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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5일 토요일

단편 라노벨 번역 : 그라샤치 제 4장 그와 그녀의 컬쳐쇼크

 배고프다.

 달라붙어기만 하면 먹을것에 곤란하지는 않을텐데, 달라붙을 녀석이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배가 고프다. 공복을 느낄 수는 없었을텐데.

 느낀다.

 무언가를 느낄 수는 없었다.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달라붙을 수 있는 손발과 입 아래 달린 먹을것을 먹고 배설하고 번식하기만 하면 됐었다.

 아무것도 없다.

 먹을것도 없다면, 배설물도 없고, 번식하려해도 상대가 없다.

 이대로라면 죽겠지.

 지금은, 살아있다. 죽지 않았다.

 살고 싶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고 싶다, 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이건 생각. 처음 하는 생각. 

 생각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즉, 살고 싶다는 말인가.


 생존 활동을 시작하자

***

 "어이, 고우텐. 밥먹자... 근데, 너 그게 밥이냐"

 사이토 헤이하치는 쿠로다 타케노리가 손에 들고있는 과즙젤리팩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학교생활이 시작한지 벌써 10일, 헤이하치는 타케노리가 제대로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제 먹은 빵 한 조각이 가장 제대로된 식사였을 것이다. 나머지는 스포츠드링크 1리터짜리나 토마토 한 봉지, 말린 빵 한 봉지 등 대략 건강한 고등학교 1학년의 식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매점에서 뭐라도 사먹으면 되잖아"

 "이 섬에는 먹을게 너무 많아서 뭘 먹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단색으로 심플한 음식을 골라버리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나는"

 타케노리가 가끔 하는 묘한 표현을, 헤이하치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아직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겠지.

 "뭘 먹어야 할지 모른다니, 아무거나 적당히 먹으면 되잖아. 게다가 그런걸로 배부를 리 없잖아..."

 의미도 없이 기합을 넣고, 헤이하치는 타케노리 앞자리에 앉는다. 이 자리의 주인은 보통 교정이나 옥상에서 밥을 먹으므로, 멋대로 의자를 빌려도 딱히 문제될 일은 없다.

 "지금은 일단 완전 배부른 상태가 아니라도 괜찮아. 공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만 유지하면. 적당, 이라는 말의 의미는 알지만, 적당히 고른기는 어려운걸"

 "좋아하는 걸 먹어"

 "뭐가 좋은지 모르겠고, 먹고 싶은 건 먹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고"

 "모르는 것 투성이구만 너... 어쩔 수 없지. 너, 보통 먹는 것들은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먹으니까, 맛을 잘 못 느끼는 거 아니냐. 아ㅡ 하지만 참마랑 낫토랑 오크라는 싫다고 했었지 않았어?"

 기억이 없다는 건 불편하다. 그것 치고는 지극히 무난하게 학교생활을 보내는 타케노리는, 어느 의미로 이상하다고도 할 수 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멍청한 말을 꺼내지만, 동급생들에게는 천연 캐릭터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지금으로써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먹을것에 종류가 많을까"

 "또 묘한 소리를 하는구만. 언제나 같은 음식만 먹으면 질리잖아"

 "그런가아. 지금까지는 눈앞에 있는 걸 먹었으니까, 딱히 같은거나 다른거 구별해서 먹으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그 타케노리의 말을, 헤이하치는 그의 가정사정에 기인한다고 해석했다. 그 부모니까, 차리는 음식도 거기서 거기겠지.

 "무슨 어이없는 식생활이야, 너... 아, 오늘 도시락은 엄청 대충했네"

 흰 쌀밥에 매실장아찌와 생선토막. 그게 전부였다. 타케노리가 젤리로 떼우는 앞에서 자기가 도시락을 먹기도 좀 그렇지만, 이 대충 만든 도시락이라면 별로 신경쓰지 않고 먹어도 될 법하다.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긴 하지만 말이야ㅡ 중학교 때에는 급식이 있어서 좋았었는데. 아ㅡ 너 카레라이스 좋아하지 않았어? 급식 먹을 때 그것만 추가로 먹곤 했잖아"

 "그렇구나"

 젤리를 소리도 없이 빨아먹는 타케노리를 보며, 헤이하치는 어찌된 일일까 생각했다. 타케노리의 기억이 돌아올 기색은 전혀 없다. 병원에 가라고 권유해봤지만, 역시 가지 않았다. 학교생활에 지장이라도 생긴다면 헤이하치도 강하게 말하겠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딱히 문제될 일이 거의 없다. 학교 내에서 타케노리의 기억상실을 아는 사람은 헤이하치밖에 없지만, 곤란한 것도 헤이하치밖에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좌절하고 있다.

 "...기억이 없으니 불편하지만, 의외로 어떻게든 되는걸"

 이전의 타케노리를 아는 인간이 헤이하치밖에 없다는 사실이 주된 원인이겠지. 고등학교 진학이라는 시기가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아니, 한 명 더 있지 않은가. 타케노리가 기쁘다는 듯이 말하던, 그 여자아이가.

 "아아, 그나저나 아키츠시마였던가? 그 애는 딱 한 번 기억이 있었을 때의 너랑 만났었지. 그래서, 어떤데"

 "뭐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묻는 타케노리에게, 헤이하치는 생선 껍질을 먹으면서 말한다.

 "뭐가, 라니. 사이 좋아졌냐고 묻는 거잖아"

 텅 비어버린 젤리 팩을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타케노리는 잠시 침묵했다.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에, 헤이하치가 불안해졌다.

 "...하루나는, 내가 무서운 모양이야... 내가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을 하면서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원인일까"

 "너 또 묘한 표현을 쓰는구나... 하지만 무섭다, 라니"

 무섭다, 라는 감정은 모르지도 않다. 헤이하치가 타케노리의 기억상실을 알았을 때는, 무섭다기보다 놀람과 슬픈 감정이 더 컸다. 하지만 알고있는 사람이 갑자기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되버린다면 확실히 무섭겠지.

 "하지만 무섭다고 해도 아키츠시마가 너를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고, 맥락이 좀 틀리지 않냐. 뭐, 너는 뿌리가 좋은 녀석이니까, 천천히 친해지면 되지 않을까"

 "천천히 친해져?"

 돌아보는 타케노리의 얼굴을, 매실장아찌 씨를 뱉느라 열중이던 헤이하치는 보지 못했다.

 "그래, 천천히 친해지면 된다구... 뭐야, 너 그렇게 빨리 친해지고 싶었어?"

 "아니, 난 하루나랑 친해지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너, 친해지기 싫었으면 뭐가 하고 싶었던 건데"

 "대화하고 싶어"

 "...그것 뿐?"

 "그 외에도 뭔가 있어?"

 진지한 얼굴로 되묻자, 헤이하치는 난감해졌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진심이라면, 점심 시간에 할만한 화제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너, 진짜 진지하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타케노리는 얼굴을 찌푸리는 헤이하치를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네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는 건, 나의 이 발상은 사람의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상식이 없는 편은 아닌데, 올해로 16살이 된 남자가 그걸로 좋냐고 물어보면 좀 이상하지... 뭐, 네가 진짜 정말 아키츠시마랑 즐겁게 대화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딱히 상관 없지만... 내 발상이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타케노리가 좋다면 딱히 상관 없지만, 이라며 억지로 자신을 납득시키며 매실장아찌와 밥을 입으로 옮기는 헤이하치였으나.

 "으음... 아, 알겠다. 내가 남자고 하루나가 여자니까, 이 경우는 아이만들기를 생각하는 게 정상이구나"

 테케노리의 말에, 헤이하치는 입에 넣고 있던 물건을 뿜고 말았다. 대략 아래를 보고 있었던 덕분에 타케노리의 면전에 밥알 천본앵을 날리는 일은 면했지만, 책상이 굉장히 아수라장이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이... 병신아!"

 교실 안에서 점심먹는 동급생들이, 큰 소리로 외치는 헤이하치를 바라봤으나, 타케노리의 폭탄발언 탓에 그는 딱히 신경쓰지 못했다.

 "대화하는 사이에서 갑자기 최종단계까지 날아가는 녀석이 여깄네! 적어도 순서대로 가야지!"

 거기까지 외치고나서 자신이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헤이하치는 '아무것도 아니야, 또 고우텐이 멍청한 소리를 했을 뿐이야'라며 선언하고 멋대로 상황을 종결내더니, 다시 타케노리를 바라본다.


 "아이만들기는 됐으니까, 대화하는 사이부터 시작해줘... 거기부터 시작하자고, 제발"

 "어렵구나아"

 "네 사고방식이 훨씬 어려워, 정말이지..."

 더러워진 책상을 적당히 티슈로 닦고나서 식사를 재개한 헤이하치는, 행실 나쁜 타케노리의 얼굴을 젓가락으로 가르킨다.

 "아무튼, 너는 아키츠시마랑 사이 좋게 대화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라고. 그 다음 단계는 서두르지 말고. 함께 밥을 먹는다던가 영화를 본다던가, 아무튼 평범하게 해. 착각해서 폭주하지 말라고 정말 부탁이니까"

 우걱우걱 밥을 먹는 헤이하치의 식사를 바라보며, 타케노리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뭐야 갑자기... 고맙다고 할만한 일은 아니야"

 "감사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고맙다고 말하는 건 맞을텐데... 정말로 말은 어렵구나... 아"

 "왜그래"

 도시락통 구석에 달라붙은 밥알을 먹는 데 집중한 헤이하치는, 갑자기 맑아진 얼굴을 한 타케노리를 힐끔 봤다.

 "말을 알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왠지모르게 알 것같은 기분이 들어. 어휘가 부족한 게 아니라, 말하고 싶은 말을 씀으로써 그 상대와의 관계성이 유동화하는 게 무서운 거야. 하루나가 무서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나랑 대화해서 생기는 사실이 무서운 거야"

 "무슨 어려운 말을 하냐... 말하고 싶은 말만 하면 잘 될 일도 잘 되지 않는다고.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해야지"

 "때와 장소... 분위기같은 녀석을 봐야한단 말이지. 지금 이 교실은 창문이 열려있어서 바깥 공기가 들어오고 있는데"**

** 공기 = 분위기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갑자기 아이만들기같은 말을 꺼내는 시점에서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거니까... 아무튼 학교가 시작하고 10일이잖아. 장기전으로 가라고. 서두를 필요도 없고"

 식사를 마치고 도시락 뚜껑을 닫는 헤이하치의 손을 바라보며, 타케노리가 중얼거린다.

 "서둘을 필요, 없는 걸까"

 "있을 리가 없잖아"

***


 "너말이지, 좀 더 서두르라구. 그보다, 서두를 필요가 있을 때에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도 될 때만 서두르니까 안 된다는 거야"

 헤이하치가 타케노리의 발언에 답답해하고있을 무렵, C반 교실에서는 야마야 치토세가 아키츠시마 하루나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걔 꽤나 경쟁률이 높다구. 멋있으니까 말이지ㅡ 성격은 천연이라 귀엽다는 평판이야. 좀 멍청한 체질인지, 불안요소긴 하지만"

 "뭐가 불안한데..."

 이미 도시락을 다 먹은 하루나는 책상에 볼을 괴고 역설하는 치토세를 지친 표정으로 바라본다. 치토세는 매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커피우유에 손도 대지 않고 미간에 주름을 잡는다.

 "하루나도 바보 속성이잖아. 안 된다구, 바보와 바보라니. 바보가 있으면 태클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상성이 나쁘잖아. 나랑 하루나가 친한 이유는 네가 바보고 내가 태클 역할이기 때문이야. 하루나가 나같은 성격이었다면 절대로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을걸"

 "에, 내가 바보 속성이야?"

 다소 덜렁대는 면이 있긴 하지만, 바보라고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개그 콤비를 짠 것도 아니고, 바보와 태클 역할이라 사이가 좋아졌다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바보라는 거야, 너는"

 하지만 그라볼라스가 바보짓을 하면 하루나는 태클을 걸리라는 기분이 든다. 요 며칠동안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하루나는, 쿠로다 타케노리가 아닌 범고래의 모습을 한 그라볼라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고 거대한 해양포유류. 동물의 표정은 잘 모르지만, 그는 쾌활하고 애교가 있었다. 시노는 평소에 감정이 없는 분위기밖에 느끼지 못하는데.

