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하치 씨, 나, 충실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 거야"
3월이 앞으로 1주일 정도면 끝나는 봄방학 어느날, 사이토우 헤이하치는 친구인 쿠로다 타케노리에게 그런 선언을 받았다. 헤이하치는 '헤에'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또 이녀석, 묘한 말을 꺼내는군'이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헤이하치와 타케노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다. 4월에는 둘이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질긴 인연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은 이미 결정되어있다. '헤이하치 씨'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도 벌써 10년째다. '헤이하치라고 부르면 사극같잖아'라는 이유로 계속 씨를 붙여서 부르다가 완전히 정착해버려서, 동급생들에게도 '헤이하치 씨'라고 불릴 정도다.
"너, 뭔가 재밌어보이는데?"
헤이하치는 자신보다 약간 키가 큰 친구를 올려본다. 옛날에는 헤이하치가 더 컸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서 추격당하고 말았다. 그 차는 약 3센치 정도지만, 헤이하치에게 있어서 그 3센치는 컸다. 자신이 167센치인데, 타케노리는 170센치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재밌어질 것 같잖아. 너무 기대된다구"
"그렇다고 해서 뭘 지금부터 고등학교 교복 입고 있냐. 그리고 옷 사이즈 좀 다르지 않냐, 그 교복"
뭐가 즐거운지, 헤이하치와 놀고 있는 지금도 타케노리는 4월부터 다닐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 약간 큰 사이즈의 교복은, 타케노리의 몸에 미묘하게 맞지 않아 보였다.
"체육제 날에 체육복으로 학교 가거나, 수영 수업 있는 날에 아침부터 수용복 입고 가는 거랑 비슷한 거야. 사이즈는 이제부터 더 자랄 테니까 지금은 이걸로 됐고. 3학년이 될 때 쯤이면 몸에 딱 맞을걸"
"그러냐... 너 진짜 엄청 기대하나보네"
"엄청 기대된다구. 헤이하치 씨는 안 그래?"
헤이하치는 머리를 긁더니 약간 생각하고 대답했다.
"난 공부가 어려워지지 않을까, 싫은 녀석이랑 같은 반이 되지 않을까, 열받는 선배가 있지 않을까, 선생님이랑 잘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전혀"
헤이하치도 물론, 새로이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이 기대된다. 하지만 이렇게 친구가 들떠서 설레발치는 모습을 보고있다면, 괜시레 부정적인 방면으로 말이 튀어나오고 만다.
후우, 한숨을 쉬는 헤이하치의 등을, 타케노리가 탕탕 두들긴다.
"아프잖아, 고우텐"
'헤이하치 씨'에 대항해 타케노리의 한자를 음독한 '고우텐'이라는 별명은 전혀 유행하지 않고, 지금은 헤이하치밖에 쓰지 않는다
"헤이하치 씨가 너무 네거티브한 거라구. 좀 더 기운차게 가자고, 이제부터 청춘을 즐겨야 하지 않겠어?"
"청춘이라니 너말이지..."
타케노리는 확실히 평소부터 긍정남이었다. 싹싹하고 신경도 잘 써주고, 덧붙여 이목구비도 좋고, 성적도 좋은가 하면 운동도 나름대로 받쳐주는 우등생이다. 꽤나 흠잡을 구석이 없어보이지만, 헤이하치가 보기에는 너무 긍정적이라 가끔 짜증난다.
"역시 만남이란 좋지!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임팩트가 있다면 괜찮으려나"
"무슨 소리야..."
"카라키하마에서 만난 여자애 이야기"
"카라키하마라면, 네가 가끔 우쿨렐라 치러 가는 곳이던가... 근데 너 여자애 얘기라니 별일이네"
"그런가? 그래서, 그 애에 대한 이야긴데..."
여자애들한테 꽤 인기있는 타케노리였지만, '너 인기 많아서 좋겠다'라고 빈정대도 '여자애는 대하기 어려워서 좀 그래'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즐겁다는 듯이 여자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귀엽고 화제도 잘 맞아서 재밌었지. 입학식에 만나면 좋겠는데. 같은 반이 되면 기쁘겠지만"
"그래그래, 만나면 좋겠다 새끼야. 만나면 나한테도 소개시켜줘... 근데, 그 애 이름은 뭐였는데"
"안 물어봤어"
"그건 물어봤어야지"
같은 학교라는 사실을 알았다곤 하나, 이름이 모르면 곤란하지 않을까.
"로망이 없구나 헤이하치 씨. 두 번째 재회에서 이름을 아는 편이 로망이 있다구. 아, 그쪽은 그때... 같은. 상상만으로도 기대된다"
"...뭔 로망이야. 네가 너무 로망이 넘쳐흐르는 거겠지"
어딘가 연극같은 동작으로 로망 따위를 말하는 타케노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더니, 타케노리가 갑자기 '으음'하며 끙끙댄다.
"이번엔 뭐야"
"아니, 내가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던 이유는 로망을 위해서였지만, 그 애는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해서"
"너랑 같이 로망이라도 가졌던 모양이지"
"그런가, 그런건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ㅡ"
"알 게 뭐냐...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
"그래야겠다"
타케노리는 평소보다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꽤나 그 여자애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뭐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방해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헤이하치는 그저 따듯하게 지켜봐주고 싶을 뿐이었다.
"헤이하치 씨, 내각 갑자기 파이프 오르간을 짊어지고 등장하면 웃을 거야?"
헤이하치는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타케노리의 얼굴을 바라본다. 변함없이 기분 좋아보이는 표정인데, 헤이하치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파이프 오르간이라니 교회같은 곳에 있는 그거지... 그건 짊어질 만한 물건도 아니고, 개그포인트도 없잖아"
"응, 나도 웃기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그러면서 타케노리는 웃는다.
그게, 타케노리와 '평범하게' 나눈 마지막 대화였을지도 모른다.
***
4월에 들어서고 몇 일, 헤이하치가 타케노리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면 전파가 닿지 않는다 혹은 전원이 꺼져있다는 메세지만 흘러왔다. 전원을 키지 않았거나 배터리가 다 닳았나 생각해봤지만, 타케노리는 그런 면에서는 빈틈없는 녀석이다.
타케노리네 집에 전화를 걸자 그의 어머니가 받았는데, 그녀는 무서우리만치 시원스럽게,
'아ㅡ 타케노리 있지. 요 일주일 정도 보질 못했네. 뭐 봄방학이니까. 오늘내일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슬슬 학교 시작할 테니까'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어..."
이전부터 타케노리는 '우리집은 방임주의랴'라고 말했고, 그의 집에 놀러가도 얼굴을 비치지 않고 말로만 인사했을 뿐이라 부모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방임주의라곤 하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메모나 무슨 말을 남기지는..."
