떡하지ㅡ 그런데, 수컷이야 암컷이야?"
엉덩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얌전히 앉아있는 저 상태로는 엉덩이를 볼 수 없다. 보통 고양이라면 안아올려서 봤을텐데,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은 안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슬프다.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를 안아볼 수 없다니. 하지만 뭐, 의사소통이 된다는 건 꽤 좋은 일이다. 무엇보다 히로는 단 한 번도 고양이랑 대화해본 적이 없으니까.
목소리로 판단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이 고양이 소리는 분간을 못하겠다. 어디서 들리는지도 잘 모르겠고. 말하고있는 입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어째선지 귀로 듣고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수컷이라고 하건 암컷이라고 하건 수긍해버릴 목소리다. 그러므로, 자기소개를 부탁하는 히로였다.
(혼에게 암수의 구분은 없어)
"에, 그럼 심영이야?"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고서 히로는 '아, 심영은 남자인데 불알이 없을 뿐이지, 즉 남자라고 봐야하나'라고 소리내서 중얼거렸다.
(...아무튼, 이름은 지어주지 않아도 되. 이름이라면 있으니까)
"뭔데?"
***
(한니발)
사실은.
이 이름을 대고 싶진 않다. ...나에게도, 이름이 있었을 터였다. 이제 떠올릴 수 없는 이름이.
하지만 나는 한니발이라고 이름을 대야만 한다.
그녀는 나에게 암수를 물어봤지만... 그런 건, 이미 나 자신조차 알 수 없다.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 소녀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나보다...
"흐음. 그럼, 수컷인지 암컷인지 모르면 곤란한걸. 수컷이면 한 씨, 암컷이면 하루 씨인데"
(...뭐야, 그건)
반문해버리고 말았다... 이 시점의 나는 알 턱이 없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언동에 의문을 갖는 일은 상당한 헛수고다.
"그치만 한니발은 길잖아. 핫쨩이라고 해도 좋지만, 하츠히코가 핫쨩이니까 핫쨩은 안 돼지. 그러니까 짧게 부르려고 생각해서. 그치만, 허니 씨나 하바 씨는,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아, 너한테 씨를 붙이는 건 왠지 연상처럼 느껴지니까야. 옛날에 있지, 할머니의 지인한테 범선의 돛에 '히로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한 씨, 한 씨 하면서 불렀대. 그러니까 하루 씨라는 건 여자이름이잖아. 그러니까 한 씨 또는 하루 씨라고 부르는 건 굉장히 대단한 일이야"
.................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애써 이해할 수 있었던 사실은, 그녀가 내 이름인 한니발을 짧게 줄이고, 거기에다가 한이라고 부를지 하루라고 부를지 정해버렸고, 둘 중 하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 혼에 암수 구분은 없지만, 이 고양이 육체는 암컷이야)
그건 알 수 있다. 원래 몸은 그저... 아니, 학대당해 죽어버려 목숨을 떨어트린 불쌍한 암컷 고양이. 이 약간 지저분한 모습을 한 새끼고양이가, 이제는 나의 자랑거리다.
"그럼 하루 씨네. 좋겠다아 하루 씨. 겨울에 온 하루* 씨! 괜찮잖아, 겨울 다음에는 봄이 오니까. 아, 내 이름은 에토우 히로야. 잘 부탁해)
* 오타쿠라면 다 안다
(...잘 부탁해)
나는 난처했다.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그녀는, 내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ㅡ그리고 그녀는, 이 아스트라M44 아르케부스 커스텀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
그건 즉, 나에게 혼을 갉아먹히지 않는 한, 난 그녀로부터 떨어지지 못하고, 그녀도 나에게 떨어지지 못한다.
...이 때, 난 딱히 그녀의 혼을 갉아먹는데 죄악감을 느끼지 않았다.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 얼빠진 애비가, 그 가게에 들어가, 이 저주받은 아르케부스를 사, 그녀에게 건네준 일.
그리고, 그녀의 영수가 이미 조금이지만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
***
"저기저기, 하루 씨. 우리 가족한테 소개해야 하니까 같이 내려갈래?"
파자마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히로는, 발밑에 있는 한니발에게 말을 건다. 그녀(한니발은 '나에게 암수 구분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히로 안에서는 이미 이 고양이는 암컷이라고 인정되었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왼쪽 수염을 곤두세웠다.
(...너, 내가 유령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던가?)
"아 맞다, 그랬지. 그게 왜?"
이 소녀에게 '평범한' 반응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가보다. 한니발은 이 때 겨우 그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보통 사람은 날 자각하지 못해)
"또 어려운 말을 쓰네..."
(너 이외의 인간은 내 모습을 볼 수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는 뜻이야)
"에엥, 그래!? 쓸쓸하겠다... 그리고 곤란한걸"
(뭐가)
"고양이가 늘어났는지도 모를텐데, 먹이가 줄어드는 양이나 화장실 모래가 줄어드는 양이 늘어나면 이상하잖아"
(...난 먹이를 먹지도 않고, 화장실도 안 가)
"아, 그런가, 유령이니까, 이해했어"
히로는 응응 거리며 끄덕이고, 팔장을 낀다. 그 때, 계단 아래에서 '뀨우'하는 니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 니케한테 밥을 안 줬네. 맞아, 니케랑 핫쨩한테도 하루 씨를 소개시켜줘야지. 사이좋게 지내줘. 왠지 니케는 하루 씨를 무서워하는 듯 하지마나"
니케의 저 태도. 저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지금도 한니발을 경계해서 이 방에 들어오지 않는 거겠지. 자기가 기르는 고양이에 관한 건 잘 알고있는 히로였다.
(보통 고양이는, 나를 싫어하는 모양이야)
"왜?"
(유령이니까... 엄밀히 표현하자면 영적물질 결합체고, 유령이랑은 다르지만)
왠지 잘 모르겠는 말을 하는 한니발의 말 후반부를, 히로가 멋대로 간략화한다.
"고양이는 마물이라고 하던걸. 마물이랑 유령은 비슷하지 않아?"
(...비슷하지만, 반드시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아니야. 너도 인간이지만, 인간 모두와 사이 좋은지 물어보면 절대 그렇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지, 그건 또 그러네"
뭐 그래도,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건 아니니까. 하츠히코랑 니케도, 처음에는 꽤나 사이가 나빴다. 정확히는 낯가림이었지만. 낯가림이 심한 니케가, 할머니 외의 사람을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다. 그래도 히로랑 하츠히코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털이 다 빠질만큼 노력한 결과, 현재의 원활한 사람과 고양이 관계가 된 것이다. 현재, 니케는 히로를 이상할만큼 잘 따르고 있고, 하츠히코 등에 달라붙어 잘만큼 사이가 좋다.
시간을 들여 사이가 좋아지게끔 노력하면, 분명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지, 아마도.
"뭐, 하기 전부터 포기하지 말고 힘내야지. 1층에서 핫쨩을 소개시켜줄게. 그러면 하루 씨, 안아... 줄 순 없지. 쓸쓸한걸"
한니발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네 발로 히로의 몸에 달라붙어, 오른쪽 어깨 위에 올라탔다. 니케도 자주 히로의 어깨에 달려들지만, 도중에 손톱으로 붙잡는 게 아프고, 무엇보다 무섭다. 하지만 한니발은 전혀 손톱을 세우지 않는 데다가 무겁지도 않다.
유령이니까 그렇구나, 하고 히로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라?"
