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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7일 월요일

단편 라노벨 번역 : 그라샤치 제 5장 퍼스트 컨텍트의 끝에

 "하루나,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얼굴빛이 안 좋은데"

 1교시와 2교시 사이, 짧은 쉬는시간에 치토세가 말을 걸어왔다. 약간 발간 하루나의 이마를 가볍게 당긴다.

 "오늘 아침에 자전거가 미끄러져서 자빠졌어... 약간 긁혔나봐"

 하루나는 소매를 걷고 두 팔을 보였다. 피부가 긁혀서 아파보이는 그 자국에, 치토세가 눈썹을 치켜세운다. 

 "이건, 오늘 목욕이 쓰라리겠네... 소독하는 편이 좋아보이는데 수업 시작하기 전에 양호실 갔다오지 그랬어"

 "조금 아플 뿐이지 별 일 아니야...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딸랑이도 고장났고 가방은 더러워졌고,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도시락 내용도 비참한 꼴이 됐을 거고... 이래저래해서 풀죽어있을 뿐이야"

 하루나는 책상에 엎어지더니 그대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풀죽어있는 이유는 이게 아니다. 진짜 이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 봐버린, 그라볼라스와 개에 대한 말을.

 하얀 개. 젖은 털 끝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던, 머리가 없는 개. 몸뚱이 안에서 보였던 색이 다른 부분은 뼈일지도 모르겠다. 그 개를 끌어안고 있던 그라볼라스의 손은 빨갰고, 하루나에게 웃어보이는 그 입주변도 빨갰고ㅡ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

 "아ㅡ 응, 갔다와"

 하루나는 기세 좋게 일어나서 교실을 나서 여자화장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사용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화장실의 가장 앞의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위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토해냈다. 아침밥 내용이 싫어도 떠오르게 되는 냄새가 코를 찔러 구토가 가속된다.

 예비종이 울리기 직전에 치토세가 부르러 올 때까지, 하루나는 계속 토하면서 울었다. 심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온 하루나에게, 치토세는 그저 '얼굴, 제대로 씻고 와' 라고만 말했다.

***

 "안녕하세요, 지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1교시가 끝나갈 무렵, A반의 정적을 깬 것은 기세 좋게 문을 여는 소리와 쿠로다 타케노리의 건강해보이는 인사였다.

 "...쿠로다, 좀 더 조용히 들어오도록. 그리고 빨리 자리에 앉아라"

 초로의 영어교사가 불편하다는 듯이 째려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케노리는 싱글싱글 웃으며

 "네,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머리 끝부터 바지 소매, 가방까지 쫄딱 젖은 타케노리는, 물방울을 털지도 않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았다.

 (고우텐 녀석, 뭐하는 짓인지...)

 웅성거리는 교실의 분위기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선생님이 칠판을 분필로 두들기던 와중에 헤이하치는 질려하면서도 뒷자리에 있는 타케노리를 신경썼다. 이런 때 타케노리가 핸드폰을 고장난 채로 가지고 다니니 불편한 것이다. 지각하는 이유도 쫄딱 젖은 이유도, 수업이 끝날 때까지 물어볼 수가 없다. 

 (아침부터 비가 왔으니 우산이나 비옷을 챙기지 않았을 리도 없고, 이상하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까지, 헤이하치는 타케노리가 신경쓰여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수업이 끝나자 헤이하치는 바로 타케노리 자리로 갔다.

 "야, 고우텐"

 "안녕, 헤이하치"

 타케노리는 가방 속에 교과서나 노트를 책상에 쑤셔넣고 있던 찰나였다. 고인 물이 흘러나올 법한 가방을 책상 옆에 걸더니, 타케노리가 천천히 일어섰다.

 "나 조퇴할게"

 "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몸상태라도 안 좋아? 그나저나 가방 두고 갈 셈이냐"

 "아니, 몸은 괜찮아. 말하는 법을 바꾸자면 땡땡이를 치는 거지. 아, 그럼 모두들 안녀엉"

 '당당하게 땡땡이치냐', '쿠로다 군 못쓰겠네ㅡ'라며 말하는 친구들에게 한 번 인사하고, 타케노리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교실을 나갔다. 친구로서 과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헤이하치가 당황해서 뒤를 쫓는다.

 "야, 고우텐. 땡땡이치지 말라고까지 하진 않겠는데, 사정은 알려줘도 되잖아. 그보다 땡땡이 칠 거라면 처음부터 오지 말라고. 그리고 왜 그렇게 젖은 거야, 우산이나 비옷 없었냐"

 복도를 나온 타케노리를 쫓아간 헤이하치는 그의 젖은 소매를 붙잡았다. 이상하리만치 무겁고 차가운 팔의 감촉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그 기묘한 감촉에 헤이하치는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놓지는 않았다.

 "사정은 있지만 말하면 너는 화낼 거니까 말하고 싶지는 않은걸"

 타케노리가 부드럽게 손을 떼어내려는 것을 막으려고 헤이하치는 소매가 아니라 그의 두 팔을 꾹 잡는다. 이전과 비교해보면 듬직해진 팔의 감촉이 기분나쁘지만, 그래도 놓치는 않았다.

 "말해도 말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나는 화낼 거니까, 말 해 멍청아"

 "과연, 그것도 도리구나. 잠시 찾을 게 생겨서, 그거 찾으러 가고 싶어"

 "찾을 거라니, 그거 학교 끝나고 가도 되잖아. 그렇게 소중한 걸 잃어버린 거야?"

 타케노리는 웃으면서 팔을 잡고있는 헤이하치의 손을 뿌리친다.