 그의 존재에 놀라고, 처음에는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그의 말투에 질려버리기도 했지만, 자신은 결국 즐거워했다. 말하는 범고래와 아는 사이가 될 기회는 로또 1등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

 작아지고, 그리고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이 되고ㅡ그 이후부터 그와 만나기가 무서워졌다. 그래도 학교에 다니는 이상, 그의 모습은 싫어도 눈에 띄게 된다. 그라볼라스는 하루나가 있다고 눈치채면 반드시 멈춰서서 가볍게 손을 흔든다. 다가오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멀어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루나가 얼굴을 돌리고 그곳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라볼라스는 움직이지 않는다. 버려진 개같은 얼굴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시노는 버려져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을 것같아. 절대로 버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생각하는 하루나였다.

 마치 자신이 그에게 나쁜짓을 하는 기분이다ㅡ 아니, '마치'가 아니라 '사실'이다. 적어도 그라볼라스는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바다에 빠트렸을 때와 바닷물을 끼얹어서 쫄딱 젖게 만든 정도 뿐이다. 전자는 죽을 뻔했지만, 그라볼라스가 직접 구해줘서 샘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하루나와 '말하고 싶다'라고 했다.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아마도... 아마도.

 (믿지 못하는 자신이 싫다...)

 그라볼라스는 정직하다.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인간이 되어, 그의 가족이나 친구를 속이고는 있지만, 하루나에게는 아무런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고향 바다를 위기에 빠트린 괴물을 퇴치할 방법을 모색하러 왔으니까, 그런 지식따위 없는 하루나와 대화해봤자 소용없을 터다. 

 그런데도 그는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정말로 자신과 말하고 싶을 뿐이고, 그 말에 아무런 악의가 없는 걸까.

 "봐, 또 멍때리고 있잖아. 여기서 내가 태클을 걸지. 역시 내가 태클이고 너가 바보잖아"

 "태클걸지 않아도 될텐데"

 "무슨 소리야. 아무튼, 이 내가 드물게도 참아주면서 응원만 하고 있으니까, 정말로 스스로 해보라구. 잘 안 됐을 경우를 위해 계획도 세워놨지만, 정말 아슬아슬할 때까지 발동하지 않을 테니까"

 "아, 응... 고마워"

 평소의 치토세라면 억지로 하루나에게 행동하도록 부추기며, 그게 잘 되지 않을 경우 타케노리ㅡ그라볼라스에게 치토세 스스로 어프로치하겠지. 그런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아줘서 하루나로서는 정말로 감사할 따름이다.

 자신이 그를 신경쓰는 일이 결코 치토세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가 그라볼라스라는 이름의 범고래라는 사실이니까.

 "응, 역시 그거야. 뒤에서 밀어주기도 좋지만 지켜보기다 좋지이. 사랑에 한탄하는 여자애! 그 여자애 내용물이 일본 덜렁이 랭킹 100위 안에 들 법한 하루나라는 점이 약ㅡ간 옥의 티지만"

 "한탄하지도 않고, 그 일본 덜렁이 랭킹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냐구... 타카오한테도 들었는데"

 타카오한테 10위 내, 치토세한테는 100위 내라는 차이가 있지만 딱히 이게 1000위나 10000위 정도 차이나도 그리 기쁘지는 않다.

 "그치만 너, 덜렁대잖아. 실내화 갈아신기도 까먹고 신발 신은 채로 교실까지 와서 걸레질한다던가, 다른 교실로 들어간다던가, 시간 까먹는다던가 자주 그러잖아"

 "자주 그러지는 않는데..."

 자주 그러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사실이라 하루나로서는 강하게 반격하지 못한다.

 "아무튼 너는 타카오 군도 나도 인정한 덜렁이니까, 좀 더 정신차리라구. 시노쨩이었던가, 걔가 훨씬 정신머리가 있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개와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노가 영리한 개라고 칭찬받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런 기분이다.

 "시노가 머리 좋은 건 인정하지만, 다른 개들처럼 꼬리 흔들면서 반겨주지도 않아서 전혀 개같지 않은걸. 귀여운 부분도 있긴 하지만"

 "시노쨩은 확실히 귀엽지만, 우리 아이들도 지지 않는다구ㅡ"

 "승부하는 것도 아니고, 빨리 샌드위치나 먹어"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까. 이런 말을 계속하며 하루나는 창밖을 본다. 좋은 날씨다. 시노가 개집 밖에서 햇빛을 쬐고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덧붙여 어째선지, 범고래의 모습을 한 그라볼라스가 '태양빛이 따뜻해ㅡ'라며 말하면서 파도치는 곳에서 뒹굴뒹굴하는 광격이 떠오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거시기해서, 하루나는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이 됐다.

 "그나저나 하루나, 하얗고 크고 등에 검은 얼룩이 딱 하나 있는 눈매 나쁜 수컷 고양이 최근에 못봤어? 너도 본 적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우리집에 놀러왔을 때 지붕 위에서 뒹굴던 베르나르도 말이야"

 "베르나르도란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엄청 옆으로 넓적한 고양이라면 기억나"

 무슨 이유인지 베르나르도라는 이름을 지었는가 물어보고 싶으면서도 물어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하루나였다.

 "그거 치토세가 키우던 고양이?"

 "아니, 가끔 지붕 위로 와서 유리창을 넘어들어와 우리 고양이들이랑 부비부비할 뿐이야. 가까이 가면 도망가지만... 최근에는 잘 못봐서 무슨 일인가 해서"

 그렇게 말하면서 커피우유팩에 빨대를 꽂는 치토세의 얼굴은 아주 약간 진지해져 있었다.

 "최근에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이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하루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말하고 치토세도 그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그 다음날, 하루나는 자신의 대답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그 날 저녁무렵, 하루나는 시노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내일은 시험이 있으니 공부를 해야하지만, 어째선지 기분전환을 하고 싶어졌다. 중학교 시절의 복습을 겸하는 간단한 시험이라고 말은 했지만, 반나절 정도로 모든 과목을 다 보는 것이므로 학생들로서는 그리 간단한 시험이 아니다.

 "입학하고 바로 시험 공부라니, 귀찮다ㅡ 그치 시노"

 하루나의 앞을 느긋하게 걸어가는 시노는 살짝 돌아보기만 하고 다시 앞을 향했다. 시노와 하는 산책은 그라볼라스와 만난 날 이후로 처음이다. 또 싫어할까봐 불안해진 하루나였지만, 시노는 지극히 얌전하게 개목걸이에 목줄을 채울 수 있도록 해줬다. '카라키하마에는 가지 않을 테니까'라고 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정말이지 잘 모르겠는 개다.

 느긋하게 하천을 걷고있자니 갑자기 시노가 멈춰섰다. 이런 때는 보통 무언가가 있다. 하루나도 멈춰서자 전방에서 자전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노를 데리고 도로 끝으로 붙어서 피하려고 한 하루나였으나

 "아"

 라는 목소리와 함께 삐걱거리며 멈춰서는 자전거 소리를 들으며 무슨 일인가 하고 자전거에 타고있던 사람을 봤다

 "아, 으음... 사이토 군?"

 그라볼라스가 '쿠로다 타케노리의 친구'라고 입학식날에 소개해준 남자다. 교내에서 그라볼라스가 누군가와 있는 모습을 볼 때는 보통 근처에 헤이하치도 있었다. 타케노리의 친구지 그라볼라스의 친구가 아닐텐데, 둘은 꽤 사이가 좋아보였다.

 설마, 그도 쿠로다 타케노리가 그라볼라스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걸까.

 "어, 어... 안녕"

 어딘가 동요한 듯이 대답하는 헤이하치는, 하루나가 아닌 시노를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볼일이 있어서 멈췄지만, 개를 꺼려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개 싫어해? 괜찮아, 이 애는 물거나 달려들거나 하지 않으니까"

 "아니야! 오히려 엄청 좋아해! 개도 고양이도!"

 갑자기 큰 소리로 부정해버려서 하루나가 깜짝놀라버렸다.

 "아, 그래, 좋아하는구나..."

 "마, 만져봐도 돼?"

 개를 좋아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시노를 만지고 싶어서 멈춘 걸까. 그의 너무나도 진지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는다.

 "자, 시노. 앉아"

 얌전히 지면에 앉은 시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헤이하치는 당황해서 자전거를 내려와 스탠드를 건다. 앞이 약간 찌그러져있고 라이트가 깨진 모습이 신경쓰이는 자전거다. 하루나는 일단 주인의 책무로서 만에 하나 시노가 헤이하치에게 달려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말로 개를 좋아하는구나)

 하루나가 그렇게 느낀 것은, 헤이하치의 만지는 방법이 개를 다루는 책에 적혀있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개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옆에서 천천히 접근한다. 금방 만지지 않고 손을 아래부터 뻗어서 냄새를 맡게 한다. 그리고 등으로 손을 뻗어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렇게까지 정확한 수순을 거쳐서 만지는 사람은 처음 봤다.

 "사이토 군, 개 기르고 있어?"

 "아니, 우리집은 단지고, 아빠나 엄마가 별로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만지는 방법을 예습해서 이런 기회가 있으면 언제라도 만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약간 흐뭇해진 기분으로 헤이하치와 시노를 바라보는 하루나였으나.

 (...너무 길지 않아?)

 벌써 5분 정도 지나지 않았을까. 헤이하치는 '그래그래, 시노라고 했었지, 귀엽구나, 얌전하구나, 똑똑하구나' 등등 말하면서 시노를 만지고 있다.

 하지만 말은 둘째치고, 헤이하치의 표정은 전혀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뭔가가 쌓인, 그런 진지한 얼굴로 일사분란하게 시노를 쓰다듬고 있다. 오히려 쓰다듬는 작업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어울린 정도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등만 쓰다듬었는데, 지금은 시노의 볼을 움켜잡고 있다. 다시 보면 귀 부근을 만지고 있거나, 목이나 등을 만지작거리거나, 아무튼 마구마구 만져대고 있다.

 하지만 슬슬 헤이하치를 말리는 편이 낫겠다. 시노는 샴푸나 블래싱은 모르지만, 그냥 만져지기만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도 귀를 죽이고 꼬리 또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참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이토 군, 너무 만졌어. 시노가 싫어하잖아. 시노, 미안, 이제 됐어"

 시노는 하루나가 말하기 무섭게 헤이하치의 손에서 빠져나가 목줄이 늘어나는 한계까지 달아났다. 그리고 하루나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몸을 낮추고 자세를 잡는다.

 "머리 좋은걸. 아키츠시마가 하는 말 전부 알아듣는 것처럼 보여"

 "응... 사이토 군, 개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한테 만져지면 싫어하는 개도 있으니까 조심해줘"

 "아니,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도 개나 고양이를 보면 만져보고 싶어서 말이야... 게다가 방금 약간 기분나쁜 걸 봐버려서, 건강한 개를 보니까 약간 안달이 났어"

 "기분나쁜 거?"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루나에게, 개를 만지느라 웅크린 자세 그대로인 헤이하치가 기분 나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머리를 긁는다.

 "길가에 끔직한 고양이 시체가 있었어... 갈갈이 찢기고 납짝해져서... 아, 기분나쁜 이야기 해서 미안"

 "아니..."

 모르는 고양이라고는 하나, 슬픈 이야기다. 헤이하치에게 뭐라고 해야 좋을지 생각하던 하루나는, 어젯밤 치토세에게 들은 베르나르도라는 사라진 고양이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게 베르나르도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거, 어떤 모양이였어? 친구가 고양이를 찾고 있다고 말했는데, 약간 신경쓰여서"

 "너무 끔찍해서 기억이 잘 안 나... 어떻게 된 일인지 보려 했더니 모르는 할아버지가 와서 자기가 묻어준다고 말하며 신문지에 싸서 가져갔어"

 "그래... 고마워"

 베르나르도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 안심되면서도 유감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럼..."

 하루나가 목줄을 가볍게 당기자, 시노가 그에 응하듯 일어나고, 거의 동시에 웅크리고있던 헤이하치가 일어났다.

 "아, 아니, 그러니까. 아키츠시마한테도 볼일이 있다고 할까, 뭐라할까..."

 "시노를 쓰다듬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그것도 있지만, 고우텐의 친구로서, 약간 말해두고 싶은 게 있는듯한,없는듯한... 역시 있어, 음"

 말을 매듭지으며 눈을 뜨는 헤이하치의 필사적인 얼굴은, 주름 하나 없는 퍼그처럼 보였다.

 "고우텐?"

 "아, 내가 타케노리한테 지어준 별명이야. 쿠로다 타케노리... 알고 있지?"