히로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한니발에게 '닿았다'라는 감촉이 있다. 방금 그녀가 도약해 자신의 가슴에 뛰어든 다음 어깨로 올라갔다. 그 때, 확실히 고양이의 네 발이 자기 몸에 닿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오른쪽 어깨 위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도, 손을 뻗어서 만지려 하면, 히로의 손은 새끼고양이의 몸통으로 숙 들어가버린다.
"왜 하루 씨는 나한테 닿을 수 있는데, 난 하루 씨를 만지지 못해?"
(너랑 대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질문을 받은 기분이야)
한니발은 가느다란 눈동자를 히로의 머리에 향한다.
(...너,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나?)
"헉, 어떻게 알았어?"
(에테르가 살짝 결락되어있어. 보면 알지)
"에에테루?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데... 아! 마시면 눈의 피로가 풀린다고 할머니가 말한 그건가!"
(...그건 메틸 알코올이야)
한니발은 거의 없는 꼬리를 슬쩍 흔들었다. 이 에토우 히로라는 인물이, 그 애비와 견줘도 손색없는 바보라는 사실을 이해한 한니발이었으나, '바보입니다', '네 그래요 바보예요'라며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어리석은 자에게,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는 것처럼 여러가지를 알려줘야 한다.
***
...왜 알려줘야 할까. 이 나를 움직이는, 그 근원은 대체 뭘까
................
메틸 알코올에 농황산을 넣고 증류한 것을 메틸 에테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지만, 내가 입에 담은 에테르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에틸 에테르와 헷갈리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메틸이 나올줄은 상상도 못했다.
'혼의 혈수(血髄)'.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혼'을 전파하는 매개. 골수 안을 달리며 살아있는 자를 살아있는 자답게 하는 것. 이 고양이의 몸을 구성하는 것은 , 불순물이 섞여있는 에테르다.
...라는 사실을, 이 아이에게 설명해서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까. 몹시 불안해진다.
하지만.
이 아이는, 어째서 이렇게도 에테르가 부족할까. 머리만이 아니다. 오른발 일부나 복부, 왼손목 등에서 에테르가 빠져나가고 있다. 딱히, 에테르 부족 자체는 별 일 아니다. 육체가 눈에 띄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 에테르도 흘러나간다. 육체가 결여되어있다면 에테르도 결여된다.
하지만, 이 아이의 육체 자체에는 큰 결함이 없다. 게다가 '결여됐다'고는 해도, 에테르는 매우 원활하게 그녀의 전신에 흐르고 있다.
결여되어있음에도 흘러넘친다. ...그녀의 혼은, 달을 닮았나보다.
...나와 그녀의 만남은, 정말 많은 요인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 맞춰 일어났다. 그 결과가, 나와 그녀의 전설의 시작이다.
......라고 말하면 꽤 듣기 좋다. 20세기 최후의 영웅전설을 세운 에토우 히로와, 사역용 영적물질 고등결합체 한니발. ...그건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이야기이며, 지금은 어떠냐면
그냥 단순한 바보랑, 그냥 떠돌이 혼 착취꾼일 뿐이었다.
***
***
"...그거 뭐야"
에토우 후미카는 다락방에서 내려온 언니를 바라본다. 계단 아래에서 언니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다 지쳐있던 니케가 후미카를 보고 당황해서 도망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고양이다, 정말이지. 상냥하게 대해준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괴롭힌 기억도 없는데. 따른다 하더라도 기분만 나쁠 뿐이니 별 상관은 없지만.
"아, 좋은아침, 후쨩. 하루 씨야"
어째선지 히로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그렇게 말한다. 뭔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히로가 오른손에 들고있는 모델건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아아, 저게 12살 생일 선물이고, 바로 이름을 붙인 거구나. 후미카는 그렇게 해석하고, 히로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히로가 모델건을 자기 눈앞으로 들어올린다.
어째 굉장히 진짜같아보이는 모델건이다. 크고 정말로 무거워보인다. 저런 물건은 플라스틱인가 뭔가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꽤 제대로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금속 특유의 광택을 내뿜는 모델건은, 확실히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일 선물로 받을 물건은 아니다. 보통 기쁘지 않다.
그런데
"이게 올해 선물이야ㅡ 좋겠지ㅡ"
"전혀"
한마디로 잘라버리자, 히로는 곤란하다는 듯이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좋아보이는데ㅡ"
"그런 물건 받아서 기뻐하니까 바보"
"저기, 후쨩"
지금.
히로는, 후미카의 말을 잘랐다. 후미카가 기억하는 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언니는, 누군가가 말하는 도중에 말을 끊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터인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반드시 마지막까지 듣는다. 듣기만 할 뿐, 머리에 들어가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듣는다.
그런데, 지금 히로는 후미카가 1일 1회 이상 행하는 '바보설교'를 끊었다.
후미카에게 있어서는 꽤 놀라운 일이었지만, 히로는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계속한다.
"내 오른쪽 어깨에 있지, 하루 씨라는 새끼 고양이가 있어. 회색 줄무늬에, 오른쪽 귀가 너덜너덜하고 오른쪽 수염 절반이 없고 꼬리가 굉장히 짧은 귀여운 암컷... 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면 한 씨라고 해야할지, 하루 씨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걸"
오른쪽 어깨에, 고양이. 후미카는 히로의 오른쪽 어깨를 무심코 응시해버렸다. 가끔 니케가 어깨에 올라타는 일이 있다. 새끼고양이 시절에는 어깨에 올라타는 버릇이 들어버린 모양이라, 지금도 히로가 멍하니 서잇으면 니케가 경쾌하게 어깨로 날아든다. 하츠히코는 절대 흉내내지 못하는 묘기, 어깨타는 고양이. 하지만 지금, 히로의 오른쪽 어깨에는 물론 왼쪽 어깨에도 고양이같은 건 없다.
"...어깨 위에, 고양이가 있다고?"
"응, 하루 씨... 끄앙"
후미카의 주먹펀치가 히로의 배에 작열한다. 이건 꽤 아프다. 발로 걷어찰 때는 후미카가 나름대로 힘을 뺀다는 사실을 히로는 안다. 하지만 주먹펀치는 힘을 최대로 실은 아픈 주먹펀치다.
"아파아..."
배를 움켜쥐고 상반신을 앞으로 부구린 히로의 뒤통수에, 후미카의 말이 쏟아져내린다.
"고양이가 어깨 위에 있다니, 그딴 거짓말을 했으니까 주먹펀치야. 바보처럼 정직한 주제에 이제와서 거짓말쟁이 연습을 해서 어쩌려고 그게 아니면 뭐야, 히로 눈에밖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라면, 히로의 눈이 바보가 되버린 거야 아 그 눈이랑 뇌가 이어져있으니까, 눈이 바보인 거랑 머리가 바보인 건 같지 시력이 좋은 것만이 장점이었는데, 그것도 없으면 이젠 그냥 노답 바보잖아 바보야"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후미카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언니를 무시하며 1층으로 내려가버렸다.
그 몇십초 뒤
"...아아, 아팠다구 주먹펀치는"
배를 문지르면서 히로는 얼굴을 올린다. 그 표정은 언제나처럼 변하지 않는다. 아까까지 아파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일 따위는 벌써 잊은 모양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루 씨는 후쨩에게 보이지 않는구나, 깜짝놀랐어. 목소리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고. 아빠나 엄마도 하루 씨를 모르겠네. 슬픈걸"
(한가지 묻고 싶은데)
히로의 오른쪽 어깨에 걸터앉아있는 한니발은, 계단 아래로 시선을 보낸다.