 "소중한 건 아니지만, 찾아내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할까. 뭐 아무튼, 헤이하치는 내 동향은 신경쓰지 말고 평소처럼 공부에 힘쓰는 게 좋아"

 "평소에도 공부는 안 했어. 그보다 뭘 찾으러 가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지갑인지 박살난 핸드폰인지, 설마 우쿨렐라던가"

 "으음..."

 잠시 생각한 뒤, 타케노리는 헤이하치를 내려보며 '미안'이라고만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잔뜩 있지만, 그걸 설명하면 내 형편이 나빠질 사태가 있으니 말할 수 없음을 사과할게"

 "...무슨 개소리야,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기 싫다고 확실히 말하라고"

 "응, 말하기 싫어"

 "그러냐..."

 헤이하치는 열받은 듯이 자기 머리를 벅벅 긁는다. 정말이지, 기억을 잃어버린 뒤로 타케노리의 묘한 말투에 휘둘리기만 하는 듯하다. ...헤이하치가 멋대로 휘둘러지는 뿐일지도 모르지만. 당사자는 태연하고.

 "네가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을 신경쓴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나는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의 기억이 없으니까 쿠로다 타케노리가 아니라고 딱 잘라 생각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너,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전에 말했지, 이새끼야"

 타케노리의 젖은 목덜미를 잡더니, 헤이하치는 벽으로 밀어붙이려고 힘을 줬다. 하지만 타케노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 계속 네가 아는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의 기억을 찾을 수 없을테니까..."

 "더 말하면 줘패버린다... 뭘 봐, 임마"

 반 친구들이나 옆 반 몇몇이 '헤이하치 씨랑 쿠로다가 투닥거린다ㅡ', '와ㅡ 헤이하치 씨 해태같은 얼굴이 되버렸어'라는 등 지껄이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헤이하치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다시 타케노리를 바라보자 그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억이 있건 없건, 네가 고우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 없어"

 "내가 겉모습만 쿠로다 타케노리고 내용물은 네가 모르는 생물체라는 가능성을 생각하지는 않는구나?"

 그건 헤이하치도 생각했던 적이 있다. 옛날 상처까지 모방한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공포, 친한 친구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되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념. 딱 한 번 머리를 스쳐지나간 그 감정을, 헤이하치는 깨끗하게 떨쳐냈다.

 "네가 고우텐이랑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이라면, 그걸 모르는 나나 네 부모의 눈이 옹이구멍이란 말이겠지. 하지만, 넌 약간 멍청하고 얼빠진 분위기 파악 못하는데다 상식도 없지만 싫어하진 않는다고. 그때는 처음부터 너랑 다시 친구가 될 테니까"

 헤이하치의 말에, 타케노리가 눈을 크게 뜬다. 굉장히 놀란 듯한 얼굴을, 헤이하치는 오랜만에 본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 내가 너무 멋진 말을 해서 감동했냐? 울면서 기뻐하라구"

 "아니, 헤이하치는 별로 생각하고 말하지는 않는구나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을 뿐이야"

 분명히 생각하고 말한 건 아니다, 그냥 생각난 대로 입에 담았을 뿐이다. 그래도 스스로 꽤 멋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타케노리의 옅은 반응에 풀이 죽고 만다.

 "...뭐든 로망이네 청춘이네 입에 달고 살던 녀석이 할 말은 아닌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쿠로다 타케노리랑 같은 모습은 외견 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찾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아줬으면 해"

 목덜미를 붙잡고있는 헤이하치의 손을 뿌리치는 타케노리의 손은 크고 차갑고, 그리고 굉장히 딱딱한 느낌이었다.

 "기분 나쁜데, 네 손"

 "그렇지, 고마워"

 잘 맞물리지 않는 대화다. 이런 이상한 대화는 전에도 타케노리랑 자주 했었다.

 "맘대로 해라"

 관심 없다는 듯이 헤이하치가 타케노리에게 등을 돌리고, 흥미롭게 둘을 지켜보던 친구들에게 '언제까지 볼 거야, 팝콘 다 팔렸거든' 이라고 말하면서 교실로 돌아갔다.

 "그 말이 설령 생각 없이 한 말이더라도, 고맙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니까 고맙다고 할게. 고마워, 사이토 헤이하치"

 쿠로다 타케노리ㅡ그라볼라스는 그의 등에 말하고 계단을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득 멈춰서버린 그는, 몇 초 정도 무언가를 생각하고 방향을 바꾼다.

 그가 향한 곳은 1학년 C반이었다. 문 앞에 그라볼라스가 서자 교실을 나서려던 인물과 부딪쳤다.

 "아, 미안"

 "나야말로... 어 쿠로다 군이잖아"

 교실에서 나온 사람은 야마야 치토세였다. 둘의 키차이가 30센치 정도 있었기에 치토세가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젖은 교복을 입은 그를 잠시 경계하듯이 바라보는 치토세였으나, 갑자기 '아아'하는 소리를 내며 능글거리며 그에게 말을 했다.

 "혹시 하루나한테 볼일있어?"

 "응, 잠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그라볼라스는 C반을 살펴보지만 그가 만나러 온 아키츠시마 하루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걔 잠깐 어디 갔거든. 아침부터 몸상태가 별로라... 슬슬 수업 시작하니까 다음 쉬는시간에..."

 "대신 말 좀 전해줄 수 있을까? 부탁할게"

 "어, 응..."

 둘의 대화를 가까이서 듣고 진전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던 치토세에게 있어서 그라볼라스가 꺼낸 말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역시 '전해주기 싫으니까 나중에 다시 와'라고 할 수는 없어서 떨떠름하게 승낙하고 말았다.

 "...그거만 전하면 알아 들어?"

 그가 한 말은 간결했다. 말의 의미는 알겠지만 의도는 전혀 모르겠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치토세는 난감했다.