'없을걸? 그 아이 방을 뒤져본 건 아니지만. 사이토 군은 걱정이 많네. 뭐, 한 달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경찰서 가야겠지'
"한 달이라니, 그건 너무 늦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르잖아요"
위기감이 너무나도 없다.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사건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어머, 그런가? 무슨 일이 있다면 그때는 그때지. 사이토 군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돌아오면 연락 줄테니까. 일부러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럼'
끊긴 전화를 앞에 두고, 헤이하치는 '방임주의에도 정도가 있지!'라고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 그냥 친구일 뿐인 내가 경찰서에 가서 수색 의뢰를 해도 될까. 아니면 타케노리의 어머니가 말했듯이 걱정이 너무 과한 걸까.
"엄마, 잠깐 고우텐 좀 보고 올게"
시간은 오후 6시 정도. 친구 집을 방문하기에는 약간 늦은 시간이지만, 타케노리의 방을 보는 정도는 해도 되겠지. 뭔가 물건이 사라졌다던가, 메모가 남겨져 있다면, 약간은 그의 부모도 행동을 하지 않을까.
"아아, 쿠로다 군 말이지. 빨리 돌아와야 한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헤이하치는 샌달을 신고 핸드폰과 지갑, 자전거 열쇠만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사이토 가족이 사는 단지와 쿠로다네 집까지 거리는 자전거로 15분 정도 걸린다. 해는 이미 져서 완전히 새까매졌지만, 헤이하치는 신경 쓰지 않고 자전거 라이트를 켜고 페달을 밟았다.
그대로 똑바로 타케노리네 집으로 향할까 생각한 헤이하치였으나, 잠깐 멀리 돌아가기로 했다. 타케노리와 했던 대화 중에 자주 나왔던 카라키하마. 가끔 헤이하치가 지나갈 때 타케노리가 마른 나무 위에 앉아서 우쿨렐라를 치고 있었다. '너, 왜 우쿨렐라같은 걸 치는 거야'라는 헤이하치의 질문에, '우쿨렐라가 뭐 어때서'라고 역으로 질문을 받은 기억도 꽤 오래된 일이다. '우쿨렐라는 예능인이 칠 법한 이미지잖아'라고 말했더니, 타케노리가 뭐라고 하면서 웃었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혹시 타케노리가 또 거기서 우쿨렐라라도 치고 있지 않을까. 일주일 전에 사라진 타케노리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헤이하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점으로 페달을 밟았다.
둑 위에서 한 번 멈추고, 카라키하마를 내려다본다. 좁은 모래언덕에 큰 고목, 그리고 검은 바다. 거리의 불빛은 당연히 모래언덕까지 닿지 않고,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밤에는 질 나쁜 녀석들이 몰려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다
(이런 곳에 있다면 고생할 일은 없을텐데...)
헤이하치가 바다를 보면서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는 순간, 해안가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인기척이 나타났다.
"우왓!"
브레이크를 거는 타이밍이 늦어서, 헤이하치의 자전거는 그 사람과 충돌하고 말았다. 마치 전신주에 박은 듯한 충격과 함께, 헤이하치는 자전거째로 자빠지고 말았다.
"...아파..."
"...아~"
고통 탓에 금방 일어서지 못하는 헤이하치의 머리 위에서, 묘하게 늘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긴장감 없는 그 목소리에 삘이 온 헤이하치는, 자전거를 세우는 것도 미루고 일단 일어섰다. 기세 좋게 한마디 하려고 일어났는데, 불빛에 비춰진 상대의 얼굴을 보고 대략 멍해진다.
"...고우텐?"
틀림없이, 헤이하치가 아는 타케노리였다. 하지만, 전신이 젖어있었다. 머리카락부터 입고있는 셔츠나 바지까지,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진다. 꽤 오랫동안 바다에 빠져있기라도 했나, 소금내가 코를 찌른다. 마치 유령같다. 발은 움직이는데 신발은 신지 않았고, 젖은 우쿨렐라를 끌어안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타케노리의 얼굴에는 표정도 없이, 그저 멍하니 헤이하치를 내려본다.
내려본다. 타케노리가 더 키가 크니까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시선의 높이가 3월에 만나서 말했던 때와 달랐다. 이전보다도 몇 센치 더 자란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말랐었던 체격이, 약간 듬직하게 보였다.
"...고우텐... 너, 일주일동안 집에 안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뭐야, 숨어서 근육 트레이닝이라도 했어? 몸집이 좀 커졌는데"
마음을 추스리고 밝은 화제를 꺼내는 헤이하치였으나, 타케노리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이, 고우텐..."
"우아~..."
또 이상하게 늘어지는 소리가, 타케노리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 직후, 타케노리는 왼손으로 자기 목을 잡아 비틀기 시작했다. 목뼈가 무러질 정도로 손가락을 쑤셔넣는 타케노리를 보며, 헤이하치는 당황해서 그의 왼팔을 잡았다.
"....우와"
차가웠다. 젖었다고는 해도, 마치 살아있는 온기가 전혀 없는 그 감촉에 주저하긴 했지만, 헤이하치는 필사적으로 목에서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10초 뒤, 헤이하치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타케노리가 힘을 뺐는지, 목에서 손이 떨어졌다. 직전까지 힘을 넣고 있던 헤이하치는 기세를 타고 두세걸음 뒷걸음질쳤다.
"...안녕"
헤이하치가 자세를 가다듬고있을 때, 타케노리가 겨우 말다운 말을 하며 그의 얼굴을 봤다. 변함없이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눈매는 제대로 돌아와있다.
"어, 어어, 안녕... 괜찮아, 너? 내가 누군지 알겠어?"
타케노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헤이하치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본다. 잠시 뒤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르겠는걸"
이라는 한마디였다.
"모르겠다니 너... 네가 누군지는 알겠어? 이름은?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어?"
죽창이라도 맞아서 의식이 날아갔나 생각해봤지만, 표정은 아무튼 눈동자에는 생기가 넘친다. 헤이하치는 초조해하면서도 연달아 질문했다.
"고우텐, 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건 기억하네. 하지만 그건 나만 부르는 별명이잖아... 제대로 된 이름 있잖아"
"그렇구나"
"그래! 제대로 기억해봐!"
타케노리는 고개를 몇 번 굴리더니 하늘을 올려보며, 다음에는 자기 발을 내려봤다. 그리고 헤이하치의 얼굴을 보더니, 천천히 미소짓는다.
"기억나지 않는걸"
"기억나지 않는다니... 너, 기억상실이냐!?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하라고! 정신차려!"
헤이하치는 타케노리의 홀딱 젖은 멱살을 붙잡고 흔들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정신차리라고 해도, 곤란한걸"
"내가 더 곤란해!"
머리를 쥐어싸고 싶어진 헤이하치였지만, 문득 눈앞에 있는 인물이 타케노리랑 완전 똑같은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타케노리가 행방불명이라는 점이 해결되지 않지만, 친구가 기억상실이라는 가설에서 벗어난다.
"어이, 고우텐. 잠깐 왼손 줘봐"
"자"
순순히 내미는 타케노리의 손을, 헤이하치가 뚫어지게 바라본다. 손바닥의 크기가 꽤나 다른 기분이 들지만, 헤이하치가 주목한 점은 크기가 아닌 검지손가락과 손목이었다. 검지에는 초등학교 시절에 조각칼로 찔린 상처가 있고, 손목에는 들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할퀴어진 자국이 남아있을 터였다.