(저게 네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알겠어. 하지만, 꽤나 난폭한 동생이군. 그리고 나도 언니로서는 영 아닌걸)
"후쨩은 착한 아이야. 내가 나쁜 언니라는 건 맞는 말이지만... 하지만, 이상하네. 난 이렇게 하루 씨를 보고 말하는데, 어째서 후쨩에게는 보이지 않는 걸까"
한니발은 시선을 히로에게 되돌려, 작은 목을 천천히 굴린다.
"그 동작 귀여워"
(내가 귀여운지 아닌지는 상관 없어. ...너랑 네 동생의 차이점은 단 하나, 너의 뇌내에서 영수가 흐르기 때문이야)
히로는 계단 가장 위쪽에 허리를 걸치고 한니발을 만지려 했다. 왼쪽 귀 근처에 손을 대자, 한니발은 평범한 고양이처럼 귀를 쫑긋쫑긋하며 반응했다.
"으음, 만지지 않았는데 만진 기분이야"
(...영수는, 숨골 사이에 존재해. 보통 인간은 아주 천천히밖에 움직이지 않지.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가끔씩 뭔가 계기로 흐르기 시작하는 인간이 있어. 이 영수가 흐르면 영적인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지. 영수가 흐른다는 말은 그저 비유고, 실제로 흐르는 건 아니지만...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듣기만 할 뿐이지만"
자기 일인데 즐겁다는 듯이 보고있는 히로에게, 한니발은 맥이 풀려서 고개를 숙였다.
"하루 씨, 귀여워"
(...너 그거 칭찬이야?)
"아니, 귀여워하는 건데"
(귀여워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해)
"그렇게 말해도..."
히로는 왼손에 들고있는 총을 무릎 위에 놓는다. 손으로 잡고 있으면 무거우니까. 1키로 이상은 되나보다. 2키로는 안되는 모양이지만. 적당히 1.5키로 정도 되는가보다.
(너무 막 다루지는 않는 게 좋아. 위험하니까)
"위험해? 모델건인데?"
(모델건이 아니야. 아르케부스다. 베이스는 아스트라M44지만, 약간 커스텀마이즈되어있지. ...분명히 말하지만 멋대로 쓰면 안 돼. 어디가 어떻게 안 돼는지는... 천천히 설명하도록 하지)
"또 어려운 말 쓰네, 하루 씨"
무릎 위에 얹은 모델건이 아닌듯한 그 총을, 히로는 뚫어져라 쳐다봤다.
검은 총신이나 실린더의 아랫부분에는 무슨 문자가 각인되어있는 것 같은데, 지워져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총에 글자가 남아있는 부분은, 손잡이에 있는 자그마한 엠블럼 뿐이었다.
그 엠블럼은, 은색 원반 중앙에 빨간 녹색을 한 원이 새겨져있는 매우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엠블럼 중앙에는 알파벳이 각인되어있다.
"...H...A...N..."
(HANNIBAL. 한니발이라고 읽지)
"아, 그렇구나ㅡ 그럼 이거 하루 씨 거야?"
(지금은 네 물건이야. 그건 너의 아버지가 너한테 사준 선물이니까, 내 물건이 아니지)
"그래? 그럼 됐지만"
(그런데, 넌 한니발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갖지 않는군?)
"의문? 왜?"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하는 히로에게, 한니발은 다시 맥이 풀려버렸다.
"으음, 하루 씨는 귀여운걸"
(...나는, 너라는 인간에게 의문밖에 떠오르지 않아)
"아아, 그런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꽤 듣는 편인데. 봐, 나는 바보니까. 뭐, 하루 씨도 그냥 신경쓰지 마. 털이 빠진다구. 핫쨩이 있지, 귀 뒤에 털이 조금 빠졌다구. 저게 원형탈모증이구나 하고 생각했어. ...아, 하루 씨는 이렇게 위에서 보지 않는 한 괜찮겠는걸. 여자애가 탈모라면 슬프니까. 괜찮아? 배 부분이 벗겨지진 않았지? 핫쨩 배는 슬플 정도로 벗겨졌으니까. 까만 고양이인데, 털이 빠진 자국도 까맣다구. 그래도 뭐, 핫쨩은 남자애니까 벗겨져도 괜찮아. 하지만, 하루 씨는 너무 벗겨지지 마. 우리 할머니도 나이 들어서 머리털이 점점 벗겨졌긴 하지만, 어릴때부터 대머리가 되는 건 슬픈 일이라구"
(그러니까, 나는 암수 구분이 없다고...)
***
...평범한 인간의 반응이 아니다. 여러 의미로.
그녀는 맹렬하게 이 고양이의 모습을 '귀엽다'고 하지만, 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말인가. 수염이 반밖에 없고, 귀는 잘려있고, 꼬리는 제대로 나있지도 않은 고양이를. 아름답지 않은 회색 줄무늬 가죽을 가진 이 고양이를.
내가 지금까지 해를 끼친 인간들의 반응과는 다르다. ...그들은 흥미 본위거나, 보다 높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나와 내 아르케부스를 탐냈다. 그 말로는, 전부 같다. 하지만, 반응은 비슷했다. 나를 두려워하고, 기분나빠하고, 나와 필요 이상의 접촉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에토우 히로라는 소녀는 어떤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어리석다. 모르는 게 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는 너무 이상하다. 나는 그녀가 무언가 질문하면,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서 모두 대답하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물어보는 것들은, 내 성별이나 털이 빠지는가 하는 등의 것들이다.
이 때, 나는 그녀를 어리석다고 단정하기를 그만뒀다. 그녀에게는 정신적 결락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에테르가 전신에 흐른다고는 하지만, 결함있는 부분이 머리통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필시 그녀의 양친은 그녀의 지능을 걱정하고 있겠지. 하지만, 이건 의사가 고칠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다.
결함있는 부분은, 원래대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영원히. 억지로 수복하는 방법을 알고는 있지만, 그건 혼에 대한 모독이다.
애초에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에 대한 모독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꼭 해야만하는 일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가ㅡ에토우 히로가 이해해줘야만 한다.
하지만... 대체 뭐부터 설명해야 할까
전도다난해 보인다...
***
스토브 앞에서 졸고있는 하츠히코가, 히로가 들어오는 기척을 눈치챘는지 기지개를 켠다. 하지만 히로를 보더니, 벌떡 일어서서 몸을 낮추고 자세를 잡는다. 그래도 따듯한 스토브 앞에서 떨어지려하지 않는 모습이 뻔뻔한 게 하츠히코답다.
"...어라, 역시 핫쨩도 하루 씨가 무서운가봐"
세수하고 엄마에게 인사를 한 뒤, 아빠가 벌써 출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선물에 대한 감사인사를 못해서 낙담한 히로는, 고양이 두마리의 화장실에서 굳어버린 분뇨를 걸러내고 줄어들은 모래를 채운 뒤, 니케에게 먹이를 준 다음 엄마랑 동생과 아침밥을 먹었다. 식탁을 활기차게 하는 건 히로 뿐이며, 엄마는 이따금씩 입을 열고 동생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한니발이라는 새로운 가족을 소개하려고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일단 엄마한테도, '어깨 위에 있지, 하루 씨라는 고양이가 있어ㅡ'라고 말해봤지만, 엄마는 난처한 얼굴로 '그건 보이지 않는 고양이니?'라고 물어왔다.