 "모른다면 그걸로도 상관없어. 그럼 잘 부탁할게,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라볼라스에게 치토세도 '아니아니 별말씀을...'이라고 고개를 숙인다. 

 "그래서, 쿠로다 군... 어라?"

 치토세가 고개를 올렸을 때에는 그라볼라스의 그림자도 없었다. 복도를 좌우로 살펴봤지만 그의 뒷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

 그날, 하루나는 수업 내용을 거의 듣지 못했다. 칠판에 적힌 내용을 노트에 받아적긴 했지만, 머리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금씩 아침에 본 광경이 떠올라 눈을 감거나 주먹을 쥐거나 했지만, 더 이상 구역질은 나지 않았다. 지금 토해봤자 위액밖에 나오지 않겠지만.

 자신이 쇼크를 받았다고 하루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주된 요인은 무엇일까. 그라볼라스가 개를 먹고있던 것. 본적 없는 개가 끔찍하게 죽은 것. 그 죽은 개의 털이 어딘가 시노와 닮아있던 것.

 결국 그 모든 요인이 하루나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나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단 한가지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라가, 개를, 먹고있었어...)

 그것이었다. 그라볼라스는 '생물체를 무차별하게 먹어치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루나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 말은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광경을 봐버렸으니 그 말도 전부 사라졌다.

 그런데도 하루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듯해서 곤란했다.

 그라볼라스가 직접 개를 먹는 장면을, 하루나는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혹시 어쩌면.

 (...어째서 그런 장면을 보고도 나는 그라볼라스를 믿고 싶어하는 걸까...)

 이렇게나 의심하고 있는데. 한 번은 '그라볼라스는 고양이를 먹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으면서. 지금와서 그라볼라스를 믿고 싶어하는 미련이 남아있는 자신이 있다. 그런 사실이 하루나 스스로도 굉장히 이상했다.

 "하루나, 이제 점심시간이야ㅡ 조금 괜찮아졌어? 아, 의자 잠깐 빌릴게"

 매점에서 돌아온 치토세가 하루나 앞자리의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오늘은 야키소바빵이랑 달걀샌드위치랑 햄샌드위치에 커피우유라는 분발 메뉴입니다! 하루나한테도 조금 나눠줄까"

 "그렇게나 많이는 못먹어..."

 하루나는 느릿느릿 가방에서 도시락통을 꺼냈다. 암울해하는 얼굴을 계속 하면 치토세한테 민폐겠지. 억지로 기운을 내려고 하루나는 기운차게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오늘 반찬은 뭘까ㅡ!"

 라면서 의미도 없이 기운차게 목소리를 냈지만, 내용물이 한쪽으로 쏠려서 굉장한 꼴의 도시락통을 보니 다시 슬퍼졌다. 

 "먹으면 맛은 똑같을 거야. 겉보기가 이렇다고 맛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응"

 시금치와 베이컨을 삶은 반찬에 참깨를 뿌린 호박조림이 석여버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 그렇게 자신을 세뇌하며 꿀꿀이죽처럼 된 도시락을 먹기 시작한다.

 그런 하루나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치토세도 야키소바빵을 집어든다.

 "그러고보니 1교시 끝났을 때 너한테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 그때 너 상태 안좋아서 나중에 말해주려고 미루고 있었는데, 지금 말해도 될까?"

 "전해달라고? 누가?"

 "쿠로다 군이"

 시금치를 목으로 넘기다가 걸려버려서 하루나가 눈을 크게 떴다. 치토세가 '마셔도 되'라며 커피우유를 건네줘서 사양않고 마셨다.

 "너무 많이 마셨잖아... 뭐야, 그렇게 놀랄 일 아니잖아. 게다가 이상한 말이었고"

 한 숨 돌린 하루나가 '이상한 말'을 듣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먹던 도시락통을 일단 덮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먹으면서 들어도 될텐데"

 내용에 따라서는 도시락통을 뒤엎어버릴 정도로 동요할지도 모른다. 그게 두려워서 뚜껑을 덮은 건데, 치토세에게 그런 자신의 심정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상한 말이 뭔데?"

 "개는 먹지 않았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걸, 이래선. 개가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는 말인가? 모르면 상관없다고 쿠로다 군이 말하긴 했는데, 어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개는, 먹지 않았다. 그 한마디로는 확실히 의미불명이다. 하지만 그라볼라스가 하루나에게 전하려는 뜻이 명확한 한마디였다.

 (그라는 그 개를 먹지 않았어...)

 그 말만이, 그라볼라스라는 거짓으로 둘러싸인 생물체의 입에서 나온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루나가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의 말을 믿고 싶었다.

 설령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있더라도, 그라볼라스는 하루나에게만은 솔직했으니까.

 (그래... 혹시 그라가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면 일부러 전해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손과 입을 피로 더럽히고 개의 시체를 안고있던 그라볼라스를 보고, 하루나는 무슨 느낌이었을까. 그는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이 의심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한 뒤 해명하기 위해 전해달라고 했으리라.

 이런 식으로 신경쓰는 일에는 별로 상관이 없는 세계에서 살다 온 그라볼라스가 말이다. 말을 전하지 않고 직접 말하는 편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해봤지만, 1교시가 끝났을 때라면 하루나가 교실에 없었고, 그 무렵의 자신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겠지.

 결국 자신은 이래저래 이유를 대가며 그라볼라스를 의심하면서도 그의 말을 믿고 싶어하고 있다.

 "고마워 치토세. 잊지 않고 전해줘서"

 조금이 아니라, 완전 기운이 돌아왔다. 하루나는 다시 도시락을 열고 남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랑 전혀 맛에 변화가 없는데도 약간 맛있다고 느껴졌다. 