타케노리가 그 상처를 입던 현장에 있던 헤이하치는 가끔씩 그 일을 기억하며 '어이, 고우텐, 그때 입은 상처 아물었어?'라고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타케노리는 '이거 평생 남지 않을까. 더 멋진 이유로 생긴 상처였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말하며 상처를 보여주곤 했다. 마지막에 봤을 때가 올해 1월이었지만, 상처 크기는 기억하고 있다.
(그 상처가 없다면, 이녀석은 똑같이 생겼을 뿐이지 고우텐이 아니야...)
행방불명은 싫지만, 기억상실도 싫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타케노리의 검지손가락과 손목을 확인한다. 검지손가락 첫마디에 5미리 정도의 상처가, 손목에는 3센치 정도의 하얀 선이 미약하긴 하지만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
헤이하치를 타인 보듯이 보는 이 소년은, 헤이하치가 잘 아는 쿠로다 타케노리였다.
"...너, 정말로 고우텐이냐..."
쇼크먹은 헤이하치를, 타케노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내려본다.
"그런가?"
"그런가, 라니... 이상한 곳에서 시치미 떼지 말라고, 젠장"
9년 동안의 추억이, 타케노리에게서 전부 빠져나가버렸다. 즐거웠던 일도, 슬펐던 일도.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한다. ...하지만, 정말로 큰일은 지금부터다. 기력을 내 일어나 눈물을 삼키고, 헤이하치는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세웠다. 앞이 약간 찌그러졌고 라이트가 깨진 모습이 눈에 보였지만, 지금은 잊기로 했다.
"일단 너네 집으로 가자... 네 어머니도 걱정... 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제대로 돌아가야지"
"돌아가... 그런가, 이것의 집에 가야 하는거나"
"이거라니 뭐야... 그야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이잖아. 데려다 줄게"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야... 뒤에 타"
헤이하치는 자전거 뒷부분을 가르켰지만, 타케노리는 멀뚱멀뚱 보기만 할 뿐이었다.
"설마 자전거 타는 법도 까먹었어?"
"아니, 본능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타면 찌그러질걸"
"그럴 리 없잖아... 하지만 뭐, 불빛도 없는데 둘이 타는 모습을 경찰이 본다면 주의받겠지, 그만둘까... 그럼 가자"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헤이하치의 뒷모습을, 타케노리가 괜시레 멀뚱멀뚱 보고 있다
"너, 어디 아프냐, 아니면 지쳤어?"
"...아니, 좀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네 이름"
설마, 타케노리가 이름을 물어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착찹해지는 자신을 위로라도 하듯이, 헤이하치는 가슴을 팡팡 치며 대답한다
"헤이하치야, 사이토 헤이하치"
"고마워, 잘 부탁해 사이토 헤이하치"
"풀네임으로 부르지 마... 우리 사이에"
"알았어, 헤이하치. 친한 사이에는 이름으로 부르는 거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름으로 부르자, 헤이하치는 세삼스럽게 타케노리가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고 통감했다. 긴 시간 '헤이하치 씨'라고 불리다가 '같은 나이인데 씨를 붙이면 이상하잖아'라고 했지만, 이런 일을 계기로 씨를 떼게 되다니.
"내 이름은 고우텐같은데, 언젠가 너에게 진짜 이름을 댈 수 있다면 좋겠네"
"...고우텐은 별명이야. 쿠로다 타케노리라구, 너눈... 그리고 기억상실이 되면 1인칭도 바뀌게 되는 거냐?"***
*** 진짜 타케노리는 1인칭으로 俺(오레)를 쓰지만 범고래는 1인칭으로 僕(보쿠)를 씀
나중에 이 1인칭으로 떡밥 뿌릴텐데 으어떻게 한국어로 바꾸기가 으어렵다 그냥 쓸게 ㅠ
헤이하치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타케노리가 살짝 고개를 갸웃한다.
"1인칭... 아, 나라던가 저라던가 이몸이나 본좌같은?"
"그런 이상한 단어가 나오는 모습은 너다운데... 너, 자기자신을 나(俺)라고 말했다고. 갑자기 나(僕)라니, 기분나빠"
"나(私)가 가장 범용성이 높은 기분이 드는데, 나(俺) 쪽이 더 친근함이 들기 쉽다고 생각해서. 고치는 편이 나을까?"
"범용성같은 소리 하지 말라구, 멍청아. 기억이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고쳐질테니 억지로 바꿀 필요는 없어"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간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헤이하치로서는 화제를 제공하고 싶었지만, 기억을 잃은 타케노리에게 어떤 화제를 꺼내야할지 잘 몰랐다.
"...야, 고우텐. 너 왜 그렇게 젖었냐? 우쿨렐라까지 젖어버렸고, 그거 고장난 거 아니야?"
일단 신경쓰이는 점을 물어본다. 우쿨렐라를 가진 채로 수영이라도 한 것일까.
"젖은 건 바다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이건 우쿨렐라라고 하는구나. 곁에 있길래 무심코 가져왔어"
"바다에서 왔다니... 너 바다에 빠지기라도 했어? 우쿨렐라도 까먹고? 그렇게나 연습했던 주제에"
"그렇구나"
"그래..."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서, 점점 슬퍼진다.
"너, 고등학교 생활을 그렇게나 기대했는데... 이제 입학식도 다가오고 있다구... 이래선 학교에 갈 수나 있겠냐"
"아아... 학교? 그렇지, 학교는... 가고 싶은걸, 응. 엄청 가고 싶어"
학교라는 단어에 강하게 반응하는 타케노리에게, 헤이하치는 이전의 그를 떠올린다. 타케노리는 이상할만치 학교를 좋아하고, 장기휴일이 되면 '학교 가고 싶다아 빨리 개교하면 좋겠다'라면서 개소리를 지껄였다.
"학교 좋아하는 점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지만, 학교보다 병원을 가는 편이 먼저겠는걸"
기억이 없는 채로 학교에 간다한들 제대로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다. 애초에 타케노리는 어느정도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자기자신에 관한 기억만 잃어버린 걸까. 이에 관한 일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병원은, 몸상태가 대략 좋지 않은 생물체가 가는 곳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난 그런 곳은 없는걸. 그보다는 학교에 가고 싶어"
"생물체라니 너 그런 이상한 말 쓰지 말라구. 몸은 건강하지만, 정신적으로 위험하잖아. 기억이 없으니까"
"그런가?"
"그런가, 가 아니라고... 이런 이상한 점은 미묘하게 굉장히 고우텐답지만"
역시 뿌리는 타케노리다. 헤이하치는 응, 응 하며 끄덕이더니 타케노리의 발치를 확인하면서 앞서간다.