히로는 용기를 내서 이 유령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후미카가 화내면서 식탁을 박차고 일어난 탓에 중단되버리고 말았다. 안타깝다.
그런 이유로, 히로는 아직 한니발과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 하츠히코 앞으로 다가갔다.
"하츠히코, 이 아이는 하루 씨란다~ 암컷이라구~ 하츠히코는 암컷에게 상냥한 수컷이니까, 상냥하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됀다~ 자, 하루 씨도 스킨쉽 해봐"
히로는 오른쪽 어깨에 올라탄 한니발의 목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아아, 만지지 못하니까 스킨쉽은 못하겠구나, 아깝다 아까워"
더 이상 자신에게 암수 개념이 존재하지 않다고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한니발은 아무튼 히로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하고, 그녀의 어깨에서 내려와 하츠히코라는 수컷과 눈을 마주쳤다.
꽤 크고 길다란 꼬리와 평평한 얼굴을 가진 그 커다랗고 검은 고양이는, 등의 털을 세우고 한니발을 위협한다.
개나 고양이는 인간보다도 감각이 뛰어나다. 그건 후각이나 청각만이 아닌, 기묘한 '무언가'를 느끼는 것도 가능케한다. 개중에는 둔한 동물도 있지만, 그건 한니발의 경험상 매우 적었다.
그런 감각이 있기에 사역마는 개나 고양이 모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촉매가 손에 넣기 쉽다는 사실이 그 이유지만. ...그렇게 설명할까 생각한 한니발이지만, 결국 조용히 하츠히코의 시선에 몸을 맡긴다.
"핫쨩, 털 세우면 안 돼ㅡ 하루 씨는 귀엽고 어려운 말을 하는 고양이고, 아마 핫쨩보다 연상이니까 존경해야한다구. ...그런데 하루 씨는 몇살이야? 겉보기에는 새끼고양이에서 생후... 일년은 지나보이는데, 하는 말은 할머니같고. 18살 정도이려나?"
주의깊게 살펴보는 하츠히코를 상대하면서 한니발은 여러 생각을 했다. 이 상황 파악 능력이 없는, 의문을 갖지 않는,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녀에게, 우선 무엇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전혀 정리가 되질 않는다. 아까부터 나름대로 설명하려 했으나, 그리 들어주지 않는다. 듣기는 하지만, 알아주질 않는다.
이러면 소리를 질러서 위협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가슴털이 약간 하얀 이 검은 고양이를 보면서, 한니발은 고개를 움츠린다.
...그러자, 갑자기 하츠히코는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에게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천천히 걸어와, 주인인 히로의 발치에 접근한다. 히로의 장딴지에 몸을 문지르더니, 그대로 방 구석까지 가버리곤 얼굴을 한니발에게 향한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ㅡ 역시 무서워하네. 그럼 하루 씨 잠시동안 핫쨩이랑 눈을 마주해줘"
눈을 마주하라니. 나름대로 오래 살았다고 자부하며, 나름대로 많은 의뢰를 받아온 한니발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고양이랑 눈을 마주해라'라는 의뢰를 받아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번 다시 부탁받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럼 잘 부탁해. 나는 마니에르를 보고 올테니까"
(...마니에르?)
마니에르가 뭐냐고 묻기 전에 히로는 나가버렸다. 남겨진 고양이 두마리.
(............)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한니발은 어쩌면 좋을지 고민한다. 이 고양이랑 친해질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건가?
(...어째서, 이런 일이 되버린 걸까...)
우는 아이와 마름에게는 못 당한다, 라는 최근에는 쓰지 않는 속담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우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는걸...)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한니발이었으나, 하츠히코가 '니앙'하며 울어버린 탓에 주의를 되돌렸다.
***
마니에르가 죽었다. 굴러떨어진 머리는, 반쯤 찌그러져 원형 모양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기에, 어떤 사람이 밟았는지 어렴풋이 알게됐다. 꽤 큰 발자국으로 봐선 어른이다. 남자라는 건 알겠다. 남아있는 마니에르의 몸체가 약간 노오랗게 변해있으니까. 아마 취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근처에 면발이랑 갈색이 군데군데 섞여서 흩어져있다.
"...아ㅡ아..."
그리 풀죽지 않는 히로지만, 이건 역시 약간 대미지를 받는다. 몇 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엔 하교 도중이던 히로의 동급생이 상대였고, 자신도 현장에 있었지만. 히로가 눈사람을 만드는 데 열중하는 한편, 눈사람을 부수는 데 열중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정말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그 때에는 머리채를 붙잡혀서 하우엘이라고 이름붙인 눈사람에 안면이 처박혔다. 히로 스스로 굳힌 눈사람은 꽤 단단해서, 피는 나지 않았지만 뇌진탕을 일으키며 기절했다. 그건 기억하고 있지만, 그 다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었더니 거실 스토브 근처에 잠들어있었고, 배 위에 니케랑 하츠히코가 올라타있었다.
"...아ㅡ아..."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쉬고, 히로는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문기둥을 보니, 리와 레온도 찌그러져있다. 요 몇 년동안, 제대로 겨울로 돌아간 눈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작년, 자전거 안장 위에 놓아뒀던 야스다는 무사했다. 에토우 가문의 토지 안에 두면 대부분 무사하지만, 한발자국이라도 밖에 두면, 눈사람 서바이벌이다. 겨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눈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눈사람은, 눈사람ㅡ"
의미없이 그런 말을 대충 중얼걸이면서 히로는 주변을 둘러본다. 예쁜 눈을 찾아보지만, 어제 사이에 히로가 대부분 써버렸고, 사람과 자동차가 지나다니면서 더럽혀진 눈밖에 없다. 하얀 눈도 없진 않지만, 하룻밤 사이에 눈이 완전히 얼어붙어버려서 눈사람을 만들기에는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히로, 왜 침울한 얼굴 하고 있어... 아, 미안, 지금 보고 알겠어"
"...아, 옷쨩이다, 안녕"
눈을 흩뿌리면서 나타난 오치아이 아케미는, 현관 앞의 참상을 보고 크게 코를 울리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초콜렛 상자를 꺼냈다.
"하나 먹을래? 땅콩 들어있어"
"으아우, 지금은 됐어. 고마워"
히로는 담장 위에 쌓인 비교적 깨끗한 눈을 모으더니 작은 눈사람을 즉석에서 두 개 만들었다. 아케미가 초콜렛을 먹는 사이에, 문기둥에 장식하고 이름을 생각한다.
"...카지마랑 이하라"
"매년마다 생각했는데, 눈사람에 이름 붙이려면 좀 더 귀여운 이름으로 하라구"
"그럼 카지마쨩이랑 이하라쨩"
"쨩을 붙인다고 귀여워지지는 않잖아... 근데, 너 그거 뭐야"
"으응? 아, 이거? 아빠가 준 생일선물"
아케미가 가르킨 건 히로가 벨트 사이에 꼽아둔 아스트라M44였다. 방에 두고 오기 귀찮아서 그냥 갖고왔다.
"...또 이상한 선물을 받았구나... 뭐, 딱히 상관없지만. 그래서, 너 지금 한가해? 한가하면 선물 사러 갈테니까 같이 가자"
"선물? 누구한테 주려고?"
"너한테 줄 생일선물이야! 너는 뭐를 줘도 기뻐하지만 그 '뭐든 좋다'는 부분이 고민된다고! 그리고 오늘은 어차피 하루 지났으니까 너한테 고르게 해줄게. 예산은 1000엔까지야"
침울해하던 히로였지만, 아케미의 그 말에 표정이 밝아진다.