 "뭐야, 나는 하루나랑 다르게 덜렁거리지 않으니까 잊어먹거나 하지 않는다구... 그래서, 그 의미불명의 말 뜻은 뭔데? 암호같은 거야?"

 "신경쓰지 마 신경쓰지 마. 아, 커피우유 고마워"

 남은 도시락을 빠르게 먹어치우고 하루나는 책상 위를 정리하더니 일어선다.

 "잠깐 A반 갔다올게"

 "아, 하루나 기다려봐"

 부르는 치토세의 손을 뿌리치고 하루나는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와 A반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문이 열려있는 교실을 바라본다. 죽 돌아봤지만 그라볼라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 찾아? 불러줄까?"

 문 근처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던 여학생이 두리번거리는 하루나를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아, 음... 사이토 군 좀"

 그라볼라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헤이하치가 멍하니 책상 정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헤이하치 씨"

 여학생의 부름에 헤이하치가 이쪽을 봤다. 하루나를 보더니 머리를 긁으며 다가온다. 여학생에게 '불러줘서 고마워'라고 짧게 말한 헤이하치는 하루나 옆을 지나 복도로 나왔다. 그 뒤를 하루나가 따라간다.

 복도 창가로 가더니 헤이하치는 창문에 기대 하루나를 바라본다. 변함없이 비가 거세게 내려서 창문에 물방을이 폭포처럼 흐르고 있다.

 "저기..."

 "고우텐 녀석이라면 1교시 도중에 와서 끝나자마자 조퇴해버렸어"

 "아, 그렇구나..."

 그라볼라스가 어디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하루나였지만, 그 말을 듣고 망설였다.

 "저기... 왜 조퇴했는지, 사이토 군은 알고 있어?"

 "알겠냐"

 내뱉듯한 말이 돌아왔다. 헤이하치는 꽤나 심기가 불편해 보였는데, 그 이유는 그라볼라스에게 있는 모양이다. 헤이하치와는 많이 대화하지 않았지만, 그가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을 한 그라볼라스를 걱정하는 사실은 하루나도 알고 있다. 그런 그가 그라볼라스의 화제에 이렇게나 기분나빠 하다니,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저, 사이토 군, 쿠로다 군이랑 싸웠어?"

 "안 했어!"

 눈을 부릅뜨며 거칠게 말하는 헤이하치가, 작게 혀를 차며 하루나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알기 쉬운 사람이구나, 사이토 군...)

 자신도 꽤나 감정이 얼굴에 나오는 타입이지만, 헤이하치도 만만치 않았다. 싸움이라고 해도 어차피 그라볼라스가 이상한 말을 해서 헤이하치를 화나게 했을 뿐이겠지만.

 "...쿠로다 군은 그, 약간 이상하고 영문모를 말을 하긴 하지만, 본인한테 악의는 없..."

 "아키츠시마"

 헤이하치는 살의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눈을 부릅뜨며 하루나를 쳐다본다.

 "그녀석은 내가 더 오래 알고 지냈어, 아키츠시마한테 듣지 않더라도, 알고 있다고"

 쿠로다 타케노리와 사이토 헤이하치는 확실히 오래 알고 지냈으나, 그라볼라스라는 범고래랑은 자신이 알고 지낸지 하루 더 됐다...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쓸데없는 말 해서 미안해"

 그래도 하루나는 순순하게 사괴한다. 헤이하치에게 있어서 그라볼라스는 기억을 잃은 쿠로다 타케노리이며, 그의 친구니까. 그 친구와의 사이에 하루나같은 제3자에게 참견당하면 참지 못하겠지.

 "아니, 내가 괜히 화풀이했을 뿐이야. 최근 그녀석 기억이 없다고는 해도 이상하니까... 미안해, 아키츠시마"

 헤이하치는 자신의 볼을 두세번 때리더니 하루나를 다시 바라봤다. 불편하다는 표정은 사라졌지만 볼을 너무 강하게 쳤는지 헤이하치의 볼이 발갛게 되버렸다. 너무 빨개서 하루나는 웃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뭐냐, 그녀석은 약간 이상하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음. 근데 아키츠시마 걔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어?"

 "아ㅡ 잠깐 할 얘기가 있었는데..."

 하루나가 그렇게 말하자 헤이하치는 굉장히 만족했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아직 그는 자신과 그라볼라스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정해봤다 쓸데없이 귀찮기만 하니까 침묵을 지키는 하루나였다.

 "그런가 그런가, 아키츠시마가 그녀석을 신경쓰다니 좋은 일이야, 음. 그녀석네 집 전화번호 알려줄까?"

 "그래도 돼?"

 "어차피 연락망 보면 금방 알 수 있으니까. 그녀석도 화내지는 않을 거야. 핸드폰은 박살났으니 의미 없고. 만에 하나 화낸다면 내 섬세함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헤이하치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필기구를 찾는 듯했지만,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없는 모양이다. 하루나는 자기 주머니에서 볼펜과 수첩을 꺼내 한 장 찢어서 건네줬다.

 "오, 땡큐"

 헤이하치는 벽에 종이를 대고 숫자를 적더니 볼펜과 함께 하루나에게 건냈다. 

 "나야말로 고마워... 저기, 사이토 군, 혹시 쿠로다 군의 기억이 계속 돌아오지 않으면..."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라볼라스에게 타케노리의 기억이 돌아올 리가 없다. 그는 겉모습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니까.

 "아키츠시마도 고우텐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녀석이랑 의외로 닮았을지도 모르겠네"

 "엥..."

 그라볼라스와 닮았다는 말은 굉장히 의외였다.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하루나를 보며 헤이하치는 즐거운 듯이 웃는다.