"헤이하치"
"뭐야... 너한테 그렇게 불리니까 역시 이상한걸"
"미안"
"왜 사과해"
"내가, 네가 알고있는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이 아니라서, 미안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망설임이, 타케노리에게 그런 말을 하게끔 만들었다. 헤이하치는 그렇게 느꼈다. 자신만큼은 적어도 타케노리를 믿어주자. 헤이하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
다음날, 헤이하치는 점심을 먹고 쿠로다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타케노리의 핸드폰은 변함없이 연결되지 않는다. 그 물에 빠진 꼴을 보니, 핸드폰도 망가졌겠지. 어젯밤은 타케노리를 보내주고, 고맙다고 말하는 그의 어머니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금방 돌아갔다. 하룻밤 잤더니 기억이 돌아왔을지도 몰라, 그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소소한 바램을 품으며 통화음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혹시 어쩌면, 병원에 갔을지도 모른다. 밤에 다시 걸까 생각할 무렵, 핸드폰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어, 고우텐. 전화받을 때에는 여보세요지"
'아 헤이하치, 여보세요'
"순서가 바뀌었잖아"
타케노리의 목소리는, 건강해보였다. 하지만 변함없이 기억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병원이라도 갔나 생각했어. 그래서, 너네 부모님은 뭐라셔"
'노동하러 떠났어. 꽤 어려운 작업같은걸, 사람들의 사회라는 녀석은'
"어렵다니...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잃어버린 기억에 관해서야"
'아아, 아빠라는 사람은 경찰들에게 폐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어. 엄마라는 사람은 어디 갈 때 한마디정도 말은 하라고 했고'
"...뭐야 그게"
방임주의가 도를 넘었다. 생각해보면 타케노리의 입에서 부모에 관한 화제는 '우리집은 방임주의' 이외에 나온 적이 없다. 수업 참관에도 3자 면담에도, 타케노리의 부모를 본 적이 없다.
처음 안 친구의 가정환경에, 헤이하치는 뭔가 씁쓸해졌다. 자신이 '아빠한테 맞았다', '엄마가 시끄러워'라며 하는 푸념을, 타케노리는 어떤 심정으로 듣고 있었을까
"넌 그걸로 괜찮아?"
타케노리는, 한 번도 쓸쓸한 듯이 있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기억상실이라는 큰 사태에, 큰 의지가 되야 할 부모가 이래서야 마음에 상처만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물어본 헤이하치였지만.
'딱히 문제는 없어'
본인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상한 부분에서 터프하구나 너... 하지만 병원은 가봐. 잘 모르지만, 기억상실의 원인은 상처같은 것보다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게 원인이라고 TV에서 방송되곤 했으니까. 뭐라더라, 카운셀링이라던가? 받아보는 편이 좋아"
'사람들에게 체면이 안 서니까 병원에는 가지 말라고 말하던걸'
"너네 아빠 바보아냐! 그보다 그건 부모가 아니라고! 그딴걸로 부모라고 한다면 우리 부모님은 신이다!"
체면을 신경쓰느라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분개한 헤이하치였으나, 타케노리는 차분하다.
'바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는 나도 가고 싶지 않으니까 괜찮아. ...어째서 헤이하치는 나를 그렇게나 걱정해주는 걸까나'
"...친구니까 그렇지"
'친구'
단어를 반복한 후 타케노리는 침묵에 빠졌지만, 잠시 뒤
'고마워'
라고 짧게 대답했다.
"고맙다고 하지 말라고... 뭐 너네 부모님이 꽤 이상하다는 사실은 알겠어. 그 부분은 적당히 절충할 수밖에 없겠는걸..."
적당히 절충했기 때문에, 그동안 타케노리가 헤이하치에게 한 번도 자기 부모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타케노리는 즐거워 보였고, 괴로운 얼굴은 헤이하치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근데 너, 병원은 안 가도 학교는 갈 거냐"
'가고 싶지. 학교라는 건 젊은 ㅅ람들과 함께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지식을 배우는 곳인 듯 해'
그런 진지한 건가, 로망이네 청춘이네 말하던 너는 어디로 가버렸냐ㅡ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헤이하치였지만
'그녀도 학교에 간다고 말했으니까'
그녀. 타케노리의 그 말을, 헤이하치는 놓치지 않았다.
"그거 너가 지난번에 카라키하마에서 만났다는 여자애 말이야!? 뭔가 기억이라도 났어!?"
해드폰을 꽉 쥐며, 목소리를 크게 낸다.
'기억난 게 아니야. 알고있었을 뿐이지, 처음부터'
"뭐야, 그게...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애초에 말이지, 이름도 가족도 나에 대해서도 잊은 주제에,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던 이름도 모르는 소녀는 잘도 기억하네, 너 걔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조금 열받지만, 그래도 타케노리가 이전 일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하는 건 기쁘다고 생각을 고친다.
'좋아해?'
타케노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헤이하치는 '좋아한다던가 사랑이라는 말도 잊어버렸나'라며 살짝 걱정했다. 그런 설명을 해달라고 하면 곤란하다
"그런 기분은 스스로 어떻게 하라고... 아니 근데 그 상태로 제대로된 학교생활은 보낼 수 있겠냐, 너..."
'노력해볼게'
"노력으로 된다면 고생은 안할텐데. 내일이 벌써 입학식이라고. 어차피 너네 부모는 입학식날에 오지도 않겠지. 장소 확실히 알고 있어?"
헤이하치의 부모님도 입학식에는 오지 않는다. 아빠도 엄마도 일이 있으니까. '입학식에 일을 쉬면서까지 올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했던 자기 말을 떠올리고, 헤이하치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내일 같이 갈까"
'지도 보고 외웠어. 지금도 여러 공부하고 있고. 말도 그렇지만, 글자는 꽤 어려운걸'
그런 기분을 떨치듯이 말한 헤이하치의 제안을, 타케노리는 선뜻 거절했다.
"글자 읽는 법도 까먹은 거야? 더 위험하잖아. 역시 병원 가라"
헤이하치로서는 확실하게 요양하고 학교에 와줬으면 했다.
'헤이하치'
"왜"
'나를 너무 걱정하지 않는 편이, 네 정신위생상 좋지 않을까'
"...너, 사람이 걱정하는데 그런 말은 좀 아니지"
원래, 화내기 쉬운 성격의 헤이하치다. 타케노리의 말에 들고있던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싶어질 정도로 분노를 느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참았다. 타케노리는 아무 기억이 없으니까, 이런 사람 감정을 헤어리지 못하는 말을 하는 거다. 그게 당연하다
어떻게든 전화로 화내기를 참은 헤이하치였지만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난 지금 상태에선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그러셔! 누가 걱정따위 하겠냐, 멍청아!"
전화를 끊은 헤이하치는,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던지려고 팔을 들어올리다가, 잠시 생각에 빠진다. 결국 불쾌한 감정을 집어넣고, 헤이하치는 내일의 입학식을 맞이하게 되버린다.