 모를 턱이 없다. 하지만 어느 의미로 하루나는 타케노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가 아는 건 1개월 쯤 전에 카라키하마에서 딱 한 번 만났을 뿐인 쿠로다 타케노리다. 첫 만남에서 오카리나를 칭찬해준, 상쾌하게 웃는 우쿨렐라 소년. ㅡ그리고 지금은 그라볼라스가 모습을 빌린 쿠로다 타케노리.

 얼굴이 굳어진 하루나에게, 헤이하치는 당황한 듯이 떠들어댄다.

 "아니, 뭐냐. 그녀석은 그녀석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줘. 그녀석도 뭔가 고민하고 있고, 너무 고민한 나머지 제대로 먹지도 않고... 약간 이상하지만, 좋은 녀석이야. 사이 좋게 지내달라고 말하진 않을 테니까, 그녀석을 피하지는 않아줬으면 고맙다고 할까, 그녀석이 멍청한 말을 하면 놀라지 말아달라고나 할까..."

 헤이하치의 말에 하루나는 몇가지 의문을 가졌다.

 "그라... 쿠로다 군이, 고민하고 있어?"

 그 그라볼라스가 고민하는 모습따위, 상상도 할 수 없다. 그게 하필이면 자신이 원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아니면 '그런 척'을 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웃는 이유도 없는데 의미도 없이 웃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싫어진다.

 게다가 헤이하치는 '그녀석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고 했다. 그 사정이란,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인간이 지금은 그라볼라스라는 범고래가 되버린 사실이 아닐까.

 혹시 그렇다면, 하루나가 마음 속에 품고있는 응어리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품은 하루나였으나

 "어... 믿기 힘들겠지만, 그녀석 기억이 없어"

 "에... 기억...?"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은 헤이하치도 그라볼라스에 대해 모르고 있다. 겨우 보였던 광명이 금방 사라져버려서 하루나는 내심 낙담해버렸다.

 "지난달에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이번달이 되서야 돌아왔나 싶었더니 저모양 저꼴이라... 하지만, 친구인 나도, 가족에 대해서도,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키츠시마에 대해서만 확실히 기억한다구, 그녀석... 알겠어?"

 부탁한다는 듯한 시선으로 봐도, 하루나로서는 곤란할 뿐이다. 그라볼라스가 기억상실인 척을 하며 헤이하치나 가족을 속이는 건 이해할 수 없으나, 그건 하루나가 그라볼라스를 대하는 불신감에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있구나, 그라는...)

 자신도 거짓말 한둘은 하지만, 하루나는 그라볼라스가 타케노리로 위장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세삼스럽게 쇼크를 받았다.

 "딱히 지금 당장이라는 건 아니야. 천천히 사이 좋게 되어달라구... 그러는 사이에 저녀석의 기억이 돌아올 테니까... 아, 그녀석이 멍청한 말을 꺼내면 가차없이 줘패도 돼. 정말이지 그녀석 분위기 파악도 못 한다니까"

 헤이하치의 그 부탁에 대해, 하루나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애매한 대답을 해서 자리를 뜰지, 이미 타케노리가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헤이하치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라볼라스라는 거대하고 기묘한 범고래라는 진실을 알릴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쿠로다 군은 좋은 사람이지. 처음 만났던 때 그렇게 생각했어"

 카라키하마에서 만난 쿠로다 타케노리. 짧은 만남이었지만, 떠올려보면 정말로 그랬다.

 "그래, 고우텐은 좋은 녀석이야. 그러니까"

 "하지만, 지금의 쿠로다 군은 그 때의 쿠로다 군이 아니야"

 그러니까, 무섭다. 입 안에서 중얼거린 말이 헤이하치에게 닿았는지 모르겠다.

 "그럼..."

 하루나가 목줄을 당기기 전에 시노가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시노에게 이끌리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나도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헤이하치의 말은 하루나에게 닿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

 멍하니 산책을 하던 하루나였으나, 다시 시노가 멈춰서서 무슨일인가 둘러본다. 집 앞이다. 어느새 돌아와버린 모양이다. 어디를 어떻게 걸어왔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무의식이란 정말로 무섭다. 혹시 어쩌면 시노의 귀소본능이 발동한 걸지도 모르겠다.

 "시노, 고마워..."

 목줄을 풀고 목걸이에 사슬을 채운 뒤, 하루나는 시노의 마실 물을 갈아주기 위해 그릇을 들고 정원으로 향했다. 아키츠시마의 집의 그리 크지 않은 정원에는 약간 작은 단풍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있다. 할아버지가 나뭇가지를 적당히 잘라와서 심은 것이라 관상용이라기에는 약간 그렇다. 애초에 단풍나무 한 그루로는 별로 피어나는 녀석도 없다.

 그 단풍나무에서 약간 떨어진 부분을 신키치가 삽으로 파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야?"

 시노에게 줄 새 물을 그릇에 담은 하루나는 신키츠의 곁에 와서 물어본다.

 "오, 하루나냐. 어서오거라. 구멍을 파고 있을 뿐이다, 신경 쓰지 말거라"

 구멍을 파는 건 보면 안다. 하지만 왜 구멍을 파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무언가를 심기에는 단풍나무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무엇을 위해 구멍을 파는가. 그걸 물어보려 했던 하루나는 신키치의 발치에 있는 신문지 뭉치를 발견했다. 적당히 싸여있던 탓인지 내용물이 약간 빠져나와 있었다.

 하얀 털이 난 굉장히 가느다란 무언가. 검은 발바닥이 살짝 보인 그것은, 하루나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틀림없는 고양이의 다리였다.

 "...너가 볼만한 물건이 아니야. 빨리 가거라"

 신키치가 땅을 파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하루나는 바로 '그것'에 다가간다.

 "안 됀다, 정말로 볼만한 물건이 아니야... 밥맛이 떨어진다"

 벌레를 씹은 표정을 한 신키치가 손을 멈추더니, 빠져나온 다리를 신문지로 감춘다. 

 "고양이...?"

 헤이하치가 말한 '끔직한 고양이 시체'와 '신문지에 싸서 가져간 할아버지'. 아무리 하루나라도 이런 상황에선 간단히 연관지을 수 있다.

 "어딘가의 꼬맹이가 길가에 있는 이녀석을 보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해서 말이다. 동사무소에 연락하면 가져가겠지만, 어떻게 묻어줄지 모르니 말이다... 우리집에는 선향도 있고 가볍게 묻어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주름투성이 손으로 신키치는 신문지 위를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끔찍한 꼴이야..."

 "할아버지... 그 아이, 친구 고양이일지도 모르니까 확인해보고 싶어. 잠깐 얼굴만 보여줘"

 부탁해, 라고 말을 이으려는 하루나에게, 신키치가 고개를 젓는다.

 "안 된다, 보면 안 돼. 특징만 나한테 설명해라. 내가 확인해주마"

 "...전체적으로 하얗지만 등에 검은 얼룩 모양이 하나 있고 크고 살찐 수컷..."

 신키치는 신문지를 들더니 하루나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갔다. 잠시 뒤 돌아온 신키치는 심각한 얼굴이라, 안그래도 주름투성이 얼굴이 더욱 주름져 있었다.

 "...살이 찐 것 이외에는, 네가 말한대로구나"

 "그럼 약간 말랐을 뿐이고 닮은 고양이일지도 모르잖아. 어째서 그렇게 나한테 보여주지 않는 거야?"

 딱히 고양이더라도, 이 고양이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하루나는 치토세에게 '베르나르도가 죽었다'라는 보고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신키치는 허락해주질 않는다.

 "너한테만이 아니야, 타카오한테도 이즈미한테도, 네 친구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이건 원래부터 마른 공양이가 아니야. 가죽 상태와 뼈의 골격을 보면 원래는 꽤나 돼지고양이였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뼈와 가죽밖에 남아있지 않아. 마치 미라처럼 말이다. ...몇번이나 말하지만, 네가 볼만한 물건이 아니다"

 완고한 할아버지다, 한 번 꺼낸 말을 그리 간단히 꺾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얼굴 정도는 보여줘도 되잖아..."

 신키치는 신문지를 자기 그림자에 감추며, 하루나가 보이지 않도록 하고 다시 삽을 손에 든다.

 "...머리가, 없다. 얼굴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짧은 말이었다. 짧지만 굉장히 충격적인 그 말에, 하루나는 신문지에 시선을 옮겼다.

 "차에 짓눌리고 며칠이나 방치되어 있었는지...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구나... 다 묻으면 선향이나 피워주거라"

 빨리 가라.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치는 신키치에게 힘없이 끄덕이고, 시노의 곁으로 돌아간다. 시노는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가져온 물을 굉장한 기세로 마시기 시작했다. 하루나는 그 모습을 웅크리고 바라본다.

 "다녀왔어, 누나... 얼굴이 왜 그래, 죽어가는 얼굴이야"

 돌아온 타카오가 평소처럼 말을 건다. '죽어가는 얼굴'이라고 들어도 반론할 기운도 없이, 하루나는 그저 '다녀왔어'라고만 말한다.

 "...누나의 그 모습을 내가 신경쓰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놔두는 편이 좋아? 누나가 바라는 대로 해줄게"

 "왠일이야, 상냥하게"

 물을 다 마신 시노가 신경써주는 듯이 하루나를 올려본다. 시노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듯하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시노도 드물게 싫어하는 기색 없이 눈을 떴다. 

 "난 평소대로야. 누나가 받아들이는 게 다를 뿐이지. 그래서, 왜그런데.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게"

 "뭘 얘기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그라볼라스가 하루나에게 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알았어. 그럼 난 평소처럼 할테니까, 신경써줬으면 말해줘. 아, 할아버지 계셔? 시노를 집 안에 풀어두고 싶은데"

 "할아버지라면 정원에서 구멍 파고 있는데, 왜?"

 아키츠시마 집에서 기르는 개인 시노지만, 주인을 딱 한 명으로 한정하자면 역시 시노를 주워와서 기르고 싶다고 말한 할아버지 신키치다. 그 신키치가 '개는 밖에서 키우는 법이다'라고 강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시노가 집 안에 들어와서 지낼 수 있는 때는 몸을 씻을 때와 태풍이 왔을 때 정도다. 잠시 비가 와서 하루나가 시노를 현관에 들여보내려고 하면 '개는 이정도 비로 감기 걸리거나 하지 않는다'라며 강하게 거부해버린다.

 대단한 이유가 없는 한, 시노를 집 안에 들여놓도록 허락해주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나는 시노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고 타카오를 올려본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한 타카오가 하루나 옆에 웅크리고있는 시노의 등을 쓰다듬는다.

 "...중학교에서 키우는 닭 있잖아. 누나도 기억하지"

 "어, 흰 닭 세마리랑 당닭 한 마리... 그러고보니 오늘은 타카오가 닭장 당번이었던가"

 하루나도 닭장 청소나 먹이를 준 기억이 있다. 아침 일찍 등교하기는 귀찮다고 반년 정도 전의 일을 생각해내는 하루나였지만

 "내가 제일 처음 발견했지만, 끔찍했어... 미안, 침울해있는 누나한테 할 말은 아니었어"

 타카오가 사과하는 것을 하루나는 오랜만에 들었다. 딱히 타카오가 사과하지 않는 꼬맹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과해야만하는 짓을 하지 않는 꼬마일 뿐이다.

 "...아니야, 끔찍했다면 타카오도 쇼크였겠지? 말하면 조금은 편해질 거야"

 "그럴까? ...선생님에게는 들개한테 물려죽었다고 둘러대라고 들었어. 모두 불안해할테니까. ...하지만 그건 개가 한 짓이 아니야. 개가 물어뜯어도 그런 식으로 되진 않아..."

 타카오는 시노의 등을 쓰다듬던 손을 입주변으로 옮겨 이빨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규칙적으로 늘어선 이빨과 팥색의 잇몸이 드러나도 시노는 얌전히 있다.

 "이걸로 물거나, 발톱으로 긁더라도, 그런 식으로 될 리 없어"

 그런 식이란 어떤 식일까. 시노의 이빨을 보고, 그라볼라스의 무서우리만치 날카로운 어금니를 기억해낸다. 머리에 떠오른 나쁜 생각을 억지로 집어넣고, 하루나는 타카오에게 물어본다.

 "...머리가, 없다, 던가?"

 혹시 그렇다면, 그 베르나르도일지도 모르는 고양이도 사고가 아닐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물어봤지만

 "...약간 아쉬워. 머리만 남아있었어"

 타카오는 시노의 입에서 손을 떼고 턱을 쓰다듬더니 일어선다.