"고마워, 옷쨩. 한가하지 않더라도 갈게... 아, 그 전에 이걸 정리해야겠다"
현관 앞에 흩뿌려진, 직시하고 싶지 않은 토사물을 언뜻 본 아케미가 눈썹을 파르르 떤다.
"너네 집말야, 이런거 꽤 많은데... 식욕 떨어진다"
라고 말하면서도 아케미는 2개째 초콜렛을 먹기 시작한다.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정리할테니까. 청소하는동안 집에 들어가있을래? 나는 괜찮지만 옷쨩은 춥잖아? 추위는 발끝부터 오니까말이야, 조심해야해"
"괜찮아, 딱히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히로도 억지로 권하지는 않는다. 학습능력이 없는 히로지만, 아케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알고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케미는 에토우네 문턱을 넘기 싫어한다. 후미카랑 얼굴을 마주하기 싫다, 라는 사실은 알지만, 어째서 둘의 사이가 나쁜지 히로는 모르겠다. 한 번 아케미랑 후미카에게 물어봤는데, 전자에게는 무시당하고, 후자에게는 대답 대신 주먹펀치를 받아서, 그 이후로 묻지 않는다.
분명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ㅡ 라고 생각하면서, 히로는 청소도구를 꺼내러 창고로 향했다.
***
한니발은 난처했다. 그 뒤로 20분이 지났지만 하츠히코와 사이가 좋아졌냐고 히로가 물어본다면, 자신없다, 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
하츠히코는 여전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단, 스토브 앞에 드러누워있는 상태라, 그리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제 털을 세우지도 않고. 배를 내밀고있는 모습이 가끔 보이는데, 히로가 말한대로 슬플만큼 털이 없었다.
(...정말로 털이 없군)
자신의 겉모습에 긍지를 갖는 한니발이지만, 외관이 아름다운가 묻는다면 부정한다. 딱히 겉모습은 어떻든 상관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하츠히코라는 고양이는 일단 고양이의 외관을 가진 한니발이 보더라도 꽤 흥미깊었다.
발랑 벗겨진 배 주제에, 젖꼭지 주변은 약간 털이 남아있다는 언밸런스함. 검은 고양이인데 가슴 일부에는 하얀 털이 살짝식 나있고, 옆으로 납짝한 얼굴이 왠지모르게 이상하다. 더욱이 뼈가 두꺼운지 사지가 크고, 덩치도 꽤나 크다. 한니발의 대략 6.2배 정도. 아무리 한니발이 새끼고양이 크기라곤 하지만, 아무래도 이 하츠히코라는 고양이는 너무 거대한 기분이 든다.
(...나는 정말 이 고양이랑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까?)
라면서 진지하게 한니발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히로인가... 생각했는데 들어온 건 동생이었다. 소파에 앉아 손에 들고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펼치고 읽기 시작한다.
(닮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군)
한니발은 하츠히코에게서 눈을 돌려 후미카를 본다. 언제 봐도 긴장감 업ㅄ는 얼굴을 한 히로와는 다르게, 후미카ㅏ는 지금도 날이 선 기운을 발산하고잇다. 한니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찬찬히 그녀를 관찰한다. 이목구비는 언니랑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비슷한데, 얼굴에 띄운 표정은 너무나도 달랐다. 첫인상에서 자매라고 알아채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겠지.
(...큰 병이나 상처를 입은 흔적은 없군... 하지만, 정신쪽이 불안정한걸. 에테르는 흐르지 않지만, 약간 있는 모양이고.. 별로 좋지 않은데)
아무리 언니가 성질을 긁는다 해도, 진심으로 배를 때리는 건 적절하지 못하다고 한니발은 일반상식에 호소한다. 오늘 아침 만났을 뿐인 한니발과 달리, 후미카는 태어났을 때부터 히로랑 어울려있었으니까, 아마 분노가 축적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동시에, 히로와 어울리면서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배웠을 터였다. 적어도 그녀들의 부모는, 히로를 대하면서 화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화내고 싶은 기분은 알겠지만, 그건 때리거나 화낸다고 개선될 레벨의 문제가 아니야... 무시하는 것도 기억하는 편이 좋아)
라고, 충고를 건내보는 한니발이다. 후미카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그리고, 육친을 때리는 행동은 그리 좋지 않아. 아무리 피가 이어졌다고는 해도, 살의를 품는 경우도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때려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확실히 에토우 히로라는 인물에는 꽤나 문제가 있어. 하지만, 때리고 싶어진다기보다는 어이없어하거나, 비웃고 싶어지는 인물이지 않아? ...난 대부분 어이없어하는 편이지만. 하지만 폭력에 의지한다면 적어도 아프지 않은 물건... 샌드백이라도 때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일반 가정에 샌드백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사이좋게 지내라고는 안 해. 하지만, 너무 싸우지 않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두는 편이 좋아)
긴고 긴 이야기를 건넨 이유는, 딱히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다. 영적물질 결합체인 한니발의 모습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수는 없더라도, '저곳에 무언가 있다'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는 전해지지 않더라도, 표명만은 해둬야지. 한니발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자신은.
그녀가 싫어하는 언니를, 언젠가 죽여버릴 테니까.
그 때,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하루씨ㅡ! ...아, 후쨩이다. 나 잠깐 남구까지 나갔다 올게. 점심까지는 제대로 돌아올테니까, 걱정하지마"
큰 소리로 외치는 히로에게, 한니발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몸을 던져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굉장히 재밌다는 시선을 보낸 히로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걱정따윈 안 한다고"
후미카가 딱 잘라 말한다. 시선은 신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 그럼 안심하고 있어. 미아는 안 될테니까, 분명.... 아, 너무 가까이서 신문 읽으면 눈 나빠져ㅡ"
다녀와, 라는 말을 동생에게 듣지 못한 채, 대신 하츠히코의 '니아앙'하는 울음소리를 들으며ㅓ 히로는 거실을 나선다.
(...아무래도 너희들 자매 사이가 너무 험악한데)
어깨에 올라서서 자신을 만져보려고 헛수고를 하는 히로에게, 한니발이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건다
"그래? 후쨩은 나를 싫어하지만, 딱히 사이가 나쁜 건 아닌걸?"
(싫어한다는 건 사이가 나쁘다는 거랑 같은 의미 아닌가?)
"에ㅡ 아니야. 나는 후쨩이 좋은걸. 내가 후쨩을 싫어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험악한 관계가 되겠지만"
그런가, 라며 한니발은 신발끈을 묶는 히로의 손을 본다. 뭔가 매듭이 엉망진창으로 묶이는 것처럼 보인다.
"아, 모델건, 벨트에 꽂아둔 채였어. 쭈그렸을 때 배가 아파서 뭔가 했네"
...서투른 데다가 둔감한 모양이다.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한니발이었다.
그런 한니발을 어깨 위에 태우고, 에토우 히로는 이 아스트라M44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다락방의 자기 방에 둔다. 그게 가장 낫겠지. 짐이 늘어나서 무거운 총은, 손수건이나 종이와 다르게 평소에 가지고 다녀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신발을 다시 벗고 방으로 돌아가 또다시 신발을 신어야 한다.