***
(정말, 신학기 시작하자마자 제대로 된 일이 없네)
날씨는 쾌청하고 아무일도 없었다면 기분 좋은 하루였겠지만, 헤이하치의 마음은 맑지 않다. 어제 전화 이후, 타케노리가 '아까는 미안'이라고 말해준다면 용서해줄 생각이었는데, 아무 연락도 없다는 사실이 점점 열바다는 헤이하치였다.
자신이 이제부터 3년동안 다닐 학교의 교문을 지나면서도, 교정에 핀 벚꽃을 봐도, 이제부터 급우가 될 학생들과 스쳐지나가면서도, 헤이하치의 마음은 좋지 않은 채다.
(내가 사과하기에는 이상하잖아,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하지만 이런 기분으론 고우텐이랑 제대로 대화할 수도 없고, 애초에 그녀석, 기억이 없으니까 내가 도와줘야 하지 않나...)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하면서 반 명부가 붙어있는 게시판 앞으로 왔다.
(아, 고우텐이다)
약간 키가 커지고 체격이 좋아진 타케노리의 모습은 쓸데없이 눈에 띈다. 이전에 봤을 때 사이즈가 맞지 않았던 교복은 그의 체형에 딱 맞게 변해있었다.
타케노리가 굉장히 기분 좋다는 듯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중학교 시절에 알던 사람인지, 아니면 벌써 아는 사람을 만든 건지. 상대를 확인해봤더니 여자였다. 타케노리와 키 차이가 꽤 있는 탓인지, 여자가 올려다보는 상황이다.
(카라키하마에서 만난 여자애가 쟤인가. 그런 게 고우텐 취향이군)
활발하고 밝아보인다. 헤이하치가 그녀에게 품은 첫인상이었다. 지금은 입에 손을 대고 놀란 듯이 타케노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입학식에 갑자기 만나서 깜짝 놀란 걸까. 타케노리가 말하는 로망이란 녀석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 헤이하치. 안녕"
무슨 일인지 주저하고 있었는데, 타케노리가 말을 걸어온다.
"어... 지금은 아침이니까 좋은아침이지"
"아, 그런가. 하루나, 이 사람은 사이토 헤이하치라는 이름이고, 이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의 친구야"
"너, 무슨 설명이 그래"
게다가 막 만난 여자애를 이름으로 부르다니, 타케노리도 꽤나 허물없다. 확실히 타케노리는 그런 프렌드리한 점이 있지만, 여자는 모두 성으로 불렀다. 갑자기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벌써 사이가 좋아진 걸까. 그렇게 생각해서 하루나라고 불린 여자애 쪽을 봤지만,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 그대로였다.
"......어...... 쿠로다......군, 이고, 그 친구인 사이토 군... 하지만, 쿠로다 군은... 그 때 우쿨렐라를 들고 있던 사람이고..."
헤이하치와 타케노리를 번갈아가며 보며, 굉장히 망설이는 듯하게 보였다. 왜일까, 그렇게 자기 첫인상이 좋지 않았을까. 확실히 타케노리에 비교하면 인기는 별로 없었지만, 경계할 만큼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약간 눈이 날카롭다던가, 입이 크다던가, '사이토 군은 사자랑 약간 닮았어'라고 들은 적이 있을 뿐이었다.
"일단 하루나, 나는 편의상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으로 되있는 모양이니까, 그렇게 해석해주면 좋지 않을까. 어때? 말투는 괜찮아? 꽤 힘냈는데"
헤이하치는 왠지 모르게, 하루나가 망설이는 이유를 이해했다. 타케노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헤이하치에게는 잘 몰랐다. 하루나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라서 곤란해하는 거겠지. 그녀가 아는 건, 기억을 잃기 전의 타케노리다. 그녀는 타케노리를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위화감을 품었겠지.
(여기선 내가 뭔가 잘 대처해야... 하지만 솔직히 이녀석 기억상실이라고 말해도 그냥 꺼려질 것 같은데... 일단 처음엔 대충 얼버무리고, 이 애랑 고우텐이 사이 좋아질 지 보는 편이 좋겠군)
어째서 자기한테 여자친구도 없는데 사랑의 큐피트 역할을 해야 하는가. 약간 씁쓸해졌지만, 마음을 가잡고 헤이하치는 하루나 쪽을 본다.
"어, 안녕. 난 사이토 헤이하치라고 하는데, 어, 이녀석은..."
"아, 하루나 찾았다ㅡ 우리들 같은반이잖아! 다행이다ㅡ 같은반이라"
헤이하치가 자기소개를 하려는 찰나, 하루나의 등 뒤에서 갑자기 여학생이 나타나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엄청난 기세였지만, 끌어안은 상대가 하루나보다 몸집이 작은 탓인지, 그녀는 아주 약간 비틀거릴 뿐이었다.
"아, 치토세... 정말, 갑자기 끌어안지 말라니까. 깜짝 놀랐잖아..."
"뭐ㅡ야ㅡ 2주일만에 만난 데다가, 내가 이러는 건 평소대로인걸... 아, 맞아맞아, 너네 엄마, 우리 엄마랑 같이 온대... 어라 근데"
치토세라고 불린 새로 등장한 사람은, 150센치 정도 될까 할만큼 작았다. 일자로 자른 머리카락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헤이하치의 눈에 띄었다. 거북하지 않은 미소를 띄우며 하루나의 겨드랑이 근처에서 얼굴을 빼꼼 내미는 그녀는, 하루나의 눈 앞에 있는 타케노리의 존재를 알아채곤 한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그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재빠르게 시선을 움직인다.
그 직후 치토세가 띄운 건, 그야말로 '능글능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표정이었다. 헤이하치는, 이런 표정을 중학교 시절에 본 기억이 있다. 타케노리나 다른 남학생과 대화할 때, 가끔 동급생 여자들이 이쪽을 보면서 저런 표정으로 '헐ㅡ 역시ㅡ?' 라고 기분나쁘게 웃고 있었다
"하ㅡ루나ㅡ 잠깐 대화좀 해보실까ㅡ 아, 나는 야마야 치토세. 얘랑 같은반이야. 둘만의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입학식 전에 한 번 교실 가야되니까. 너, 몇반이야?
"A반인 모양인데. 난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잘부탁해, 야마야"
웃으며 대답하는 타케노리에게, 치토세는 손을 팔랑팔랑 흔든다
"잘부탁해ㅡ 그럼 나중에 보자ㅡ"
"어, 아, 잠깐, 치토세, 아직..."
하루나가 타케노리 쪽을 신경쓰고 있지만, 치토세는 그런 하루나의 오른팔을 양 팔로 끌어안는다.
"초조해하면 안 된다구ㅡ 천재일우에 전대미문한 일이긴 하지만, 이건 천천히 해야한다구! 찬스는 이제부터 올 거야. 오히려 네가 기세를 잡아야 한다구! 자ㅡ 언제 저렇게 멋진 애랑 알게 됐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실토해내시지! 부끄럼쟁이라고 생각했더니 상상초월 플레이걸이구만 요거!"
하루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질질 끌듯이 사라지는 치토세의 뒷모습을, 헤이하치는 멍하니 바라봤다.