 "그렇게 싫어하는 얼굴 하지 말라구. 뭐 그런 일이 생기면 처음부터 그녀석의 친구로 시작하면 돼. 아무튼, 그녀석 일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신경써줘. 잘 부탁한다"

 그렇게 말하고 헤이하치는 교실로 돌아갔다. 하루나도 그가 건내준 메모를 보면서 교실로 돌아간다.

 (글자 못쓰네...)

 글자가 엄청 치우쳐져있어서 읽기 힘들다. 숫자 하나 하나가 엄청 크게 쓰여있어서 그의 성격이 살짝 엿보였다. 하지만 헤이하치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잘 알았다. .그 그라볼라스와 충돌하면서도 친구라고 말해줬으니까.

 당사자인 그라볼라스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그라볼라스와 말해봐야...)

 개를 먹지 않았다는 한마디로 정리해버리기에는 약간 신경쓰여서 어쩔 수가 없다. 하루나는 기합을 넣기 위해 헤이하치가 한 것처럼 자기 뺨을 두세번 손바닥으로 때렸다.

 "너 왜 볼이 새빨개?"

 "...너무 세게 때렸어..."

 교실에 돌아온 하루나는 치토세의 질렸다는 표정을 보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래서는 헤이하치를 웃을 수가 없다.

 부어오른 볼을 매만지며 하루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렇게 심한 비가 내리는데 그라볼라스는 조퇴까지 하면서 뭘 하려는 걸까.

 치토세의 설교같은 말을 들으면서 하루나는 그저 쏟아지는 비를 바라봤다.

***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기세를 그칠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바람을 동반한 폭풍우로 변해있었다.

 (아직 봄인데, 마치 태풍같아...)

 레인코트와 장화를 장비하긴 했지만 정면에서 불어오는 비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틈새로 들어오는 비가 교복을 젖혀서 점점 몸이 무거워진다. 그 탓인지 마음까지 무거워지지만, 하루나는 꿋꿋히 고개를 들고 자전거를 달렸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그라... 쿠로다 군 집에 전화해보자)

 상태가 안 좋아서 돌아갔다, 라는 일은 있을 리가 없다. 건강을 몸에다가 박아둔 듯한 그라볼라스다. 학교가 시시해졌다, 라는 이유도 말이 안 된다. 그렇게나 공부에 열심인 그가 수업을 받지 않고 나돌아다닐 리가 없다.

 무언가 해야하는 일이 있다거나, 생긴 거겠지. 한 번 학교에 왔다가 바로 돌아갔다는 점이 의문이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알 일이다. 하지만 그라볼라스는 어디로 갔을까. 그가 갈 법한 장소라면 도서관이지만 오늘은 휴관일이다.

 그 외에 어디가 있을까... 생각하던 하루나는 딱 한 곳을 생각해낸다.

 (카라키하마...)

 하루나와 그라볼라스가 처음 만났던 장소. 하루나가 그라볼라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장소. 그라볼라스에게 공포를 느끼고 도망갔던 장소. 그라볼라스를 집으로 초대했던 장소.

 전부 그 어둑한 모래언덕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비오는 날에 바다에 가는 인간은 없을테지만, 그라볼라스는 사람이 아니다. 의외로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카라키하마로 향했다.

 (파도가 높은걸...)

 둑 위에서 바라본 바다는 당연하게도 거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새하얀 물보라를 내는 파도가 더러운 모래를 흘려내리며 휘몰아치는 모습을 잠시간 바라봤다. 잡목림의 나무들은 바람에 치이며 나뭇잎을 소리내어 연주하고 있다.

 이 바람소리에 섞여 언제나처럼 '하루나아아아! 안녀어어어어엉!' 하면서 느긋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바라봤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이런 비가 쏟아지는 날에 좋다고 이런 곳에 오는 사람은 없다. 가끔 하루나의 옆으로 자동차가 지나갈 뿐이었다. 도로에 고인 물웅덩이를 튀기면서 달려가는 차를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하루나는 다시 한 번 카라키하마를 내려봤다.

 (...어라?)

 아까까지는 바다만 봐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모래언덕에 뙇 하고 검고 하얀 투톤컬러의 공이 놓여있었다. 멀리서 봤기에 잘 모르지만 직경 1미터 정도는 되보인다. 파도가 닿지 않는 미묘한 위치에 놓여있어서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한 공이네...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에는 크고...)

 운동회에서 쓰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할 크기지만 그런 물건이 모래언덕에 놓여있는 것도 이사아하다. 저렇게 큰 물건을 잊어버릴 리도 없고, 누군가가 버리고 간 걸까. 카라키하마에 쓰래기를 버리는 사람은, 슬프게도 드물지 않다. 

 (버리고 간다고 해도 저렇게 눈에 띄는 곳에 버리다니...)

 눈에 띄지 않는 잡목림에 버려도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저렇게 모래언덕 거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으면 신경쓰이고 만다.

 하루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카라키하마로 내려가기로 했다. 저걸 주워다가 쓰레기통에다가 버리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구석에 치워두자고 생각했다. 크지만 굴러가면 문제 없을테고, 이렇게 어슬렁거리면서 시간을 떼우다보면 그라볼라스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런 가벼운 생각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비 때문에 걷기 힘든 모래 위를 천천히 나아간다. 여기서 자빠지면 굉장한 꼴이 되버릴 것이다. 조심스럽게 공을 향해 다가간다.

 (...뭐지 이거)

 윗부분은 검고 아랫부분은 하얀 그 공은 보면 볼수록 제대로된 원형이 아니었다. 둥글기는 하지만 군데군데 삐딱하게 삐져나와있었다. 검은 부분은 이상하리만치 맨들맨들한 광택을 내뿜고 있었으며 하얀 부분은 모래가 달라붙어 약간 더려웠다. 모래만이 아니라 붉은 정체불명의 무언가도 붙어있어서 하루나는 한순간 아침의 광경을 떠올렸다. 