이게 등교할 때였다면, 히로는 망설임없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지금, 현관 밖에는 아케미가 있다. 그녀를 기다리게 하기는 싫었다. 학교는 기다려주지 않지만, 아케미는 히로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히로는 코트 단추를 잠구며 아스트라M44를 보이지 않도록 했다. 아무리 모델건이라곤 해도, 이런 물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걸어갈 수는 없다.
그런 히로의 행동을 보고 한니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행동은, 한니발에게 있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슬프기도 했으니까.
***
'남구까지 간다'라는 말은, 이 동네에서는 '쇼핑하러 간다'는 의미로 쓰인다. 에토우네나 오치아이네 집이 있는 곳은 역의 북쪽 출구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주택가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상점가는 남쪽 입구에 넓게 자리잡은 상점가다. 그녀들이 선로를 넘어 남구로 가는 수단은 지하도, 철도 건널목, 철교의 3종류다. 역을 통해 넘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역에서 가끔 열리는 전시회가 보고 싶다'라던지, '역 앞에 가게에 간다'하는 확고한 이유가 없는 한 그다지 가지 않는다.
거리적으로 가까운 곳은 지하도지만, 히로가 좋아하는 건 철교다. 선로 위에 세워진 다리 위에서는 전차가 보이는데다가, 별로 번성하지 않은 유료 낚시터도 보인다. 2학년이었을 때 왼손을 삐어서 신세진 접골원 앞을 지나갈 수도 있고, 아침일찍이라면 두부를 만드는 중인 두부가게의 풍경도 볼 수 있다.
"...철로 건널목까지 가기보단 낫지만, 정말 너는 멀리 빙 돌아가기를 좋아하는구나"
아케미는 길가 구석에 몰아둔 자그마한 눈의 산을 차면서, 히로는 선로 안에 남아있는 눈의 새하얌을 체크하면서, 한쪽은 팔팔하게, 한쪽은 느긋하게 걷는다.
"멀리 빙 돌아가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철교가 좋은 거야. 철로 건널목이 멀지만, 건널목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걸"
"너, 설마 등교할 때도 철교로 다니진 않았겠지"
"등교할 때는 서두르니까 제대로 지하도를 쓴다구"
"서둘러서 그만큼이나 지각하냐..."
기막혀하면서도 언제나의 일인지라 화내지도 않고 대답하는 아케미와, 언제나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걷는 히로. 두사람만의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히로의 어깨 위에는 고양이가 있다. 하지만 그건 아케미에게는 보이지 않고, 이따금씩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히로는 이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여기 한니발이 있는데, 아케미에게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기 옷쨩, 내 어깨 위에 하루 씨라는 귀여운 고양이가 있어. 그치만 엄마한테도 후쨩한테도 보이지 않아. 옷쨩한테도 안 보여?"
...그런 건 물어보지 않는 편이 좋다. 바보를 뛰어넘어 머리가 이상하다고 생각될테니까. 한니발이 외출하기 전에 그런 충고를 했지만, 히로는 역시 아케미에게 물어보고 만다. 한니발이 여기에서 뭐라고 말하면 히로는 분명히 대답해버릴 테니까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히로는 '자기 어깨에 말을 거는 머리 이상한 아이'가 되버린다. 그렇게 된다면 한니발은 별로 난처하지 않지만, 히로는 난처할테지... 아마도.
하지만 히로는 열심히, 아케미에게 한니발의 생김새를 설명한다.
"...그래서, 좀 나이들어보인달까 사정이 있어보인달까, 뭐 아무튼 그런 고양이야, 하루 씨는"
히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관자놀이를 누르던 아케미는, 일단 히로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어본다.
"아"
히로의 눈에는, 한니발의 몸을 돌파한 아케미의 손이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케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여기에 고양이가 있다고?"
"응,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하루 씨의 목소리는 나한테밖에 들리지 않지만"
아케미는 몇 번이나 히로의 어깨를 두들기고, 그럴 때마다 히로는 '아', '아', '아' 하고 소리를 낸다. 왠지 한니발이 두들겨맞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있다고?"
"...응"
아케미는 눈썹을 치켜뜨곤, 이어서 히로와 어깨를 번갈아가며 노려본 다음, 뭔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뻐끔거렸으나,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히로의 어깨에서 손을 뗀다.
"히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아"
"왜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고 말하면, 병원에 끌려가니까"
"그래?"
"그래. 너 병원 싫지?"
"병원 사람들은 싫지 않지만, 병원에 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걱정하는 부모님과 화내는 동생. 히로가 병원에 가는 사태가 발생하면, 반드시 이 두가지 사항이 발생하므로 별로 가기 싫다. 게다가 병원 특유의 냄새가 싫다. 입원하고 돌아올 때, 고양이들이 수상하다는 듯이 냄새를 맡고 도망가버리고. 잠시동안 같이 자주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가지 않았으니까, 별로 가기 싫은걸"
"그렇다면 너한테밖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던가 그런 말은 하지 마. 어쨌든, 제대로 귀여워해주라구"
"...그래? 그럼 그렇게 할게. 그렇게 됐으니까, 이제 하루 씨를 소개하려는 건 그만둘게. 미안해, 하루 씨. 그 대신 내가 열심히 할테니까ㅡ"
자기한테 말을 거는 히로에게 한숨을 쉬면서도, 한니발은 오치아이 아케미라는 친구에게 내심 감사했다.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못하게 해준 것 만으로 충분하다. 사람 앞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더욱 좋겠지만.
회화의 주제가 한니발에서 겨울방학 숙제로 옮겨갔기에, 한니발은 히로의 어깨에 얌전히 엎드려 눈을 감았다. 이렇게 자신이 얌전히 있으면, 히로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지 않겠지.
하지만 철교 아래에 도착했을 때, 한니발은 눈을 뜨진 않았지만 꼬리를 빠짝 곤두새웠다.
"아, 계단에 눈이 다 청소되어있어"
"한가한 사람도 많구나"
철교를 건너기 위해 반드시 올라가야하는 그 계단은, 소형 자동차가 어거지로 비집고 들어가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폭이 있으며, 계단도 꽤 많다. 끄트머리에 쓸여있는 눈의 양을 보면, 엄청난 노력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 한 걸까"
"글쎄. 전혀 쌓여있지 않으니까 눈이 그치고나서 했겠지만, 이 계단에 눈이 쌓여있는 모습이 엄청 싫었나보네. ...자, 빨리 가자"
눈 청소를 좋아하는 히로가 감탄하고있는 사이, 아케미는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간다. 아케미가 걸어가는 계단의 높이를 보면 한 칸씩 올라가는 편이 나을텐데, 아케미는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두 칸씩 올라가는 사람이다.
그런 아케미를 올려보면서, 히로는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한니발이 눈을 뜨고 잘려나간 귀를 움직인다.
(...한가지 묻고 싶은데. 이 근처에서 불행하게 죽은 인간이 있나?)
"으앙?"
그건 너무나도 갑작스런 질문이지만, 히로는 바로 한니발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히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뭐든 반사적으로 대답해버린다'라고 하는, 지극히 단순한 사고회로의 주인이었다.
"불행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름방학에 이 다리 위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있어"
(사람이 죽기에는 높이가 부족하게 보이는데)
"그런 말 하더라도, 나는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걸"
(...그렇겠지... 빨리 계단을 올라가지 않을래?)
눈치채고보니, 벌써 아케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히로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
나는 타산적이다. 그녀가 어리석다는 사실에 한탄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굉장히 형편 좋은 인물임에 눈치채고 말았다.
딱히 그녀에게 모든것을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이해시키면 귀찮아진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뭔가 요구받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어째서'라고 묻지 않고 응해주는 모양이다.