"...나, 절대 저 애 안중에 없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탓이 아니라, 확실했다.
"크기 작으니까, 큰 나한테 초점이 쏠린 게 아닐까?"
"그딴 위로는 필요 없어... 아, 내 반 어딘지 봤어?"
"나랑 같은 A반이야, 잘 부탁해 헤이하치"
"어..."
타케노리의 옆에 서면서, 헤이하치는 '어떻게 화해할까' 고민하던 자신이 바보같아졌다. 타케노리는 어제 일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헤이하치를 내려보고 있다.
"너 왜 웃고있냐"
"적의가 없다는 증명을 하려고"
또 꽤나 바보같은 말을 한다.
"적의 없는 증명따위 안 하더라도 아무도 네가 싸움 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평범하게 있어 평범하게"
"평범하게라니 어떻게?"
"어떻게라니, 이렇게지"
되도록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는 헤이하치의 얼굴을 보고, 타케노리는 미소를 지웠다. 웃지 않고, 화내지도 않는, 타케노리의 '평범'한 표정.
하지만 멍해보이면서도 어딘가 방심없이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마치 경계심 강한 짐승같아 보인다.
"너, 그건 평범이 아니잖아... 좀 더 긴장을 풀라고"
"헤이하치의 얼굴을 흉내내 본 건데"
"내 얼굴은 그런 해태같은 얼굴이 아니야"
"해태? ...아, 절같은 곳에 있는 석상 말이지"
기억을 꺼내듯 입을 열며 중얼거리는 타케노리를, 헤이하치는 '자기 기억을 확인하나보구나'라고 해석했다.
"그거 맞어... 자, 우리들도 슬슬 가자"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헤이하치와 타케노리는 나란히 걸어갔다.
입학식이 시작하기까지, 앞으로 10분 남았다.
***
"자ㅡ 하루나, 들려주실까"
만면에 미소를 띄우면서 말하는 치토세에게, 하루나는 식은땀을 흘린다. 입학식, 담임선생님이나 반 친구들의 자기소개, 자리 정하기, 내일 있을 시간표, 그 외 여러 연락사항, 모두 막힘없이 끝났다. 하지만 하루나는 계속 그라볼라스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교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A반에 가려고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눈앞에는 치토세가 가로막고 있다.
"아아, 치토세... 어, 뭘?"
알고는 있지만, 일단 물어본다
"물론, 그 쿠로다라는 남자애 말이야! 우리 중학교에는 없었잖아. 오늘 갑자기 헌팅당하기라도 했어? 아니면 봄방학 중에 만난 사이?"
치토세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다. ...그러고보니, 이전부터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엄청 좋아했다. 하루나보다 멀쩐한 정신을 가졌고, 여러가지 신경써주는 치토세였지만, 남녀간 화제가 나오면 사람이 변해버린다. 그런 치토세의 기세에 빨려들어갈 듯 하면서도, 하루나는 그에 대해 생각한다.
카라키하마에서 만난 우쿨렐라 소년. 오늘, 만난 건 기쁘다. 하지만 '그'는 그라볼라스라고 이름을 댔다. 그리고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그의 이마 아래에는 그라볼라스의 푸른 빛이 있었다. 이건 대체 어찌된 일일까.
10미터 가까운 체구를 3미터까지 줄였을 때에도, 하루나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그 모습을, 그라볼라스는 너무나도 간단히 '열심히 했다'라며 넘겼다.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그라볼라스는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그 거대한 범고래의 모습에서 '열심히 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한 걸까.
(믿지 못하겠어...)
그리고, 그라볼라스가 어째서 우쿨렐라 소년ㅡ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게 가장 신경쓰였다. 그라볼라스가 겉모습을 참고해서 변신했다, 라면 다행이다. 문제는 어째서 그라볼라스가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인간으로 둔갑해서, 학교에 왔냐는 말이다.
(...진짜 쿠로다 군... 내가 3주 전에 카라키하마에서 만났던, 그 쿠로다 군은 어디에 있는 거야...?)
"잠깐 하루나, 뭘 멍하니 있는 거야. 뭐야, 나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버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 어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니, 치토세!"
자기 생각에 빠져있던 하루나였으나, 우선 이 곳을 벗어나기에 전념하기로 한다. 치토세의 추궁을 적당히 넘기고, 빨리 그라볼라스에게 가야만 한다.
"아니, 저기, 그런 대단한 사이는 아니야. 봄방학에 카라키하마에서 오카리나 불고 있었더니, 우쿨렐라를 들고있는 그 사람이 와서, 잠깐 얘기했을 뿐이야. 그래서, 오늘 만났던 게 두번째고"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인간에게 관해서는, 이게 사실이다. 내용물이 현재는 범고래라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아ㅡ 오카리나 말이지... 그래서, 그가 우쿨렐라? 이상한 취미끼리 만났단 말이구나. 첫만남으로써는 나쁘지 않을지도. 그럼 이제부터 둘만의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
"시작되지 않아, 않으니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오카리나를 떠올리면서, 이상하게 텐션이 높은 치토세에게 태클을 거는 하루나였다. 평소에는 치토세가 태클을 거는 역할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입장이 역전된다.
"뭐야ㅡ 그 쿠로다 군이라는 애 어디가 불만인데. 겉모습은 나쁘지 않기는 커녕 오히려 잘생겼잖아. 키가 너무 크다던가, 약간 골격이나 근육이 맘에 안 들어? 이 사치스러운 녀석. 아, 난 좀 더 가느다란 편이 좋지만. 성격은 모르겠지만, 언뜻 보기에 상냥해보이잖아? 뭐 갑자기 사귀자고 해도 너한테는 약간 허들이 높아 보이니까, 느긋하게 생각하라구. 진부한 말이지만, 일단 친구부터 시작한다고나 할까? 그때부터 천천히 스텝업해가는 것도 즐거움이지. 하지만 역시 고등학교 생활 3년에 걸치는 스토리는 너무 기니까, 크리스마스를 목표로 계획을 세우자. 좀 더 빠른 편이 좋다면 여름방학 메인 계획을 세워도 되고"
대체 뭔 계획을 세운단 말인지. 무서운 기세로 말하는 치토세에게 여러 반론을 하고 싶어지지만, 그러면 치토세의 이야기가 더 길어져버릴 것 같아서 그만뒀다. 하지만 정말로 치토세는 타인의 연애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곤란하다.
어쩌면 치토세는 '덜렁거리고 연애사에 불감한 친구를 위해 뭔가 해주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여기선 원만하게 덮어버리고 싶지만, 적절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일단, 학교 막 시작했을 뿐이고... 공부라던가, 부활동이라던가..."
"숙제도 자주 까먹는 주제에, 이제와서 뭘 진지한 척 하는 거야. 게다가 알바 하고 싶으니까 부활동은 안 한다고 지난번에 말했잖아"
공부도 부활동도 적극적으로 할 생각 없는 하루나로서는 설득력이 없었다.