 (그냥 도료같은 거겠지, 분명, 그럴 거야)

 딱히 부자연스러운 색이 붙어있긴 했지만,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거, 무거워...)

 이 강풍 속에서 꿈쩍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니 하루나가 상상했던 것보다 무거운 게 아닐까. 밀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중량감이 보인다.

 (가볍게 밀어보고 안 되면 돌아가자...)

 하루나는 일단 한 손으로 가볍게 그 공을 만졌다.

 그 순간, 검은 표피가 살짝 움직였다는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꺅!"

 무의식 중에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질치던 하루나는 방심해서 모래에 발이 걸려 자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쓰러지려는 하루나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준 덕분에, 하루나는 모래투성이가 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었다.

 "...왜 하루나가 여기 있는 거야?"

 단번에 알 수 있는 화났다는 목소리와 아플만큼 팔을 붙잡고있는 손의 주인이, 하루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그라...?"

 그라볼라스. 하루나가 잘 알고있는, 그리고 말하고 싶었던 그라볼라스. 그가 눈앞에 있다. 아침에 봤을 때처럼 교복이 아니라, 반팔 셔츠에 바지, 그리고 맨발이라는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리고 이마에는 사람의 피부가 덮여있지 않고, 그의 원래 이마에 붙어있던 푸른 수정이 반짝이며 드러나있었다.

 "어... 어디에 있었어?"

 방금 전까지 그의 모습은 카라키하마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걸로 주변 풍경과 동화하고 있었어. 움직이면 유지할 수 없지만"

 그라볼라스는 자신의 이마를 가르키고 하루나가 스스로 서있는 모습을 확인하더니 손을 놓고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아아, 카멜레온의 굉장한 버전 말이지... 근데, 어디 가"

 그라볼라스는 하루나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몇 발자국 떨어진 뒤 흑백의 공 앞에 서서 돌아본다.

 "아무데도 가지 않아. 여기서 기다릴 뿐이야. 하지만 하루나는 빨리 돌아가"

 "돌아가라니... 그라는 여기서 뭘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이상한 공 앞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젖은 머리카락이나 셔츠가 그의 피부에 달라붙은 모습을 보아하니, 그가 꽤 긴 시간 여기 있었다고 생각된다.

 "내 걱정은 필요 없어.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까 빨리 돌아가"

 아까부터 그라볼라스는 전혀 웃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하루나를 보고 있지도 않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며 오른손은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왼손은 이마를 매만지고 있다. 산만하다고 하기보다는, 엄청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험하다면 그라도 돌아가야 하잖아"

 "나는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 여기 있어야 해"

 "배제라니...?"

 "네가 신경쓸 일은 아니야. 전부 해결하면 말해줄 테니까. 자, 빨리 돌아가"

 그라볼라스가 이렇게 신경이 곤두선 모습은 처음봤다. 도저히 거짓말을 한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진실인 모양이다.

 "...저기, 위험하다는 말은, 그라랑 말할 시간이 없을만큼 긴박한 상황이야?"

 바보같은 질문이다라는 자각은 있었다. 호기심이네 뭐네하며 생기는 의문을 전부 마음 한구석에 밀어넣고, 조용히 이곳에서 떠나는 것이 현명하겠지. 그래도 하루나가 그렇게 물어봤던 건, 그의 말에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 때문이었다.

 이 장소에 위험이 온다, 그는 그 위험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다리는 시간에 약간이라도 말할 수 없을까. 하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 올지는 몰라. 10초 뒤일 수도 있고, 1시간 뒤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게 왔을 때 네가 있다면 나는 네 목숨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보증이 6할 정도밖에 없어. 설령 10할이라고 자신이 있더라도 네가 여기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자세도 표정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도 좋다면 질문은 간결하게. 전부 끝나면 빨리 돌아가야 해"

 그라볼라스가 이곳에 있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그가 띄우는 분위기는 변함없이 공포를 느끼게 했기에, 물어보고 싶은 것 전부 물어보면 순순히 돌아가기로 했다. 하루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을 개시한다.

 "어 일단은... 개, 정말 안 먹었지?"

 "안 먹었어. 개든 고양이든, 죽이고 먹어치우는 짓은 하지 않아"

 단언한다. 그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어딘가 무섭게 느껴지는 건 기분탓일까.

 "혹시... 화났어?"

 "그건 하루나가 나를 이 주변에 생물체들을 먹어치우고 다니는 참을성 없는 범고래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화내냐고 물어보는 거야?"

 (역시 화났어...)

 그의 말투는 평탄했다. 언제나 즐거운 듯이, 그리고 흥미롭게 하루나와 대화하는 때와는 전혀 달랐다.

 "미안해..."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아침의 그건, 오해를 살만한 상황이었고. 개의 피가 손에 묻은 건 상처를 만졌기 때문이야. 입은 피묻은 손으로 입을 만져서 그렇고. 하루나는 내가 말하기 전에 도망갔지만"

 한 층 강한 바람이 불어와 하루나는 휘청거리며 옆에 있던 공에 기대는 형국이 되버렸다. 또 쿰척하는 그 공에 이번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굴러자빠졌다.

 "너무 만지지는 말아줘"

 "아, 응... 이 공은 뭐야?"

 신경쓰이는 두번째 질문을 해봤다.

 "내 살. 100키로 정도"

 ".......어?"

 되묻는 반응을 해버린 이유는 바람와 빗소리 탓에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라볼라스가 한 말이 너무나도 쌩뚱맞았기 때문이다.

 "내 옆구리살 지방을 옅은 표피로 감싸둔 덩어리, 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 촉감을 약간 남겨두었으니 만지면 금방 알 수 있어"

 떨어져 있으면 약간 만진 정도로는 잘 모르지만, 이라고 말하고 그라볼라스는 살짝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살짝 비가 약해졌다. 그래도 아직 호우라고 할만한 비였다.