 "그 밖에도 반 친구가 키우던 개가 이상하게 죽었다던가, 고양이가 납작하게 깔려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굴러다닌다거나, 그런 소문을 들었어. 닭만이라면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이런 소문을 들으면... 시노도 밖에 놓아두기 불안하니까. 그럼, 할아버지한테 상담해볼게, 누나는 시노랑 놀아줘"

 정원쪽으로 가는 타카오를 보며, 하루나는 시노의 얼굴을 바라봤다.

 "시노... 이렇게 짧은 사이에 이상하게 죽는 생물체가 몇 마리나 나오면 조금, 아니 굉장히 이상하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도, 시노가 뭐라고 대답할 리가 없다. 하지만 하루나를 바라보기는 한다. 

 "그라랑 만난 뒤로 오카리나는 잃어버리고 쿠로다 군은 그런 꼴이 되버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이상한 일 뿐이야"

 스스로 아무 생각 없이 입밖으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문득 무서운 상상을 하고 말았다. 그건 방금까지 타카오와의 대화에서 하루나 자신이 떠올렸다가 억누른 기억. 큰 입 속에, 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흉기 이빨을 감추고 있는 그라볼라스.

 그리고 동물들이 기묘하게 죽고, 게다가 그 몸의 일부가 사라져있다.



 그라볼라스가 물어뜯어서 먹어버린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겠지...)

 그라볼라스가 평소에 뭘 먹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인간의 음식을 먹고 있다... 고 생각하고 싶다.

 그는 먹어선 안 되는 것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차별하게 죽여서 먹어치우지 않는다고 했다. 닭은 모르겠지만 개나 고양이는 보통 먹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 간다면 먹을법한 식문화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일본에는 없을 터이다.

 (그라는, 나한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걸... 사이토 군은 속이고 있지만...)

 하지만 정말로 그라볼라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 하루나로서는 알 수 없다. 존재 자체가 허구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라볼라스니까.

 ㅡ모든것이 거짓이 아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설사 그라볼라스가 범인이라고 해도, 하루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어떻게 할 수 없잖아...)

 물어보면 그라볼라스는 솔직하게 먹기를 그만둬줄까. 가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에게 뭘 먹으라고 해야 할까.

 (그라가 범인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음... 그 대답을 듣고,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분명...)

 시원스럽게 '응, 내가 먹었어. 레드 데이터였나, 그런걸 보고 공부했는데, 개도 고양이도 닭도 10마리나 20마리 줄어들어봤자 전혀 괜찮은 생물같고, 약간은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배도 고프고. 안 돼?'라면서 순진무구한 미소로 대답한다면.

 ...대답한다면.

 '뀨우웅'이라며 시노가 울음소리를 내는 걸 듣고, 하루나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시노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 시노. 너한테 상담... 은 아니지만, 들어주면 마음이 편해질 기분이야..."

 가볍게 시노의 등을 두들겨주고, 하루나는 천천히 일어난다.

 "내일, 그라한테 물어볼게... 그래, 그라가 말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내가 말을 걸어도 괜찮겠지..."

 입을 열어 말하고나서 자신이 그라볼라스의 '말하고 싶다'라는 소망을 지금까지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라볼라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설령 쿠로다 타케노리의 몸을 먹고, 그 주변의 인간을 속이고 있더라도, 그라볼라스는 하루나에게 항상 자신의 기분을 거짓없이 전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범고래가 작아진 것도, 원인을 따져보면 하루나의 '좀 더 작았으면'이라는 말이 발단이었다. 우직하게 성실하게, 항상 노력하며 먼 바다에서 찾아온 범고래.

 그런 범고래를, 자신은 동물을 무참히 죽이고 다니는 범인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이질적인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나, 이런 기분나쁜 애였나...)

 조용히 올려다보는 시노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하루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턱에 앉아 멍하니 있자니, 현관에서 타카오가 들어왔다.

 "아직도 죽어가는 얼굴이네. 아까보다는 낫지만"

 "아까보다 낫다면 됐지... 잠깐 시노 털갈이 해주고 올게"

 현관 턱에 놓여있던 개용 브러시와 빠진 털을 담는 봉지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누나를 보며 타카오는 한숨을 쉰다.

 "오카리나 연습을 그만두는 것도, 시노랑 숙덕숙덕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좋지만, 그런 얼굴을 하면 집 분위기가 어두워지니까 그만해줘, 누나"

 네 얼굴이 더 어두워진다구.

 ...라고 이 자리에 없는 하루나가 대답할 턱이 없었다.

***

 시험이 끝난 다음이란 독특한 해방감이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 하루나는 입을 가리고 크고 긴 하품을 한 번 하고 스트레칭을 한다. 영어를 빼면 그렇게 나쁜 결과는 아니리라는 기분이 든다.

 (...그라는 제대로 공부했을까)

 그런 생각은 했지만, 그라볼라스보다 자기 시험 결과를 걱정하는 편이 맞는 듯하다. 일단 돌아갈 준비를 하는 하루나는 A반에 들러보기로 했다. 그 전에 치토세에게 말해두려고 그녀의 자리에 다가가ㅏㄴ 하루나는, 치토세가 볼을 괴고 눈을 감고있는 모습을 봤다.

 "치토세ㅡ 안 가?"

 얼굴 앞에 손을 팔랑팔랑 흔들자 치토세가 귀찮다는 듯이 하루나의 손을 밀어낸다. 

 "너무 졸려서 졸려서... 아침밥도 안 먹었고, 죽을 것같아"

 "또 밤샘했구나"

 하루나도 진지하게 공부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험 전에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늘린다. 하지만 치토세는 어떤 시험이건 전부 밤샘공부를 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대체 몇시까지 공부했어?"

 "...오전 6시"

 "바로 돌아가서 자... 자, 돌아갈 준비 하자"

 하루나는 졸려보이는 치토세의 몸을 옆으로 끌어내고 그녀의 가방에 책상 안의 내용물을 넣어간다. 이런 일은 중학생 시절에도 있었기에 하루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교과서는 그냥 넣어둔 채로 괜찮아?"

 "응, 어차피 가져가봤자 공부 안 하니까..."

 노트나 필기용구를 넣은 자신과 치토세, 둘의 가방을 어깨에 걸고, 하루나는 노곤해보이는 치토세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자, 버스정거장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너무 자서 종점까지 가지 않도록 조심해"

 "고마워 하루나... 감사의 의미로 나중에 오즈월드의 배에 부비부비할 수 있게 해줄게"


 "...시노의 털에 부비부비 할테니까 됐네요"

 결국 하루나는 베르나르도같은 고양이에 대해서 치토세에게 말하지 못했다. 치토세의 팔을 잡고 교실을 나선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와 대화하기를 내일 하자고 생각했다. 

 (내가 멋대로 상상하고 불안해졌을 뿐이겠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

 스스로에게 말하는 하루나는, 치토세와 함께 교문으로 향한다. 하지만 진행방향에 본 적이 있는 그라볼라스의 등을 발견하고 멈춰선다.

 "뭐야 하루나, 갑자기 왜... 는 쿠로다 군이잖아"

 졸린 듯이 하루나의 팔에 기대있던 치토세였지만 그의 모습을 인식하더니 거꾸로 하루나의 팔을 움켜쥔다.

 "자ㅡ 가자"

 "어, 왜... 그리고 치토세 졸린 거 아니었어?"

 "졸리다구ㅡ 그러니까 너랑 쿠로다 군의 사이가 진전되면 나는 편하게 잘 수 있으리라 약속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더니 치토세는 하루나의 팔을 끌고가면서 '쿠로다 군ㅡ' 이라고 말을 걸었다.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을 한 그라볼라스가 그 부름에 천천히 돌아 하루나와 치토세를 바라본다. 그 사이에도 치토세는 하루나의 팔을 끌고 거리를 좁혀간다. 

 "쿠로다 군, 안녕!"

 "여, 안녕. 하루나, 랑 야마야 씨"

 "...안녕"

 그라볼라스가 언제나처럼 웃고있다는 건 분위기로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루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렇게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간만인 기분이다.

 "시험 끝났지ㅡ 어땠어?"

 그런 하루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토세는 괜시레 높은 텐션으로 그라볼라스에게 말을 건다. 아까까지 그렇게나 졸려보였는데 마치 거짓말같다.

 "다행히도 공부한 부분에서만 나와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

 "헤ㅡ 쿠로다 군은 머리 좋은가보네ㅡ 하루나도 본받으면 좋을텐데"

 "어? 아, 그렇지..."

 치토세에게 허벅지를 찔린 하루나가 애매하게 대답한다. 확실히 그라볼라스는 머리가 좋았지. 공부도 열심히고, 오늘 시험 성적도 자신보다 높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여기서 일부러 '그라는 고양이같은 거 안 먹지?'라고는 도저히 물어볼 수 없다.

 일단 여기는 치토세와 그라볼라스의 대화를 적당히 듣도록 하자... 그런 생각을 하던 하루나가 물렀다.

 "그래서, 시험 말인데... 아ㅡ 나 졸리니까 먼저 돌아갈게. 하루나, 짐 들어줘서 고마워 그럼!"

 "어, 잠깐..."

 하루나가 들고있던 치토세의 가방을 빼앗겼다. 이렇게 티나게 빠져나갈 줄은 몰랐던 하루나가 망설이는 사이에, 치토세는 기세 좋게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떠날 때 작은 목소리로 '힘내라구!'라며 속삭였지만, 이 상황에서 대체 뭘 힘내라는 말인지

 "여, 하루나. 안녕"

 복도 한쪽에 남겨진 둘이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그라볼라스였다.

 "인사는 방금도 했잖아"

 "아까는 하루나와 또 한 명의 사람에게 대한 인사고, 하루나에게만 하는 인사가 아니었으니까"

 요새 하루나는 그라볼라스를 피하고 있었으나 그의 태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약간 다른 점이라곤 웃고있는 그의 얼굴이 이전에 비해 자연스러워졌다는 점 정도였다.

 "...그라는 언제나 웃고있네"

 "그런가? 안 웃을 때도 있어. 하루나랑 만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얼굴이 되는 모양이야. 신기하네"

 그는 자신과 만나서 대화하는 걸 즐거워하는 듯하다. 하루나에게는 그게 더 신기했다

 "저기, 그라..."

 "응"

 무언가 말하려고 생각했다. 개나 고양이 얘기가 아니더라도 카라키하마에서 대화했듯이 마음 편하게 말하고 싶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터였다.

 "저기"

 "야, 고우텐. 기다렸지. 돌아가... 어이쿠"

 A반 교실에서 기세 좋게 달려나온 헤이하치가 그라볼라스와 하루나 사이에 끼어들어오는 형태가 되버렸다. 그는 그라볼라스와 하루나의 얼굴을 차례차례 살펴보고 머리를 긁었다.

 "아ㅡ... 음... 시, 실례했습니다...?"

 어깨를 움츠리고 작아지는 헤이하치에게 하루나가 무심코

 "아니, 저야말로... 그럼 이만..."

 이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뭐, 뭔지 잘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고우텐..."

 "정말이지!"

 목에 걸고 있던 가방을 갑자기 잡아당겨져서 헤이하치는 '꾸엑'하는 신음소리를 낸다. 뒤를 돌아보자 작은 여학생이 어깨를 으쓱 하더니 사라져간다. 평소의 헤이하치라면 '뭐하는 지거리야'라며 호통을 치겠지만, 그럴 기분이 아닌 헤이하치는 목 뒤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약간 거북해진 그라볼라스와 헤이하치에게 도망쳐버린 하루나였으나, 그 뒤에 어째선지 나타나버린 치토세한테 '그런 일로 도망쳐서 어쩌려고! 다음엔 제대로 하라구!'라고 호통을 받았다

 "치토세 왜 아직도 있는 거야..."

 돌아간 게 아니었어, 라고 물어보려던 하루나에게 치토세의 한마디

 "졸리니까 갈 거야! 잘 자!"

 라고 하며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정말, 밟고 찬다고 해야할지 뭐라할지...)

 완전히 기분이 다운된 하루나는 교문에 있는 늘어선 개인 로커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쉰다. 신발을 꺼내서 갈아신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헤이하치의 큰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고우텐. 미안했다... 그 뭐냐, 시험도 끝났는데 우리집에라도 놀러올래?"