왜 갑자기 죽은 사람이 나왔는지 물어보는가. 어째서 계단을 빨리 올라가라고 부탁하는가.
그 이유를, 그녀는 묻지 않는다.
...그렇다, 이건 나에게 있어서 기뻐해야할 일이 아닌가. 그녀가 어리석다면, 그걸 이용하면 된다. 지금까지도 여러 인간들을 이용해왔다. 지금부터도 그렇게 하면 된다.
어째서 그 사실을 금방 알아채지 못했을까. 남녀노소 모두 이용해왔으니까, 그녀가 어린애든 뭐든 상관할 바 아니다. 애초에 나한테 양심같은 게 남아있을까?
...아아
내가 이용해온 녀석들은, 나를 이용하려고 했던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 다소 문제는 있지만, 나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내준다. ...다르다. 내 외견이 고양이니까, 나한테 호의를 보내는 거다. 나의 외견이 바퀴벌레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터.
고양이, 인가.
................
나의 관계 성립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봐라, 내 탓에 질나쁜 녀석들이 다가왔다.
자, 어떡할까? 너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구?
***
아케미가 이미 다리를 건너갔다고 생각했지만, 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멈춰서있었다.
"아, 기다려줬구..."
참방, 하는 물소리와, 초콜렛이랑 된장이 약간 섞인듯한 냄새가, 동시에 히로의 청각과 후각을 자극한다.
콘크리트 위에 널부러진 그것 탓에, 아케미의 갈색 고무장화가 더러워져있는 것을 봤을 때, 히로는 '옷쨩이 토했다'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괜찮아, 라고 묻지 않는다. 무슨일이야, 라고도 묻지 않는다. 그저 히로는 아케미의 등 뒤로 다가가, 그 등을 살짝 매만진다. 도중에 아케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히로는 조용히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했다.
히로가 함께 웅크리고 앉았을 때, 아케미가 몸을 크게 떨면서 제 2파가 왔다. 이번엔 투명한 위액과 타액이 대반이고, 내용물은 거의 없었다. 히로는 쏟아낸 토사물을 보고, 아케미의 아침밥이 밥과 된장국과 어떤 반찬인지 이해했다. 보고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지만, 달리 어디를 봐야할지 몰랐다.
단지, 아케미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다. 후미카다.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가방을 등에 짊어진 채로 후미카가 정원에 웅크리고 있길래, '무슨일이야?'라고 물어보면서 정면을 봤더니, 눈물과 콧물과 침을 흘리며 정강이에 주먹펀치를 날려왔다.
"...옷쨩"
이름을 부르며 등을 문지르는 일 외에, 뭘 할 수 있을까. 히로는 자기 친구가 갑자기 토하고있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을 보는 일이야)
한니발이 어느샌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이동해있었다. 하지만 히로는 그런 일을 신경쓰지도 못하고 한니발이 말하는대로 앞을 본다.
"...어라"
다리 위에는 아무도 없다. 양 옆으로 치워진 눈과 노출된 콘크리트, 나름대로 높은 울타리. 다리를 구축하는 물건 외에는, 자신과 아케미와 한니발밖에 없는 다리 위.
그런데도, 뭔가 있다.
뭘까, 이 느낌은.
보이지 않는데, 뭔가 있는듯한 기분. 밤에 눈을 뜨니 뭔가 있는듯한 느낌에 불을 켜보니 천장이 바퀴벌레가 있었다, 그런 감각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뭔가 있다. 그건 알겠다. 하지만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싫은 느낌이다아, 라고 히로는 생각했다.
(...아직 너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한니발의 털이 곤두서있다. 유령이라도 역시 고양이구나, 라고 히로는 냉정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뭐가?"
(나랑 네 눈 앞에 있어. ...익숙해지면 보이게 되고 목소리도 들리게 되겠지만)
"...유령이라도 있어?"
한니발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히로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그녀의 후방으로 물러선다.
무슨 일이야, 라고 물어보려던 때, 아케미가 기묘한 신음소리를 냈다. 등 뒤에서 보고있던 히로에게는, 발치에 흩어진 토사물 위로 아케미의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봤다. 토한 걸 보자니 토하고 싶은데, 더 이상 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그저 입을 벌리고 목을 울리면서 침을 흘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히로의 경험상, 그건 평범하게 토하는 것보다 괴롭다.
"오"
의미없이 이름을 부르려던 히로는, 입을 닫았다. ...뭔가, 배 근처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 난다. 딱히 아프거나 가렵지는 않다. 후미카의 주먹펀치 위력의 천분의 일 정도 느낌이려나.
(...기분 나빠?)
뒤에서 한니발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고 대답하려 했지만, 아케미의 등에서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손을 떼면, 아케미가 더 괴로워할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히로는 앞을 본 채로 '응'이라고 대답한다.
(해결하는 방법은 있지만, 해볼래?)
뭘 해결해야 할지. 아케미의 토악지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걸까. 이 콕콕 찌르는 느낌이 없어지는 걸까.
(둘 다야)
그건 좋은 일이다, 라고 히로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한니발이 대답한 걸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건 나중에 생각해)
그럼, 그렇게 하자.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될까
(간단해. 네 벨트에 꽂혀있는 그 총으로, 앞을 겨누고 방아쇠를 있는 힘껏 당기면 돼)
그건 간단하다.
히로는 오른손으로 아케미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일어나, 왼손으로 아스트라M44를 쥔다
***
커다란 손잡이는 그녀의 작은 손에 꽉 찰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그걸 처음 잡았을 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쏘면 된다. 한 번 쏘면, 그 다음은 눈사태와 같다. 무너져내면서 쓸려간다. 그 사태가, 어떤 일이던간에.
문제는, 그녀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느냐 없느냐다. 더블액션이기 때문에 그냥 있어도 방아쇠가 무겁다. 게다가, 탄알은 예전에 쓰던 사람 것이다. 방아쇠를 당긴다 하더라도, 해머에 전해지는 힘은 원래 물건보다 떨어질 터. 탄이 얼만큼이나 날아갈지도 의심된다.
설사 쏜다 하더라도, 그게 '표적'에 맞을지 어떨지. ...뭐 어차피 보이지 않으니까 '노린다'는 건 무리겠지. 지금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대구경 아르케부스를 한 손으로 쏘려하는 어리석은 짓도 주의하지 않는다.
왼손을 앞에 똑바로 두고, 망양하는 눈으로 앞을 보는 에토우 히로의 모습이 그저 보인다.
모양도 뭣도 아닌, 앞뒤도 전혀 보지 않는, 어디를 노리고 어디를 쏴야하는지도 모르는, 그 초보자의 옆모습이.
그녀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린다.
그리고, 나는 경악했다.
있는 힘껏 당기면 돼, 그렇게 한니발이 말했다. 그러니까 히로는 정말로 온몸의 힘을 담아 방아쇠를 당겼는데, 간단하게 방아쇠가 끝까지 당겨져서 굉장히 맥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당길 때보다도, 당긴 다음이 아팠다.
과앙,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겨울용 스웨터를 벗을 때 자주 있는 정전기가 찌릿찌릿하는 느낌이 왼팔에 전해져서, 히로는 무심코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와, 깜짝놀랐네..."
정말로 깜짝놀랐다. 이런 깜짝놀란 건 하츠히코가 주방에서 나온 바퀴벌레를 잡아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아케미가 중요하다. 뒷걸음치는 바람에 아케미의 등에서 손이 떼어져버려서, 히로는 당황해 다시 아케미의 등에 손을 댄다.