 "어, 어째서 그라의... 그, 살, 을, 이런 곳에 둔 거야?"

 "미끼야. 불러들이기 위한. 일단 피를 묻혀뒀으니까 냄새를 맡고 와주면 좋겠지만. 야행성이라서 조금 더 어두워져야 올지도 모르겠지만"

 피. 하루나는 무심코 공ㅡ그라볼라스의 고깃덩어리를 내려봤다. 젖은 모래에 섞여서 잘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붉은 무언가가 섞여있다.

 "아프지 않아...?"

 "아파"

 목소리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아파보이지 않는다. 그저 조용하게, 표정에 변함 없이 그라볼라스는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렇게 아프면서 그라는 뭘"

 불러들이려는 거야. 그걸 마지막 질문으로 할 생각이었던 하루나였지만, 그 입은 강한 힘에 억눌렸다. 갑자기 움직인 그라볼라스가 하루나의 등에 소리없이 다가와 하루나의 입을 왼손으로 막았다.

 "......ㅅ!"

 레인코트의 후드가 그 기세에 벗겨지는 바람에 하루나는 얼굴에 바람과 비를 맞는 꼴이 되버렸다.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크고 차가운 손바닥에 막아져서, 하루나는 눈만 움직여 그라볼라스를 올려봤다. 그는 하루나를 보지 않고 오른손을 그녀의 명치 근처에 놓고 끌어당겨서 고깃덩어리로부터 3미트 정도 떨어졌다.

 넓고 딱딱한, 그리고 이상하게 차가운 그의 가슴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진다.

 "잘 들어, 이렇게 입을 막은 건 하루나가 큰 소리를 내면 곤란하기 때문이야. 호흡은 코로 해. 가능한 조용하게"

 그라볼라스가 하루나의 귓가에 조용하게 속삭인다. 비나 바람 소리에도 그의 조용한 말이 하루나의 고막에 똑똑히 울린다. 귓가에 말하는데도 그의 숨은 하루나의 귀에 닿지 않고, 그저 목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네 몸을 누른 건, 네가 공황상태에 빠져서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야. 지금부터라면 여기를 벗어나기보다 내 곁에 있는 편이 안전하니까. 여기까지 이해했어?"

 하루나는 가벽게 끄덕인다.

 "지금부터 나는 상황에 따라서 널 던져버릴지도 몰라. 소리치거나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알아줬으면 해. 가능한 상처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그라볼라스의 말을 들으며 하루나는 그가 아닌 다른것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의 착각인가 생각했다. 비바람 속에 그쪽만 어째선지 흔들거리듯이 보였으니까.

 신기루, 아지랑이, 그림자.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결국 전부 틀렸다고 깨달았다.

 '그것'은 실제로 저기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무서울만큼 정교한 유리 세공인가 생각했다. 왜냐면 '그것'의 몸 건너편에 있는 둑이나 잡목림이 '그것'의 몸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투명하게 통과하는 몸에는 어렴풋한 윤곽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유리 세공이라면 하루나는 만든 사람의 취미를 틀림없이 의심하리라. 

 '그것'의 형상, 언뜻 보기에는 벌레처럼 보였다. 어렸을 무렵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곤충도감. 몸통만은 도감에 실려있던 대벌레와 아주 닮았다. 가느다랗고 긴 원통형, 그리고 봉처럼 생긴 몸통. 몸통 중앙에는 관절같은 다리가 오른쪽에 셋, 왼쪽에 셋, 총 6개의 다리. 가느다란 다리의 끝을 소리없이 지면에 꽂고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하지만 대벌레처럼 보이는 것은 몸통과 다리 뿐이었다. 상반신에 달려있는 7개째와 8개째의 다리는 사마귀처럼 당랑권 자세였다. 그리고 몸통 끝에 달린 머리는 이상하리만치 크고 둥글어서, 마치 언밸런스한 잠자리같았다.

 둥근 머리에 달려있는 건 둥글고 큰 2개의 눈. 그 눈 가운데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작고 작은 눈이 존재했다. 동공도 뭣도 없는 그 눈들은 하루나를, 그라볼라스를, 그리고 그라볼라스의 고깃덩어리를 지긋이 관찰하고 있었다.

 눈의 바로 밑에는 입같이 생긴 게 있다. 하지만 그건 도감에서 본 잠자리의 입이 아니었다. 가늘고 길며 끝이 뾰족한 그것은 투명해서 마치 주사기 바늘같이 보였다. 침의 끝에는 이빨인지 촉수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무수히 달려있었다. 그 안에 '그것'의 진짜 입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확인하기 위해서 유심하게 관찰할 생각따위 하루나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이 혹시 길이 10센치 정도라면 그냥 악취미 조형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몸 길이가 4미터 정도는 되보인다. 올려봐야할 정도의 크기를 한, 투명한 외골격을 가진 대벌레인지 사마귀인지 잠자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벌레. 악취미를 뛰어넘어서 악몽같은 생물체가 천천히 그와 그녀에게 다가선다.

 하루나의 굳게 닫힌 입이, 소리를 내려고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ㄴ다.

 비명은 지르지 못했다. 목구멍이 막힌 듯이 이상한 감각. 눈앞에 있는 생물체에게 느껴버린 생리적인 공포. 차가운 비가 이마나 볼에 떨어지고 있는데도 하루나는 자기가 등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라볼라스의 차가운 가슴판도, 땀을 멈추게 해주지는 못했다.

 기분나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눈앞에 있는 벌레 때문일까, 자신의 땀 때문일까. 