 교문에는 아직 학생들이 남아있었지만 하교 러쉬는 이미 끝나있었기에 그리 시끌벅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하루나가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둘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그건 굉장히 흥미깊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도서관에 가고 싶으니까 사양할게. 초대해줘서 고마워"

 "도서관이라고? 공부 열심이구만... 뭐 상관없지만.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책만 읽어대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많이 있으니까. 뇌 용량이 부족하니까, 기억하기가 큰일이지만"

 (그라도 참, 그런 말투를 쓰면 사이토 군이 이상하다고 생각할텐데)

 헤이하치가 그라볼라스의 말투에 어떤 반응을 할지 불안해하면서도 엿듣는 하루나였다.

 "머리통 크기로 기억용량이 다를 리 없잖아. 애초에 뭐든지 기억할 필요도 없고. 너의 경우에는 지식보다도 니가 가끔 하는 이상한 말투부터 어떻게 해야 할걸"

 (그라는 평소에도 저런 말투를 쓰나보네... 사이토 군은 질려하면서도 신경써주는 모양이고)

 타케노리로 되버렸다고 생각하던 하루나였으나, 그라볼라스는 정말로 있는 그대로 행동하는 모양이다. 저 상태로 잘도 녹아들었구나 하며 어느 의미로 감탄했다. 주변 사람들이 너그러운 건지, 아니면.

 (...쿠로다 군이 원래부터 저런 성격이었을까)

 딱 한 번밖에 진짜 타케노리와 말해본 적 없는 하루나에게는 그의 자세한 성격을 알 리가 없었다.

 "너네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이면 동부도서관?"

 "가까이에 있는 곳은 거기 뿐이지만, 중앙도서관 쪽으로 가볼까 해"

 (도서관... 이라)

 동부도서관은 가본 적 없지만, 중앙도서관이라면 일 년정도 전에 가본 적이 있으며 장소도 기억하고 있다. 모처럼 시간이 남았으니 그라볼라스가 도서관에 가서 혼자 있을 때 말을 걸어보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한 하루나는 일단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되도록 조용하게, 둘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 장소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어려운 책만 읽지 말고 너가 자주 말하던 로망 넘치는 소설이라도 읽어보지 그래. 갑자기 아이만들기같은 말을 꺼내면 아키츠시마가 무서워해도 어쩔 수 없다구"

 갑자기 튀어나온 충격적인 말과 자기 이름에 하루나는 가까이 있던 쓰레기통에 성대하게 걸려 자빠졌다. 고통스러운 비명은 가까스로 참았지만, 쓰러진 쓰레기통이 거대한 소리를 울렸다.

 하루나는 당황하며 일어서서 쓰레기통을 원래 위치에 돌려둔다. 청소가 끝난 뒤라 쓰레기통 안은 텅 비어있어서 내용물이 쏟아지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뭐지"

 헤이하치의 목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지만, 하루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

 "도서관 갔다 올게. 저녁밥 먹기 전까지는 돌아올테니까"

 집에 돌아온 하루나는 교복을 갈아입으며 엄마에게 전했다.

 "하루나가 그런 말을 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도서관은 확실히 5시 정도에 닫지. 폐관 시간까지 느긋하게 책 읽고 오렴. 오늘은 할아버지가 닭꼬치데이라 나갔으니까 카레야"

 일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위에서부터 랭크를 매겨본다면 확실하게 5위 안에 들법한 카레라이스. 신키치는 그걸 싫다고 공언하는 드문 인간이다. 그렇기에 아키츠시마의 식탁에 카레라이스가 올라오는 일은 거의 없다.

 거의 없는 카레를 위해 향신료 등이 준비될 일도 없이, 아키츠시마의 카레는 굉장히 심플하다. 시판되는 카레루를 사용하고, 별다른 재료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하루나나 타카오는 카레라이스를 매우 좋아했다.

 "닭꼬치데이라면 시노도 밥 먹고 오겠네"

 신키치가 닭꼬치 집에 나가는 날에는 반드시 시노도 동반시켜서 소금이나 타레가 없는 닭꼬치를 먹이곤 한다. 도그 푸드만 먹던 시노에게는 기쁜 일이리라

 "그럼 다녀올게요"

 현관을 나가자 담요 위에 시노가 엎어져서 자고있다. 타카오의 '약간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고, 신키치는 지극히 선뜻 시노를 집 안에 들여놓도록 허락했다.

 (이대로 집 안에서 키우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겠지)

 "시노는 이대로 집 안에서 사는 거랑 밖의 개집 중에 뭐가 좋아?"

 말을 걸어본들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시노는 힐끗 하루나를 볼 뿐이었다. 본인이 아닌 본견은 '아무거나 좋아'라고 느끼는 것처럼 하루나에게 보였다. 분명 기분 탓이다. 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공통 언어를 쓴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데, 말을 못하는 개의 기분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기노는 기분이 나쁘다던가 배가 고프다던가 산책 가고 싶어 한다고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까? 아니면 시노가 그런 얼굴을 하고 우리들을 보고 있기라도 한걸까?"

 대답을 하지 않는 대신, 시노는 일어나서 다시 제대로 앉더니 하루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짖지도 으르렁거리지도 않고 코를 울리지도 않는다. 꼬리를 흔들지도 않고 귀를 내리깔지도 않는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그저 하루나의 목소리에 반응해서 일어났을 뿐일까.

 하루나는 시노의 앞에 웅크리고 시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볼을 가볍게 만졌다. 싫은 듯이 얼굴을 빼지는 않았지만 만져져서 기쁜 듯이 보이지도 않는다.

 "...음, 시노는 잘 모르겠지만, 그라랑은 말이 통하니까. 분명 어떻게든 되겠지"

 기세 좋게 일어서서 가슴을 편다.

 "열심히 하고 올테니까, 시노도 응원해줘. 아, 할아버지가 닭꼬치 집에서 너무 많이 마시지 않도록 잘 봐주고"

 현관을 닫고 나서는 하루나를, 시노가 뒷발로 귀를 긁으며 배웅해주더니 크게 하품을 하며 몸을 뻗었다. 그리고 담요 위를 몇 바퀴 돌더니 고양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하지만 그 귀만은 무언가를 경계하듯이 쫑끗쫑끗 움직이고 있었다.

***

 중앙도서관은 말그대로 이 마을의 거의 중심부, 관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있는 도서관이다. 이 마을에 세 곳 있는 도서관 가운데 가장 크며 장서 수도 가장 많다. 애초부터 독서 습관이 없는 하루나에게는 그다지 연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온다 하더라도 독서감상문을 쓰기 위해 책을 찾으러 올 뿐이다.

 오랜만에 가본 도서관은 평일 오후라 그런지 나름대로 자리가 많이 비어있었다. 하루나는 책을 읽으러 온 것이 아닌 그라볼라스를 찾으러 왔으므로, 자리 유무는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나름대로 큰 도서관이라곤 하지만, 사람 한 명을 찾기는 쉽겠지. 그렇게 얕보며 관내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하루나는 의도대로 열람 코너 한 켠에 있는 그라볼라스를 발견했다.

 그라볼라스는 학교에서 바로 도서관으로 온 모양이다. 교복을 입은 그대로이며, 발치에는 학교 문양이 들어간 학교 지정 가방이 놓여있었다. 멀리서도 알 법한 두꺼운 책 몇 권에 둘러싸여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 모습으로 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아.

 발견하면 바로 말을 걸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던 하루나였지만, 그라볼라스가 너무나 진지한 모습이라 방해하기가 꺼려졌다. 게다가 그라볼라스니까 도서관에서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된다는 매너를 모를 수도 있다.

 일단 나갈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했으나, 너무 멀리 떨어지면 그의 움직임을 바로 눈치챌 수 없다. 하루나는 그라볼라스를 시선 안에 넣을 수 있는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라볼라스가 있는 자리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동용 책이 늘어서있는 코너, 그 통로의 구석에 살짝 놓여있는 어린이용 의자라면 약간 몸을 기울여서 그가 앉아있는 자리를 관찰할 수 잇어보인다.

 다행히도 이 의자를 쓰려는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나는 일단 아무 책을 읽으려고 주변 책장에 늘어서있는 타이틀을 훑어봤다. 아동용 책만 있지만, '알기 쉬운 해양 생물'이라는 타이틀에 끌려서 그 책을 뽑았다. 표지에는 해수면에 머리를 내밀고있는 돌고래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그러고보니 범고래... 그라는 평범한 범고래가 아니지만, 범고래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 잠깐 읽어볼까)

 표지는 돌고래였지만, 범고래도 실려있겠지.

 (그렇다곤 해도 그라랑 비교하면 돌고래는 스마트하네)

 범고래와 돌고래의 차이점은 겉모습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사진을 보고 돌고래가 더 호리호리하게 보인다.

 (왠지 그라가 살찐 것처럼 느껴져)

 약간 즐거운 기분이 된 하루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읽기로 했다. 아동용 낮은 의자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이 의자를 쓰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살짝 앉는다. 과연 하루나에게는 너무 낮아서 앉기 불편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하다.

 페이지를 넘기자 역시 범고래가 실려있었다. 실려있는 사진에는 그라볼라스와 거의 똑같았다. 이마에 푸른 수정체가 없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가?)

 눈 옆에 있는 하얀 모양을 아이패치라고 하는 듯 한데, 사진의 범고래와 비교해봤을 때 그라볼라스의 하얀 모양은 눈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등지느러미의 근원은 회색이라고 적혀있지만 그라볼라스는 검은색이었다.

 (음, 활발한 생물체며 포유류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헤엄치고... 두 종류의 소리, 콜과 클릭음 사용한다... 아, 그라는 이 클릭음을 사용해서 말하는 걸까)

 범고래가 클릭음을 사용해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고는 당연히 책에 써있지 않았다.

 (식성은 육식... 지능이 높고 먹을 필요가 없다면 습격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인간을 습격하는 케이스는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먹을 필요가 있다면 습격한다는 거겠지, 이거)

 습격해서 먹을 수 있는 생물체의 일례로 오징어와 강치, 돌고래 등이 나열되어있다. 생선을 사용해 해조를 불러들여서 모여든 해조를 먹는 예도 있는 듯하다. 아무튼 뭐든 잘 먹는다고 한다.

 바다에 있으니까 바다에 있는 생물을 먹으니, 혹시 범고래가 육지 동물이었다면 육지 생물ㅡ개나 고양이를 먹지 않을까. 고래의 시체도 먹는다는 문장을 보고 하루나는 그라볼라스가 타케노리의 시체를 먹은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냈다. 

 이 문장을 읽고 있자니 그라볼라스는 뭐든지 먹는 동물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뭐든지 말이다.

 하루나는 한숨을 쉬고 힐끗 그라볼라스를 살펴본다. 그의 자세는 변하지 않고 책을 넘기고 있다.

 (...이 책, 여러가지 쓰여있긴 한데, 히라가나랑 후리가나가 많은 것 빼고는 내용이 전혀 아동용이 아니잖아...)

 그런 감상을 품으면서 페이지를 넘기던 하루나는 '수컷과 암컷의 구별은 힘들지만, 아이를 만들 때에는 성기가 뿅 하고 나타나 금방 알 수 있답니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말그대로 의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런 말을 아동용 책에 적을 필요 없잖아ㅡ! 여기만 히라가나로 전부 써놔서 대충 넘길 셈이야?)

 라고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단 의자에 다시 앉아 책을 덮고 하루나는 교문에서 들었던 헤이하치의 말을 떠올리고 머리를 감싸안고 싶어졌다.

 (...정말이지, 사이토 군이랑 그라는 평소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상상했더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젓고 하루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봤다. 하지만 주머니에 넣어뒀을 핸드폰이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래도 방에 두고 온 모양이다.

 (자주 있는 일이고, 뭐 괜찮겠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했더니 오후 3시 24분이었다. 다시 한 번 그라볼라스를 바라보니 그가 조용히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하루나는 서둘러 책장으로 숨었다. 만나러 왔으니 숨을 필요는 전혀 없는데 왠지 모르게 얼굴을 마주하기가 껄끄럽다.

 다 읽었나 생각했더니 책을 한 권 돌려두려 가는 것 뿐이었다. 짐이나 다른 책이 그대로 있다. 그가 혼자가 된다면 말을 걸자. 그렇게 생각해서 그라볼라스의 뒤를 따라가려고 생각했으나, 문득 그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졌다.