"반이 다르니까 만날 시간도 별로 없고..."
"아 그래. 그럼 서둘러 폰 번호 교환하라구"
"어ㅡ..."
뭘 해도 치토세는 적극적이다.
"뭐야, 설마 교환일기부터 시작한다던가 그런 소리를 하면 덮쳐버린다. 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둘러싸여서 자란 탓인지 가끔 엄청 낡아빠진 말 하기도 하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하면, 치토세는 화내겠지. 일전에 할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하루나는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할 일을 생각했다.
"괜찮아, 그... 어... 제대로 할테니까, 치토세는 따듯하게 지켜봐주면 괜찮지 않을까ㅡ 계획같은 건, 없어도 되니까! 괜찮으니까!"
뭐가 괜찮은지는 하루나 자신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적당히 말한다.
"정말?"
치토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 하루나는 어떻게든 대답한다.
"아, 아마, 괜찮으니까. 게다가, 봐, 나만 신경쓰지 말고, 치토세도 새로운 만남이라던가..."
"나는 됐어. 막상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할테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인지
"...그래. 일단, 잠시 너한테 맡길테니까. 경과 보고를 제대로 하라구. 그리고, 너무 진전이 없으면 1차 계획을 발동할 테니까, 잘 신경써봐"
"응... 그럼 잠깐 갔다올게"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하루나를, 치토세가 감탄했다는 듯이 본다.
"적극적이라 기쁘구나. 사실은 뒤에서 살짝 지켜보고 싶지만, 역시 자주성은 존중해줘야지! 열심히 하라구! 불안해지면 언제라도 불러줘"
가볍게 끄덕이고, 하루나는 교실을 나간다. 치토세의 추궁에서 도망친 건 다행이다. 사실은 치토세가 생각하는 전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괜찮다'던가 '제대로 한다'던가 해서 대충 넘긴 일이 약간 마음에 걸리지만,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ㅡ쿠로다 타케노리가, 그라볼라스라는 거대한 범고래라는 사실을.
하루나는 복도를 나서 A반으로 시선을 보낸다. 복도에는 이미 하교하기 시작한 학생들이 몇명 있는데, 하루나는 그 중에 쿠로다 타케노리의 뒷모습을 손쉽게 찾아냈다. 키가 큰 그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그의 주변에는 몇몇 남학생이 있고, 뭔가 말하면서 웃는 것처럼 보였다.
타케노리의 옆에는 사이토 헤이하치도 있었는데, 그는 하루나쪽을 보고 뭔가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하루나는 헤이하치가 자신을 보고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타케노리의 등만 바라봤다.
저게, 정말로 그라볼라스일까. 몸도, 입도, 이빨도, 등지느러미도, 가슴지느러미도, 전부 큰데 눈만 작아서 애교있고, 이마에 푸른 수정을 지닌, 영어와 일본어를 말하는 2개국어의 기묘한 범고래.
우쿨렐라의 소년. 키가 크고 가는 몸에,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같은 반이면 좋겠네'라고 말하던 그. 이름이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실은 오늘 알았다.
쿠로다 타케노리이며, 그라볼라스라고 한다.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나는,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남자애들한테 둘러싸여 끼어들기에 주저됐지만, 그게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그의 뒷모습이 이곳과 너무 친숙해보여서, 그라볼라스와 엮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복도 한가운데 멍하니 서있게 된 하루나였는데, 갑자기 타케노리가 뒤돌아봤다. 시선이 맞자, 그는 천천히 웃으며 하루나에게 손을 흔든다.
미소. 굉장히 거북한 미소.
3주 전에 만난 쿠로다 타케노리는, 하루나 앞에서 언제나 미소짓고 있었다. 놀리듯이, 익살맞게, 그리고 뭔가 즐겁다는 듯이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게 없었다. 웃으면서도, 웃지 않는다. 웃는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서 웃고 있다.
그 만들어낸 미소를 하루나에게 향하면서, 그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긴다.
쿠로다 타케노리의 가짜 미소를 띄운 그라볼라스가, 뭔가 정체 모를 공포를 느껴서, 하루나는 다가오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대로 마구 뛰어나간다. '복도에서 달리지 말자'라는 규칙 따위는 머리에서 잊혀졌다.
***
무서웠다. 떨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은 도망쳤다. 하루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뭐가 무서웠을까.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소년을, 하루나는 알고 있다. 그라볼라스라는 범고래를, 하루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무서웠다. 양자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런데도, 동일존재로써 하루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진실은 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을 한 그라볼라스에게. 그라볼라스는 '편의상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고 했다. 하루나는 그 말을 어찌 해석하면 좋을지 망설였다.
스스로 여러 상상을 해본다. ...어떤 결과도 제대로 된 결과가 아니었다.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하루나는 카라키하마가 보이는 장소에 있었다. 자전거를 멈추고, 둑 위에서 바다와 약간 더러워진 모래언덕을 바라본다. 개를 데려온 누군가와,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부모자식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뿐이다.
생각해보면, 여기서 그라볼라스와 만났던 일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아니, 3주 전에 쿠로다 타케노리와 만났던 일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르겠다.
"하루나아아아! 안녀어어어어엉!"
쓸데없이 큰 소리로 이름이 불렸다. 돌아봤더니 둑 위를 걷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좀 멀어보였지만, 그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도망쳐선 안 된다.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하루나는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금방이라도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억누른다.
"안녕, 하루나"
손이 닿을 듯한 곳까지 걸어온 그ㅡ그라볼라스이며 쿠로다 타케노리는, 다시 한 번 하루나에게 인사했다.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아까까지 보였던 거북한 미소는 없었다.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는, 보통 때의 하루나였다면 넋을 잃고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안녕"
하지만 하루나는, 망설이면서 조용하게 인사를 건냈다.
"아침에는 놀래킨 모양이네. 어때? 겉모습이라면 거의 수컷 사람이지? 내장이나 뼈같은 내용물은 아직 사람이 아니지만. 굉장히 힘냈다구"
그렇게 말하는 그는, 굉장히 자랑스럽다는 듯이 보여서 마치 하루나에게 자랑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말투는 하루나가 알고있던 쿠로다 타케노리가 아니라, 그라볼라스랑 똑같았다.
"저기... 너, 정말로, 범고래 그라... 야?"
"그럼"
망설이며 질문하는 하루나에게, 바로 긍정해버리며 그ㅡ그라볼라스가 대답했다.
"나도 못알아볼 정도로 사람이랑 똑같지.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이제 뇌나 내장까지 필요최저한으로 줄였으니까. 피부는 이 이상 깎이지 않고, 뼈나 근육도 잔뜩 줄였다구. 남은 부분에서 사람 외관처럼 보이도록 약간씩 모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큰일이었지"
줄인다, 깎는다, 만든다. 그런 끔찍한 말을 타케노리의 입으로 말하는 그라볼라스였다.
"하지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야. 열심히 해서 가능한 거니까"
놀란다. 확실히 그라볼라스가 인간이 되서 놀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하루나가 곤란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
그걸 물어보기가 무섭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서는 더욱 무섭다. 그래서 하루나는 물어본다.