"옷쨩..."
"...기분 나빠..."
그리 큰 침묵은 없었는데, 히로는 오랜만에 아케미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아아, 내가 먹은 아침밥이 이런 꼴이 되버린 모양을 보는 건 괴로운데..."
티슈로 입 주변을 닦고, 아케미는 일어서서 히로를 돌아본다.
"미안해, 히로. 깜짝놀랐지? ...나도 깜짝놀랐지만"
"응, 깜짝놀랐어. 괜찮아? 기분 나빠?"
아케미의 낯빛이 기분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히로가 전혀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앞을 보려하지 않고, 그렇다고 아래를 향하지도 않고, 시선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이건, 아케미가 '기분 나쁠 때'의 행동이다.
"...뭔가,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응... 아아, 오늘 쇼핑은 그만두고 돌아가자"
"...미안"
그것만 말하고 아케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단을 달려 내려가버렸다. 그 뒷모습에 히로는 '이건 내가 치울테니까 안심해ㅡ'라고 소리쳤지만, 아케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버렸다.
(...넌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약간 미묘한 대응인걸...)
히로의 오른쪽 어깨로 올라오면서, 한니발이 내심 생각하던 말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을 했다.
"미묘? 뭐가?"
(...갑자기 친구 앞에서 토해버리는 추태를 보였다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겠지, 지금 당장이라도 혼자가 되고 싶어하는 친구에게 '돌아가자'라는 건 잘했어. 하지만, 그 다음이 살짝 모자라군)
"하아...."
히로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제서야 왼손에 총을 쥐고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일단 원래대로 벨트에 꽂는다.
"...뭔지 잘 모르겠는걸. 이거, 뭔가 총알이 나가는 거야? 굉장한 소리가 나서 조금 놀랐는데"
(그 뿐?)
"뭐가?"
(그 총을 쏜 감상 말이야)
"응. ...아, 배에 살짝 따끔따끔한 느낌이 사라졌어. 정말 이걸 쏘니까 해결되는구나. 굉장한걸ㅡ 이거. 역시 아빠의 선물! 이렇게 도움되는 물건은 자명종 시계 이후로 처음이야"
(...칭찬하는 건지 뭔지, 애매하군)
***
나는 내심 생각하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리석다, 라고 내가 단정지었던 소녀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잠재능력을 지니고있던 모양이다.
그녀라면,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나는 희망을 갖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와 함께 죽자고 생각했다.
***
"하루 씨. 양동이랑 작은 삽이랑... 빗자루랑 쓰래받기가 도움되려나... 아무튼 한 번 돌아가자. 이걸 정리해야지"
(...너, 정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군...)
조금은 이 현상에 의문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담은 한니발의 말에, 히로는 고양이의 몸을 쓰다듬으려하는 것으로 응한다.
"으응, 귀여운걸, 하루 씨는. ...그야, 왜 옷쨩이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이걸 정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한니발은 놓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생각했지?)
왠지 기세좋게 수염과 너덜한 귀와 꼬리를 곤두세우며,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눈도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한니발의 모습에, 히로는 웃고 말았다.
"정말, 하루 씨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유령이구나. 궁금한 게 많이 있으니까, 안심해도 좋다구"
그렇게 말하면서, 히로는 방금 자신이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간다.
오른발을 한 층 내리기 직전, 갑자기 왼발의 감각이 사라졌다.
"아"
왼쪽 허벅지의 힘이 풀린다. 그 사실에 눈치챘을 때는, 이미 히로의 몸이 계단을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히로는 양 팔로 머리를 감싼다. 반사신경이 좋다고 할 수 없는 히로지만, 계단에서 떨어지는 데에는 익숙해져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몸을 보호하는 방법이 몸에 익었다.
하지만 전두부와 후두부, 어디를 중점적으로 짖켜야 하는가에서 히로는 한순간 망설였다. 그런 쓸데없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히로의 후두부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쳤다.
아아, 또 꿰메겠구나. 이 이상 바보가 되버리면 어떡하지. 엄마랑 아빠랑 후쨩이랑 옷쨩이 슬퍼하거나 화낼텐데. 하루 씨는 괜찮을까. 유령이니까, 괜찮겠지만.
한구석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히로는 하얀 하늘이 거멓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
계단에서 떨어진 히로를 본 한니발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녀의 어깨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실체가 없는 한니발은 히로를 물리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에게 가능한 일을 해야만 한다.
...있다. 다리 근처에 있는 전선 위의 까마귀. 겉모습은 보통 새지만, 그 내용물은 한니발과 같은 물질로 구성되어있다. 떨어진 히로와 자신으로부터, 전혀 시선을 떼지 않고 응시하고 있다.
저게 '눈'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자체는 위협되지 않지만, 문제는 '주인'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한니발은 우선 계단에서 웅크리고있는 히로에게 다가갔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언뜻 보기에 충격을 받은 후두부에서 피는 나지 않고 눈에 띄는 외상도 없다. 그건 다행이지만, 의식이 날아가버린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외상은 없더라도 왼발에서 조금이긴 하지만 '유출'이 시작됐다.
(에토우 히로!)
잠시동안 눈을 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히로의 회복력은 빨랐다. 손가락이 지면을 더듬고 있다. 머리가 둔한 만큼, 통각도 둔감한 걸까? 그런 대략 좋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도, 한니발은 한 번 더 그녀의 의식을 불러본다.
(에토우 히로!)
"...................뭔지 잘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선생님"
(난 선생님이 아니야, 한니발이다)
"...........봄이 왔다아............."
(지금은 겨울이야. 아직 눈도 남아있어!)
"....으앙..."
히로는 차가운 콘크리트에 손을 대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눈을 감은 채로, 왼손으로 머리를 문지른다.
"...아아, 피가 안 나네. 다행이다..."
(피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게 나오고 있다구... 왼발을 봐라)
그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왼발을 본 히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왼발 자체에 아픔은 없지만, 어째선지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웅덩이에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축축하게 젖은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걸. 아프지 않은데, 움직여지지 않아"
히로는 바지에 가려져있는 왼쪽 장딴지에 살짝 손을 댄다. 젖어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뜨듯하거나 달라붙지도 않는 그 물이 히로의 손가락 끝에 달라붙어온다.
"이상한 물"
(...그건 물이 아니야. 에테르라고 하지. 빨리 멈추지 않으면)
억지로 한니발의 말을 끊는다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
그런 히로의 말에 한니발은 대답하지 못한 채, 조용히 계단 아래를 내려다본다. 히로도 따라서 그쪽을 본다.
자신과 별로 나이차이가 나지 않는 남자아이가 있다. 기타 케이스를 메고, 어깨에 까마귀를 태우고 있다. 기타 케이스로 보이지만, 정말로 기타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고, 어깨에 태운 새는 어쩌면 까마귀가 아니라 검은 비둘기일지도 모른다. 비둘기 치고는 크게 보이지만
그 소년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히로는 '옆으로 비켜줘야지'라고 생각했다. 멍하니 한가운데를 점령하고있던 자신이 지나가는데 방해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오른발과 양 손을 사용해 앉은 채로 옆으로 이동하려했을 때, 그의 손이 올라왔다.
소년의 손에 있는 게 총이고, 그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히로는 그저
(저 아이의 모자, 따듯해보여서 좋겠다ㅡ)
라고, 전혀 상관없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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