 그라볼라스가 앉아있던 자리에 다가가 놓여있는 책을 훑어본다. 그러고보니 그는 체중이 350키로였다고 했는데, 이 의자는 그 무게를 버틸 수 있을만큼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 공기의자 상태로 책을 읽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할 경우가 아니었다. 하루나는 펼쳐져있는 책을 봤다. 무슨 책인지 잘 모르겠지만, 바다의 사진이 잔뜩 실려있었다.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 그 주변에 놓인 책은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 등, 그리고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 ~원만한 인간관계~', '잘 알 수 있는 예의 작법' 등 매너에 관련된 책을 보고 하루나는 동요했다.

 (...그라는 제대로 사람과 관계를 공부하려고 하는구나...)

 그는 그 나름대로 사람 세계에 섞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주변에 있는 동물을 적당히 죽여서 먹고 다닐까. ...하지만 그런 책에 섞여있는 '나쁜 식문화의 역사', '식사의 터부'라는 책을 발견해버려서 놀라고 말았다. 권두 페이지가 열려있고, 거기에는 '개를 먹는 문화', '포경 문제'라는 글자와 함께 개와 고래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범고래는 고래의 시체를 먹는다. 아까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고 하루나는 굉장히 불안해졌다.

 (...먹어선 안 되는 것을 알기 위해 읽는 거겠지... 그렇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그라볼라스에게 말을 걸어서 물어보면 될텐데.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도 하루나는 그라볼라스가 돌아오기 전에 발빠르게 자리를 뜬다. 아까까지 자신이 책을 읽던 낮은 의자까지 돌아와서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물어봐도 될까. 혹시 그가 죽였다면 당혹스럽겠지. 죽이지 않았다면 안심할까. 그 대신에 그라볼라스가 상처입지 않을까. 그는 사람과 얽히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자신의 먹을것에 대해서도 모색하고 있다.

 그라볼라스에게 있어서 자신은 인간 대표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신과 말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그런 자신이 그를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하루나는 고개를 숙이고 발치를 바라본다. 바닥의 목조가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눈을 감았다.

 폐관을 알리는 관내 방송이 흐를 때까지 하루나는 계속 그대로였다.

 벌써 5시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하루나는 느긋하게 일어나 그라볼라스가 있던 자리를 본다. 그곳에 이미 그의 모습은 없었다.

***

 (나 뭐하는 걸까...)

 2시간 가까이 도서관에 숨어서 제대로 책도 읽지 않고 잠만 퍼잤다. 주 목적이었던 그라볼라스와 대화도 못하고, 자전거를 끌고 느릿느릿 돌아간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하루나였으나, 왠지모르게 멀리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대로라면 다시 타카오한테 '죽어가는 얼굴' 소리를 듣겠지. 

 기분전환을 하고 돌아가자. 그럴 생각이었는데, 와버린 곳은 또다시 카라키하마였다. 정말로 뭐하고 있는 걸까. 쿠로다 타케노리와 만나고, 그라볼라스와 만났던 장소. 굉장히 기분전환이 될 것같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도 하루나는 자전거를 멈추고 둑 위에서 바다를 바라봤다. 해가 저무는 하늘. 도서관에서 봤던 책에 실려있는 바다와 전혀 다른 색을 한 바다.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나는 멍하니 있었다.



 생물체가, 있다.

 움직이지 않는 생물체가 있다.

 먹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먹어보는 것이다.

 일어났더니 아직 배가 무거웠다.

 전에 했던 식사가 아직 들어있다.

 잔뜩 먹으면 배가 늘어난다.

 더, 더, 늘리고 싶다.



 "하루나아아아아아아! 안녀어어어어어어엉!"

 들어본 적 있는 커다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그러고보니 입학식 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나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가방을 메고 싱글벙글 웃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그라볼라스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 그라"

 지금, 하루나는 그를 의심하고 있다. 고양이나 닭을 죽이고 먹은 범인으로서. 그 의심을 부정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어보면 금방 끝날 일인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진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그라볼라스를 의심한다는 사실을 그가 모르는 상태로 진실을 알고 싶다.

 별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하지만 하루나는 가능한 한 그와의 관계를 이 이상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야말로 그라볼라스가 헤이하치에게 말했던 말대로 '말하고 싶은 말을 씀으로써 그 상대와의 관계성이 유동화하는 게 무섭다'는 말이었다. 이 말을 하루나가 알 턱이 없었지만.

 "역시 내가 무서운가 보구나. 그래도 좋으니까 대화하자, 뭐든 좋으니까"

 그라볼라스의 태도는 평소대로다. 천천히 하루나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옆에 선다.

 "이제부터 어디 가?"

 "집에 가려고..."

 그렇다, 벌써 5시 반이 지나고 있다. 지금 돌아가는 도중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지만 핸드폰을 두고 와서 할 수가 없다. 세워둔 자전거에 타려다가 문득 그라볼라스가 신경쓰여서 그쪽을 바라봤다.

 "무슨일이야, 돌아가지 않는 거야?"

 그라볼라스는 서있는 채로 하루나쪽을 보고있다. 그라볼라스가 보고있던 것은 하루나의 뒤에 펼쳐진 잡목림이었으나, 그녀가 그 사실을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그라는?"

 "중간까지 말하면서 같이 가자. 아, 내가 하루나의 영역에 다가가기 싫다면 안 갈게"

 "영역이라니... 집이라고 말하라구. 그럼 중간까지 같이 가자"

 자전거는 타지 않고 걸어가는 하루나의 옆에서 그라볼라스가 발걸음을 맞춘다.

 "그라는 나랑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라기에는 둘의 키차이가 20센치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하루나가 그라볼라스를 올려다보는 형태가 되버렸다. 어느샌가 그라볼라스는 미소를 지우고 끊임없이 이마를 매만지고 있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죽 둘러보더니 평소처럼 웃어보인다.

 "그렇지, 무슨 말을 하고 싶냐고 하면 역시 잘 모르겠는걸. 아, 그래. 전에 하루나한테 물어봤던 우리들의 천적을 죽이는 방법 말인데, 시간을 들이면 어떻게 될 지도 몰라. 아는 사람을 찾기 보다는 스스로 공부하는 편이 멀리 돌아가더라도 확실하고"

 그러고보니 그는 고향을 습격한 괴물 퇴치 방법을 찾기 위해 왔다고 했다. 여러 일이 있어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시간을 들인다니..."

 "사람들의 죽이는 방법이 굉장히 풍부하니까 그걸 느긋하게 공부할 거야
"

 서슴없이 말하는 그라볼라스는 역시 웃고 있었다. ...그는 하루나 앞에서는 잘 웃어보인다. 뭐가 즐거운 걸까. 뭐가 재밌는 걸까. 자신은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얼굴에 경련을 일으킬 지경인데.

 "웃으면 별로 안 좋아?"

 "어..."

 자기가 생각하던 사실을 들킨 기분이다. 지금 그는 웃지 않고 입술을 꾹 닫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 무서운 분위기의 그 표정에 하루나는 몸을 떨었다.

 "얼굴 근육이란 움직이기 굉장히 힘들어... 이게 내 보통 얼굴인데, 이래서는 무서운 모양이고"

 "그게 보통 얼굴이라니, 이상한데... 엄청 무서워"

 "응, 보통 얼굴을 했더니 헤이하치한테 해태같다는 말을 들었어. 하지만 웃어도 하루나는 나를 무서워하는걸"

 그라볼라스는 금방 표정에 미소를 되돌린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이 얼굴이 좋다.

 "...즐거운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에 웃어야지, 이상하다구... 항상 웃는다니"

 "하루나랑 만날 때면 항상 즐거운걸? 하지만 제대로 된 표정을 하려고 열심히 해도 이 얼굴이랑 해태같은 얼굴밖에 나오지 않아. 의식하지 않으면 아마 제대로된 표정도 지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헤이하치한테 표정이 이상하다고 지적받은 것도 딱 한 번 뿐이고"

 헤이하치 앞에서는 '보통' 얼굴이 가능하고 하루나에게는 '이질적'인 미소밖에 짓지 못하는 그라볼라스. 그 차이가 무엇일지, 하루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이렇게 볼 주변이랑 미간에 힘을 빼야해"

 일단 표정에 대해 조언해본다. 그라볼라스에게 의심을 품은 채로 이렇게 느긋한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화제를 바꿀 만큼 하루나도 말주변이 좋지는 않다.

 "의도적으로 힘을 빼기는 굉장히 어렵네. 이걸 무의식적으로 해낸다니, 사람은 대단해"

 "그라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루나한테 그렇게 보였다면 좀 싫은걸"

 그라볼라스는 자신의 볼을 자기 손으로 잡아당겼다. 겉보기보다 딱딱하게 되어있는 그 볼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사람이 되기 위해 온 게 아닌걸. 사람의 기법을 알기 위해 여기 온 거야. 이 모습은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계속 이대로 있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 모습으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으니까"

 얼굴 근육을 잡아당기며 이리저리 메만지던 그라볼라스였지만 결국 포기하고 다시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얼굴 근육이란 어렵네"

 "그라는..."

 그라볼라스는 어디까지 인간에 맞출 수 있어?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작은 편이 좋아'라는 말에 작아지고, '평범하게 걸어다녀서 놀라지 않는 건 인간 정도'라고 말했더니 인간이 되버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이상한 범고래다. 범고래가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식 범위를 벗어났건만, 인간을 먹어서 인간의 모습 되다니 더 할 나위 없는 비상식이다. 다른 생물체도 먹는다면 그 생물체의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개나 고양이나 닭을 먹는다면, 그는 그 모습으로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서운 생각이 되버렸어...)

 무언가 화제가 없을까. 문득 하루나는 헤이하치와 했던 몇몇 대화를 떠올렸다.

 "사이토 군이 그라는 제대로 먹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평소에는 뭘 먹어?"

 이건 자연스러운 화제... 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안 먹었어. 어제는 젤리 먹었고. 그제는 토마토였나. 그 전날은 빵. ...솔직히 뭘 먹어야 좋은지 잘 모르겠어. 헤이하치는 좋아하는 거를 먹으면 된다고 했는데, 사람이 먹는 것중에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고양이를 먹었어'라는 쇼킹한 대답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했다. 하지만 그가 도서관에서 읽던 책이 신경쓰인다. ...설령 그가 개나 고양이를 먹었다더라도, 그걸 자신에게 솔직히 말해줄까? 그는 하루나가 개를 기르는 사실을 알고있다. 그 생물체를 일부러 먹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같다.

 하루나는 고개를 젓고 그라볼라스에 대한 의심을 일단 걷어낸다. ...그렇다고는 해도, 확실히 헤이하치의 말대로, 제대로 먹지 않고 있다.

 "그라는 일단 쿠로다 군... 의 집에서 살고 있지"

 "맞아"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는 밥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

 "쿠로다 타케노리의 아빠와 엄마는 있지만, 식사는 알아서 준비해서 스스로 먹는 듯해. 돈으로 물건을 사는 사회구조는 알겠어. 그래서 그 돈을 엄마한테 받았지만, 그걸로 뭘 사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

 "잘 알 수 없는 부모들이네..."

 방임과는 동떨어진 가족들에게 둘러싸여있는 하루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모다.

 "헤이하치는 우리집을 보고 터무니없는 방임주의라고 했어"

 방임주의에도 정도가 있지. 그의 식생활은 매일 3끼 확실히 챙겨먹는 하루나에게 있어서는 충격과 공포였다. 혹시 자신이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쿠로다 타케노리가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서글퍼졌다.

 "그 밖에는 뭘 먹었어?"

 그라볼라스의 입에서 좀 더 제대로된 식사가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라볼라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식사'가 아니었다.

 "물 외에는 설탕, 소금, 식초, 간장, 된장, 버터, 마가린, 식용류, 샐러드기름, 미링, 후추..."

 "자, 잠깐 기다려봐 그라..."

 그라볼라스의 입에서 나오는 각종 조미료를 하루나가 막아섰다.

 "그건 식사라고 하지 않아!"

 "확실히 자주 먹고 싶다고 생각되진 않더라. 일단 거실이던가, 거기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먹어봤는데, 이상한가?"

 "당연하지... 그건 맛을 내기 위한 조미료들이야. 잘도 그런 걸 먹고 배탈나지 않았구나... 아무튼, 보통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는 편이 좋아"

 "사람같은 식사, 해보고 싶다고는 생각하지만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

 같은 식사. 인간다운 식사.

 (그라한테 평범한 밥을 먹여주고 싶다...)