"...어째서, 그라는,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먹었으니까"
정말로, 손쉽게, 태연하게. 그라볼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그것이었다.
먹었다. 그라볼라스가, 타케노리를.
하루나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떤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라볼라스는 말을 계속한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유전자 정보라는 녀석? 그걸 흡수했지. 입 속에서 잘게잘게 부숴서 소화하는 과정에서 위나 장으로 가는 것들을 전부 뇌로 전송하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어. 하지만 외견적 특징은 둘째치고, 크기가 꽤 달랐단 말이지. 무게가 꽤 다를 거야. 350키로 정도려나. 원래 사람 체중이 100도 되지 않는데, 이건 너무 무겁겠지. 뼈의 두께나 근육 량이 한계까지 줄여봤지만"
그라볼라스는, 굉장히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굉장한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자랑하며, 인정받고 싶어한다고 하루나는 느꼈다.
"아, 말의 양... 어휘? 그게 좀 많이 늘었어. 뇌 용량이 작아졌더니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성대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처음에는 약간 망설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잘 나온다구. 어때? 나 대단하지. 이 섬에서 헤엄쳐왔을 때 이상으로 힘냈어"
굉장해. 그건 확실히 굉장하다. 하지만 하루나가 깜짝놀란 부분은, 그라볼라스가 얼마나 노력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부분이 아니었다.
"먹었다고... 쿠로다 군을..."
이제야 하루나의 변화를 눈치챈 그라볼라스는, 미소를 지우고 그녀의 얼굴을 살펴본다. 얼굴을 피하는 하루나를 보고,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 오해하고 있구나. 나, 이 섬에 오고나서 생물체를 죽여서 먹은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구? 죽어서 이 근처에 나돌아다니는 생물체밖에 먹지 않았어. 이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이 떨어져서 죽어있길래, 내가 먹은 거야. 죽이지 않았어. 이 세계에서 먹어선 안 되는 것들을 제대로 공부하고 있으니까. 나는 막무가내로 먹어치우는 생물체가 아니야"
죽이지 않았다, 죽어있길래 먹었다. 그라볼라스는 그렇게 말했다. 죽여서 먹기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하루나는 냉정하지 않았다.
죽어버렸다.
그 우쿨렐라를 지닌, 이름을 물어보기도 까먹은 그 상냥한 소년은, 이미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녀석은 그 소년의 모습을 빌린 이상한 범고래다.
정말로 슬플 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하루나는 그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진심으로 슬펐을 때, 잔뜩 울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하루나는 슬픈데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웅크리고, 자기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정리하려 했다. 어째서 울지 못할까. 멍하니 마음 한구석에서 생각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저기, 하루나. 뭔가 말해봐. 대화가 안 되면, 하루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구"
뭘 말하면 좋을까. 그라볼라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스스로 알고 있을까.
"뭔가 모르는 부분 있어?"
"...내가, 그라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쿠로다 타케노리의 시체를 먹었다는 사실을 책망하고 싶은 걸까. 먹은데다가, 본인인 채 하는 모습에 화내고 싶은 걸까. 먹은 사람의 모습이 됐다는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놀라면 좋을까. 타케노리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슬퍼하면 좋을까.
"나는, 하루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전하고 싶은 말도 잔뜩 있는데. 말이란 어렵네. .일본어 잔뜩 공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데, 하루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고, 나도 하루나가 하고 싶은 말을 모르니"
"...나한테, 말하고 싶은 거?"
하루나는 웅크린 얼굴을 느릿느릿 올리고든, 그라볼라스를 본다. 쿠로다 타케노리와 같은 얼굴을 한, 하지만 완전 다른 표정을 한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
하루나가 그라볼라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범고래. 아니, 이건 범고래라는 평범한 해양포유류일 리가 없다.
크기를 자유로이 바꾸고, 말을 쉽게 기억하고, 인간으로 변하기조차 하는 범고래따위, 있을 리가 없다.
"여러가지 있다구. 아, 나도 혹시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걸까? 나는 뭐든 좋으니까, 하루나랑 말하고 싶어"
그라볼라스가 한걸음 하루나에게 다가온다. 하루나는 무심코 반걸음 물러선다. 미묘한 거리다. 둘의 거리는 굉장히 가깝지만, 하루나에게 있어서 그라볼라스는 범고래의 모습을 했을 때보다 훨씬 먼 존재가 되어버렸다.
"저기, 하루나. 내가 어디 무서워? 범고래였을 때보다 이 모습이 훨씬 하루나에게 있어서 친숙할텐데. 실제로 누구든 나를 보고 놀라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다구. 어째서 나를 그렇게 무서워해?"
"...하지만 이상하잖아! 범고래가 말하고, 작아지고, 쿠, 쿠로다 군을... 쿠로다 군을..."
비명에 가까운 하루나의 목소리는 금방 꺼질듯이 작아졌다.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소년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고 생각했더니, 당사자는 이미 죽었고, 그 모습을 빌린 범고래가 있다니.
"그렇게 먹은 게 싫었어? 시체를 먹는 습관은, 이 섬에도 있는데. 아, 하루나와 같은 종족을 먹어서 하루나도 나한테 먹힌다고 생각했나?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구, 아까도 말했잖아. 나는 하루나와 대화하고 싶을 뿐이지, 먹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구"
그건 확실히 들었다. 하지만 하루나를 먹지 않더라도, 다른 것은 실제로 그라볼라스가 먹지 않는가. 쿠로다 타케노리의 시체를 먹었다고, 방금 그가 고백했지 않은가.
가장 처음 만났던 때.
파도에 떠밀려 바다에 빠진 하루나를, 그라볼라스가 구해줬다.
하지만, 그때 혹시 죽었다면.
그라볼라스에게 그 시체를 먹혀버렸을까.
...그리고, 하루나로 둔갑해, 아키츠시마의 집에 들어가고 학교에 갔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점점 의심암귀에 빠지게 된다. 그라볼라스는, 그런 범고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생각할 수 없다.
"미안"
어째선지,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왔다. 뭐를 사과하고 있는 걸까. 그건 하루나 자신만이 알고 있다.
그를 의심했다는 사실을 전할 수 없는 겁쟁이인 자신을, 사과함으로써 그 사실을 얼버무리려 하는 비열함을, 무엇보다 그라볼라스의 말을 믿지 못한 하루나 자신을. 그 모두를 모은 성의 한 조각 담지 않은, 거짓의 사죄.
"그 말의 의미는 나도 알아. 하지만 하루나가 왜 사과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미안"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에게 등을 돌리고, 서둘러 자전거를 탔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멈춰세우겠지만, 그라볼라스는 움직이지 않고 하루나가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페달을 밟았다.
그라볼라스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바라봤다.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 있고, 이해하고 싶으니 말을 외웠는데... 어째서 알 수 없는 것들만 늘어날까?"
그런 그라볼라스의 혼잣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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