 하루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가 평범한 음식의 맛을 알고, 그걸 맛있다고 느껴준다면 이상한 것을 먹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된다. ...역시 자신은 그라볼라스를 믿지 않는 모양이다. 자신을 속이고 슬쩍 동물들을 죽이고 먹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라, 우리집에 밥먹으러 올래?"

 그런데도 말해버렸다. 그를 믿지 않는데, 식탁을 함께 둘러쌀 각오따윈 되어있지도 안ㄶ는데, 입에 담아버렸다.

 "괜찮아? 정말로?"

 그라볼라스가 기쁘다는 듯이 웃는다. ...어차피 저건 그가 만들어낸 미소다. 그러니 하루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자전거 브레이크를 향해 의미도 없이 시선을 보낸다.

 "응, 오늘은 카레니까 한 명 정도 늘어나도 아무 문제 없을 테고... 아, 그라 핸드폰 갖고있어? 있으면 잠깐 빌리고 싶은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데려가면 역시 혼나리라.

 "갖고 있어. 작동하지 않지만"

 그라볼라스가 꺼내보인 핸드폰은 액정 화면에 커다랗게 금이 가서 아무리 봐도 쓸만해보이지 않았다. 바꾸면 좋으련만... 이라고 가볍게 말하려던 하루나였으나, 그의 가정환경을 떠올리고 그만두기로 했다. 

 "뭐 할아버지도 없고 괜찮겠지... 응, 제대로 맛있는 카레를 대접해 줄게"

 "기쁘다아 고마워"

 "천만에..."

 기세 좋게 말한 일이긴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도와준 보답을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밥을 대접하는 정도라면 벌을 받지는 않을 터. '바다에 빠졌을 때 이 범고래가 살려줬으니, 그 답례로 밥을 대접한다'라고는 가족들에게 소개하지 못하므로 적당한 변명을 생각해야 하지만.

 "사람의 식사라. 기대된다. 뭘 먹어도 좋은지는 모르지만, 먹어보고 싶은 건 잔뜩 있으니까"

 "뭘 먹어보고 싶어?"

 "입에 들어갈만한 거라면 뭐든지. 사람 이외라면"

 가볍게 대답하는 그라볼라스였으나 하루나는 무서웠다. '사람 이외'라면 범위가 너무 넓다. 인간은 먹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기뻐할 정도로 하루나는 낙권적이 될 수 없었다.

 "...뭐든지, 는 먹지 말아줘"

 간신히 그렇게 말하면서.

 "그렇게 무차별하게 먹지는 않는데. 신용이 없구나아"

 순진무구하게 말하는 그라볼라스의 말이 하루나의 가슴을 옅게, 하지만 길게 도려냈다.

***

 "혹시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맛있다고 말해야 해. 진짜 감상은 나중에 나한테만 말해주면 되니까"

 "응"

 "개한테 양파가 독이니까 먹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범고래한테 카레는 독... 이지는 않겠지?"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대단한 독이 아니라면 괜찮고"

 "...만에 하나 카레가 그라의 몸에 독이라면 무리해서 먹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리고 먹기 전에는 잘먹겠습니다, 다 먹은 다음에는 잘먹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건 알아"

 "수저 쓰는 방법은?"

 "대충 알아"

 "아, 체중 350키로라고 말했는데, 우리집 바닥이 꺼지거나 하지는 않지?"

 "그건 조심하고 있어. 의자에 앉을 때에는 확실하게 허리를 띄우고 있으니까 박살날 일도 없고"

 "역시 계속 공기의자 상태였구나... 괴롭겠지만 참아줘. 음, 그 밖에 뭐가 있을까..."

 하루나가 걸어가면서 주의사항을 그라볼라스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슬슬 집에 가까워졌을 즈음이다.

 "이상한 말을 하면 안 돼"

 "하루나가 말하는 이상한 말의 기준을 아직 확실하게 모르겠어. 그나저나 앞에 있는 사람이 하루나를 보고 있는데"

 "엥"

 앞을 보자 집 문앞에 타카오가 하루나와 그라볼라스 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석간 신문을 가지러 나온 모양이다. 그 타카오가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을 보고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하루나는 속으로 '뜨아아...'라고 소리쳤다.

 "다, 다녀왔어, 타카오..."

 "어서와 누나. 늦어지게 되면 연락하라구, 엄마도 나도 걱정하니까 조심해. ...그런데 이쪽은? 아, 저는 타카오라고 해요. 누나를 바래다 줘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굉장한 접대 표정이네...)

 좀 더 표정을 만들라고 평소에도 타카오에게 말하고 있지만,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접대 표정은 조금 기분나빴다. 게다가 평소에는 누나(쨩)이라고 부르는데 이럴 때에는 누나(상)이라고 부른다. 위화감이 너무 커서 그만둬주면 좋겠다.

 "처음뵙겠습니다, 쿠로다 타케노리입니다. 하루나에게는 언제나 신세지고 있습니다"

 "아뇨, 이쪽이야말로, 누나가 언제나 신세지는 모양이라..."

 아무래도 사교 언어 대전이 될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루나가 서둘러 타카오에게 말을 건다.

 "저, 저기, 타카오. 바래다준 보답으로 쿠로다 군에게 저녁밥을 대접하고 싶은데, 여기까지 왔으니까 말이야, 응. 게다가 오늘은 카레고, 카레는 많이 만드니까 한 명 정도 늘어도 괜찮겠지, 그치"

 "그렇구나. 하지만 쿠로다 씨의 집안 사정도 있을테니까 누나 혼자 결정하는 것도 좀..."

 "우리집은 방임주의라 괜찮아요. 대접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런가요. 딱히 상관은 없지만..."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는 그라볼라스에게, 타카오도 역시 웃으며 대답한다. 그라볼라스는 정말로 웃고 있지만, 타카오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하루나는 눈치챘다.

 "그나저나 누나, 엄마한테 말은 해놧어?"

 했을 리가 없다고 알면서도 이런 말을 꺼내는 타카오는 심술궂다고 마음 깊이 생각했다.

 "안 했어..." 

 "그럼 갑작스런 손님이 왔다는 사실을 제대로 누나 입으로 설명해야겠네"

 "아, 응 그렇지... 이, 일단 언제까지 현관에 있지 말고 들어가자!"

 당황하며 자전거를 정원에 세우고, 그라볼라스와 타카오의 등을 가볍게 두들기며 집 안으로 들어간다.

***

 갑작스런 손님에 어머니 이즈미는 '하루나가 남자애를 데려오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고 말했다. '엄마, 이런 때에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해야지'라고 타카오가 태클을 걸고, 그게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한 대화의 전부였다.

 (할아버지가 없어서 다행이다...)

 식탁의 분위기가 지금 이상으로 무서워질 게 분명했다. 이즈미는 어딘가 기뻐보이지만, 타카오는 굉장히 불편해보인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건 만들어낸 접대 얼굴일 뿐이다.

 "잘먹겠습니다"

 식사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아키츠시마 가족의 오늘 저녁밥은 카레라이스에 야채 샐러드. 심플했다. 카레의 내용물은 돼지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 매운 카레루를 사용한 굉장히 평범한 카레다. 건더기는 큼지막하게 썰었으며 잘 익어서 내용물이 부서지는 것 정도밖에는 특징이 없다. 하루나는 잘 익은 편이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타카오는 감자가 좀 더 딱딱한 편을 좋아한다.

 (일단 평범하게 먹어야지...)

 카레를 먹는 방법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하루나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카레와 쌀밥의 경계를 조금씩 무너트리며 숟가락으로 퍼냈다. 녹아서 부서지는 감자가 제대로 씹지도 않았는데 입 속으로 들어가는 점이 너무나도 좋았다.

 하지만 매운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그라볼라스에게는 약간 매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원래 바다에서 살던 그라볼라스가 뜨거운 음식에 화상을 입지는 않을까.

 슬쩍 옆에 있는 그라볼라스를 보고, 하루나는 놀랐다. 마신다, 정도는 아니지만, 숟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다. 제대로 씹어먹는지도 잘 모르겠는 스피드다. 한 입 먹고 씹는 사이에 다음 한 입을 이미 옮기고있다.

 "...잘먹었습니다. 엄청 맛있었어요"

 그라볼라스가 미소를 띄우며 그렇게 말했을 때, 가족 중에 가장 밥을 빨리 먹는 타카오조차 3분의 1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다니 기쁘네, 더 먹을래?"

 "네 부탁드릴게요"

 이즈미가 그라볼라스의 접시에 새로운 카레를 담는 사이, 그는 샐러드에 드래싱도 뿌리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카레만큼 빠르지는 않게 천천히 먹고 있다.

 "...그러고보니 쿠로다 씨는 누나랑 어떻게 알게 됐죠?"

 역시 이 질문이 왔다... 라고 하루나는 태연하게 카레를 먹으며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날카로운 타카오니까. 그라볼라스가 범고래라는 사실까지는 간파하지 못하겠지만, 틀림없이 약간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음, 봄방학 때 카라키하마에서 오카리나를 불고 있길래 잠깐 얘기하고, 4월부터 같은 학교네 우연이네ㅡ 하면서 알게 됐지"

 "그렇군요"

 말을 맞추기 위해 전해둔 자신의 말을 그라볼라스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과연, 그래서 오늘은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했다는 말이군요?"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ㅡ!?)

 하루나가 도서관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라볼라스는 모를 터였다. 이걸로 하루나가 도서관에 있었다고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라볼라스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그라볼라그가 태연하게

 "네, 전 국어를 잘 못해서 사전류를 사용했어요. 사람이 많아서 둘이 같이 앉지는 못해서 함께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그치?"

 "어, 응, 잠깐 책 읽고 있었더니 의욕이 사라져서..."

 미소지으며 말하는 그라볼라스에게 어떻게 동조한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으면서,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누나라니까"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하는 타카오가 무섭다

 "미안하게 됐네요..."

 그때, 카레를 잔뜩 가져온 이즈미가 그라볼라스 앞에 '자' 하며 접시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식사를 시작한 그라볼라스였으나, 아까처럼 빠르지는 않았다. 대화가 중간에 끊겨서 다행이다. 하루나도 식사를 재개한다.

 "그나저나 5시에 폐관했을텐데 왜이렇게 늦게 왔어? 어디 들렀다가 왔어?"

 다시 아픈 곳을 찔러온다... 하루나가 변명하기 전에 그라볼라스가

 "네, 잠깐 카라키하마에서 바다 보고 말하면서 느긋하게 돌아왔어요. 미안해요"

 라고, 전혀 망설임 없이 말하기에 하루나는 입을 열지 않고 끝났다.

 "뭐, 뭐 그렇게 타카오도 조금 늦은 정도로 화내지 말라구..."

 접대를 잘 하는 타카오가 이렇게나 손님을 추궁하다니, 정말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원래부터 타카오는 집에 가족 이외의 사람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나가 친구를 집에 데려올 때에도 '사전에 말해. 집 안에서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예고도 없이 그라볼라스를 데려와서, 게다가 저녁밥까지 같이 먹으니 꽤나 열받은 모양이다.

 (그라가 돌아가면 또 잔소리 듣겠다...)

 "그나저나 어때? 그... 쿠로다 군, 카레가 마음에 든 모양이네"

 뭔가 화제를 바꾸자. 그렇게 생각해서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에게 말을 걸었다.

 "응, 간장이나 소금이랑은 전혀 달라. 혀에 자극이 있긴 한데, 이게 맵다는 맛이겠지. 쌀의 단순한 맛과 섞여서 엄청 맛있어. 신기하네"

 (맛있다면 다행이지만, 그 감상은 여러모로 이상하잖아ㅡ!)

 "이렇게 맛있다는 사람은 오랜만이야ㅡ"

 왠지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이즈미는 아무런 경계를 품지 않고 있는 듯 하지만, 타카오는 카레를 먹으면서도 슬쩍 그라볼라스를 관찰하고 있다. 좀 더 기분 좋은 식탁을 제공해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다.

 (정말로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네...)

***

 "잠깐 쿠로다 군 바래다 주고 올게"

 맛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미묘했던 저녁 식사 후, 자전거를 끌고 하루나와 그라볼라스가 집을 나서는 찰나, 긴 산책 겸 저녁식사로부터 돌아오는 신키치와 시노 일행과 딱 마주쳤다.

 "하, 할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술이 살짝 들어간 듯한 신키치는 '음...'이라며 대답하고 그라볼라스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꽤나 박력있는 안광에도 그라볼라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미소지어보였다.

 "처음뵙겠습니다, 쿠로다 타케노리라고 합니다"

 "저기, 내가 공부때문에 신세를 져서 그 답례로 저녁을 대접했어, 그런 거야, 응"

 "그러냐..."

 신키치는 그라볼라스를 뚫어져라 쳐다본 뒤, 발치에 있는 시노를 내려봤다. 시노는 신키치와 그라볼라스 사이에 들어와 시선을 그라볼라스의 복부에 고정하고 있었다.

 "나 잠깐 요앞까지 쿠로다 군 바래다 주고 올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루나와 그라볼라스가 어깨를 나란히하고 대문을 나가는 모습을, 신키치와 시노가 묵묵히 지켜봤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 신키치가

 "시노, 내가 뭐 다른 말이라도 했어야 했을까..."

 라며 말을 걸었지만, 시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

 "정말 맛있었어?"

 벌써 어둬우지기 시작해서 가로등이 밝혀주는 밤길을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간다.

 "맛있었어. 저런 게 인간다운 식사구나. 헤이하치가 항상 같은 것만 먹으면 질리지 않냐고 말했는데, 왠지모르게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런걸 일상적으로 먹으니, 매일 같은 음식을 먹으면 질릴 수도 있겠네. 이렇게 보니 내 식생활이란 심플했었구나"

 그라볼라스가 어딘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 하루나도 약간 기뻐졌다. 인간의 식사가 맛있다고 생각해준다면, 이 주변의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먹어치운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그래, 만에 하나라도 그라가 고양이같은 걸 먹었다고 해도, 이게 맛있었다면 일부러 사로잡아서 먹으려고는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지?)

 결국, 자신은 그라볼라스에게 진상을 물어보지 않았다. 자신에게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겁쟁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이 이상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을 수밖에 없다.

 이건 '도피'다. 얼핏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하루나는 편한 쪽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라볼라스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루나 자신이 상처받기 무서웠기 때문이다. 

 (싫다...)

 그라볼라스에 대한 의심,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 비참하게 죽어버린 베르나르도나 닭에 대한 연민. 그 연민에 대한 스스로의 위선.

 "하루나는 지금 슬퍼?"

 옆에 있는 그라볼라스가 하루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아, 아니,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 그건 그렇고, 그라 타카오한테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데... 내가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
 화제를 바꾸기 위해 적당히 생각나는대로 말해봤으나

 "헤에, 하루나 오늘 도서관에 있었구나"

 ...아무래도 자기 무덤을 파버린 모양이다

 "하루나가 말을 맞추라고 했으니까 적당히 맞췄을 뿐인데"

 (역시 스스로 무덤팠어!)

 "어어음, 도서관은 책을 보러 갔을 뿐이지 딱히 그라랑 사이토 군이 하는 말을 들은 건..."

 "아ㅡ 그 쓰러진 소리는 역시 하루나였구나. 뒷모습이 하루나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하루나의 뇌내에서 타카오의 '말할수록 자폭의 연속이구나 누나'라는 목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이 든다.

 "...미안"

 "하루나는 자주 사과하네. 뭐가 나쁜 건지 전혀 모르겠어"

 "사이토 군이랑 하는 대화를 엿들은 거랑, 도서관에서 그라를 훔쳐본 거를 사과하고 있어..."

 "흐음"

 화낸다기보다는 마음속으로 별로 상관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라볼라스가 대답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관심있는 곳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모양이다.

 "그라는 사이토 군이랑 제대로 대화하곤 하지... 약간 말투가 이상하지만"

 "헤이하치는 적극적으로 나한테 말을 걸어오니까. 하지만 그가 대화하고 싶어하는 상대는 내가 아니라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이니까, 미안하긴 하지만"

 "...사이토 군이나 쿠로다 군의 부모님에게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

 주제넘은 질문이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비교해보면, 말하지 않는 편이 나한테 있어서 형편이 좋으니 말하지는 않을 거야"

 형편이 좋다. 정말이지 합리적인 이유다. 반론할 건덕지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하루나는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는 그라볼라스가 싫었다.

 "하루나가 말하고 싶다면 막지는 않아. 내가 바다에서 온 범고래고, 쿠로다 타케노리를 먹고 변화했다는 사실을"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알고 하는 말이야?"

 "할 수 없어?"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일단,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누가 믿어준단 말인가. 만에 하나 믿는다고 하면 그라볼라스는 어떻게 될까.

 (나도 내 형편에 나쁘니까 진실을 말할 수 없고, 물어볼 수도 없어...)

 아까까지 싫다고 느꼈던 합리적인 이유를, 혀가 마르기도 전에 똑같이 하는 자신의 모습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혐오감이 느껴진다.

 "저기, 하루나. 왜 그렇게 괴로워보여? 어디 아파?"

 "잠깐 자기자신이 싫어졌을 뿐이야..."

 그라볼라스는 곤란하다는 듯이 올른손을 턱 아래 괴듯이 올려두었다. 그 동작이 자연스러운 건지 일부러 그런건지, 하루나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랑 말하기가 하루나에게는 그렇게 괴로운 일이야? 나는 정말 즐거운데, 내가 즐겁기 위해서는 하루나가 괴로워야 한다니. 그럼 곤란한걸"

 어조는 별로 곤란해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들린다. 별로 그라볼라스와 대화하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단, 그와 대화함으로써 보이는 진실과 거짓이, 자신에게 있어서 고통일 뿐이다.

 "그라 탓이 아니야. 내가 혼자 점점 부정적이게 굴러갈 뿐이니까... 하지만 왜 그라가 곤란해?"

 "하루나랑 대화하고 싶은데 하루나가 괴롭다면 대화할 수 없잖아"

 이건 그라볼라스 나름대로 하루나를 신경써주는 걸까.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그라볼라스가 하루나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걸까.

 어째서, 자신인가. 사람 모습을 빌리고 사람의 말을 쓰는 지금, 그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을 터이다. 헤이하치같은 사람도 대화상대가 되어주는데.

 "그라는 왜 나랑 말하고 싶어하는데? 다른 사람은 안 돼?"

 그렇게 물어보자 그라볼라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처음으로 대화했던 상대가 하루나였고, 그라볼라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하루나니까 그렇다고 생각해. 이건 이제 고정관념같은 개념이려나. 아니면 강박관념? 하루나 이외의 사람과는 그라볼라스라는 생물체로서, 진정한 의미로 대화할 수 없다고 내가 느껴버리는 모양이야"

 기묘한, 그리고 애매한 이유다. 게다가 그라볼라스의 진짜 이름을 지어준 부모는 자신이 아닌 타카오다. 그렇게 생각하던 하루나는 그가 처음에 영어로 말을 걸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라는 영어도 말할 수 있잖아. 영어로 누군가랑 대화해본 적은 없어?"

 "...영어로 말을 걸어보긴 했는데, 도망가거나 뭔지 잘 모르는 물건을 던지거나 둘 중 하나였어"

 "헬로ㅡ 헬로ㅡ 라고 하면서?"

 "그래, 헬로ㅡ 헬로ㅡ 말하면서 다가갔더니 얻어맞아썽"

 잘 모르는 물건이라니, 돌이라도 맞았을까. 확실히 갑자기 말을 걸면 깜짝 놀라긴 하겠지만, 돌을 던질 정도는 아닐텐데

 "그건, 만난 사람이 나빳네, 응..."

 본 적도 없는 타지에서 도망가거나 적의를 갖지 않고 자신과 대화해준 처음 사람. 그라볼라스에게 있어서 하루나는 그런 존재였다. 그게 얼마나 그라볼라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그런 체험을 해본 적 없는 하루나에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은혜를 갚고 싶다고 생각해, 가 아닐까? 그런 개념은 여기 와서 알았으니까 정말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없다는 듯이, 그라볼라스가 말한다.

 "그리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그저 그뿐인 일을 은혜라고 느낀다면, 목숨을 구해준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에게 얼마나 은혜를 느껴야 할까.

 "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일이야. 그러니까 하루나가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고 싶어"

 자신은 그라볼라스의 무엇이 싫은지. ...그라볼라스가 사람답지 않은 말을 하는 것. 하지만 원래 인간이 아닌 그라볼라스에게 인간다움을 강요하는 일은 자신의 고집이 아닐까.

 "나는 그라가 상식 범위 안에서 행동해주기만 하면 그걸로 됐어"

 그러니까 이 주변의 생물체를 죽이고 먹지는 말아줬으면 해. 그런 말을 덧붙이기는 간단했지만, 하루나는 그러지 못했다.

 "응. 내가 하루나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지적해줘. 고칠 수 있으면 고칠테니까"

 "그건 고치지 못하겠으면 고치지 않겠다는 뜻이야?"

 "밥먹지 말라던가 자지 말라던가 숨쉬지 말라던가 하는 건 역시 무리니까. 조금 참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참으라고는 하지 않아..."

 "그럼 다행이다"

 그라볼라스가 웃는다. 즐거운 듯이 웃는다.

 그 미소가 단 한 번 봤던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해서, 무심코 하루나는 홀린듯이 바라보고 말았다.



 그라볼라스는 하루나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에게 무엇을 느껴야 할까.

 카라키하마에서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사람의 말을 하는 이상한 범고래. 이름을 지어준 범고래.

 작아지고, 사람이ㅡ좋아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범고래.

 미지의 생물과 조우했다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일까.

 처음 만나서 이름을 지어줘버린 사실에 대한 의무감일까.

 자신에게 은혜를 느끼는 그라볼라스에게 상응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느끼는 걸까.

 하루나는 명확한 답을 낼 수 없었다.

 그저.

 그라볼라스를 싫어하게 되고 싶지 않았다.

 몸집은 엄청 크지만, 사람과 잘 어울리고, 멀고 깊은 바다에서 고향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찾아온, 이단의 범고래.

 작아지고 사람이 되고 사람의 상식을 배우며 익숙해지려고 하는 이상한 범고래.

 고양이 머리와 닭의 몸통을 먹었다고 하루나가 의심하는, 날카로운 이빨과 커다란 입을 가진 범고래.

 카레라이스를 맛있다고 말하며 먹는 순수한 범고래.

 그런 범고래를, 하루나는 싫어하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아무일도 없다면, 동물들의 이상한 변사 사건이 어쩌다가 일어났을 뿐으로 끝나지 않을까.

 그라볼라스에 대한 의심도 이윽고 사라지지 않을까.

 그렇기에 하루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날은 그라볼라스와 헤어지고 말았다.

 그랬는데.

***

 아침부터 비가 엄청 내리고 있다. 이런 날은 자전거 통학하기가 힘들다. 레인코트와 장화로 몸을 감싼 하루나는 빠르게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도로에 고인 물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되도록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여기서 바람이 강해지면 더 큰일이겠는데...)

 그리 덥지는 않지만, 레인코트 탓에 땀이 찬다. 빨리 학교 가서 입고있는 레인코트와 장화를 벗고 싶다. 그런 생각과 함께 자전거를 달리던 하루나였으나, 통학로의 중간쯤에 있는 하천가 도중에 자전거를 세웠다.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소음의 세계. 그 한가운데에 본 기억이 있는 교복과 등이 우산도 걸치지 않고 웅크려있다. 

 (...그라?)

 잘못봤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뭘 하고있는 걸까. 원래 해양생물이니까 젖는 일에 저항감이 없는 걸까, 우산도 쓴다는 상식을 알아두면 좋겠다.

 "그라..."

 그의 등에서 천천히 다가가려 한 하루나였지만, 그 전에 그라볼라스가 일어서서 돌아봤다.

 "여, 하루나. 안녕. 아, 좋은아침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언제나처럼 웃는 그의 입가에는 붉은 무언가가 살짝씩 묻어있다.

 그 손에는 하얀 개의 시체가 있었다.

 어째서 죽었는지 한 눈에 알았을까.

 머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마른 모습으로, 뼈와 가죽 외에는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하얀 몸뚱아리.

 검붉게 변색된 근육의 단면에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라볼라스의 발치에도, 피의 흔적은 없다.

 붉은 것은, 그라볼라스의 입과, 그리고 손 뿐이었다.




 하루나는, 도망쳤다.

 자전거를, 그저 달렸다.

 단차에 들이박아 옆으로 미끄러져 자전거와 함께 지면에 떨어지고, 팔과 다리를 긁혀도, 그 모든 고통을 무시하고 일어서서 그저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때, 하루나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놀람일까. 공포일까. 분노일까.

 어느것도 아니었다.


 슬픔이었다.

 그저,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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