 갈 길을 잃은 하루나의 비명은 그라볼라스의 손바닥 안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그래도 자신의 몸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하루나는 참지 못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는 안할게... 저게 개나, 아마도 다른 동물까지 먹어치운, 내가 배제하기 위해 기다리던 위험한 생물. 우리들의 천적의 새끼야"

 새끼. 저 크기가 어리다고 한다. 벌써 4미터는 되보리는데. 그라볼라스가 했던 말에서 오징어나 문어같은 생물체를 상상했지만, 저건 벌레다. 벌레라고는 해도 너무 크고 이질적이었다.

 "고향에서 천적과 싸우는 사이에 나한테 알이 달라붙었나봐. 이 섬에 도착하고 부화해서 내 고기를 먹으며 성장했나보지만, 몸의 대부분을 잘라냈을 때 몸밖으로 나온 모양이야. 성체랑 겉모습은 다르지만, 이 섬에 이상한 적응을 해버린 것 같아. 꽤나 서둘러서 커졌는걸. 정말이지 무서운 천적이야"

 그라볼라스의 목소리에는 공포나 떨림이 전혀 없었다. 그를 바라보자 그라볼라스는 다가오는 그 이상한 벌레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벌레는 고깃덩어리 바로 옆까지 다가오자 둘을 무시하고 그 덩어리 표피를 건드린다.

 처음에 들렸던 소리는 탁 하는 돌과 돌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였다.

 "역시 태어나서 처음 먹은 고기맛은 기억하는 모양이야. 와줘서 다행이다"

 침착한 그라볼라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루나의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보다 크게 떨기 시작한다.

 고깃덩어리 표피를 깨려고 열중인 벌레ㅡ내장이나 체액까지 투명한 그 가늘고 긴 몸통 속에, 이질적인 색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어중간하게 소화되서 원형을 잃어가는 하얀 개의 머리였다. 반 이상 녹아버린 그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노오랗고 탁해보이는 눈알이 하루나를 바라보는 듯하게 느껴졌다.

 "성체라면 모르겠지만 저런 이상하게 적응한 새끼 정도라면 이 몸으로도 죽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불안한 얼굴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라볼라스의 오른손이 살짝 움직여 하루나의 명치를 쓰다듬었다. 그건 하루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동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계기로 하루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어째서 무슨 이유로 우는 걸까, 스스로도 전혀 모르겠다.

 그저 괴로웠다. 오열하지도 못하고 그라볼라스에게 입과 몸이 제압되서 몸을 떨며 우는 것밖에 못하는 것이 괴롭다.

 "그런 때에는 약속을 하는 게 좋을까"

 그렇게 말하는 그라볼라스의 목소리는 어딘가 곤란한 듯이 들렸다. 그런 그라볼라스의 목소리를 들어도 하루나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볼을 타고 전해지는 비에 섞인 눈물을, 그라볼라스가 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라볼라스의 왼손에 떨어진 따듯하고 축축한 물방을로 눈치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면 뭔가를 걸고 맹세하는 편이 로망이라는 게 있을까"

 결국 표피를 잘라낸 벌레가 고깃덩어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던 하루나는, 약간 붉어진 눈으로 그라볼라스를 바라본다. 그라볼라스의 푸른 이마가 약하게 빛을 내뿜는다. 표정은 변함없다. 시선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볼이 아주 약간 경련했다.

 그 경련은 벌레가 그라볼라스의 고깃덩어리를 가늘고 긴 침으로 찔러넣고 내용물을 흡입할 때마다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침의 뿌리에 돋은 촉수는 고깃덩어리의 껍질을 잘라내고는 입으로 옮겨간다. 

 벌레의 투명한 몸통 안에 그라볼라스의 검붉은 혈육이 흘러들어가는 괴랄한 모습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고, 하루나는 겨우 눈치챘다. 그라볼라스의 조용한 고통을.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일부를 먹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몸과 마음이 아파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라볼라스는 '아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음소리도 내지 않는다. 울지도 않는다. 땀도 흘리지 않는다. 하루나에게 무서우리만치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걸고 맹세하는 듯한데, 목숨이라도 좋을까. 목숨을 걸고 널 지켜서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하면 너는 울거나 무서워하지 않을까"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그런 약속이나 목숨을 걸지 않아도 돼. 나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그라볼라스는 하루나의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은 아까보다 강하게 하루나를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돌리지도 못하게 했다.

 "...저 새끼가 거의 다 먹어갈 때면 난 저걸 죽이러 갈 거야. 그 때 아마 하루나를 내던질 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1미터 정도 되던 고깃덩어리는 이미 반정도 크기로 줄어들었다. 공기가 빠진 공처럼 너덜해진 고기와는 반대로, 벌레의 가늘고 긴 몸통은 빨갛게 부풀어올랐다.

 하루나는 그 광경에서 눈을 돌리며 생각했다. 자신의 몸 중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손 정도다. 이 왼손으로 자신의 의사를 그에게 전달할 수 없을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하루나에게 가능한 건 자신의 명치 근처에 놓인 그라볼라스의 오른손 위에 자신의 왼손을 겹쳐두는 정도였다.

 겉모습은 사람과 똑같다. 그라볼라스는 그렇게 말했다. 딱딱하고 차갑고 뼈가 앙상한 큰 손의 피부. 그 손을 잡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서 그의 방해를 하면 안 된다. 그래서 하루나는 손을 두는 것으로 그쳤다.

 "...아아, 그렇지.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을 걸도록 할게"

 그렇게 말하는 그라볼라스의 말은 아직까지도 평탄한 말투와는 살짝 다른, 하루나가 평소에 듣던 무서울만큼 가볍고 긴장감 없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하루나의 왼손 아래에서 조용히 뺐다.

 "그라볼라스의 이름을 걸고, 하루나의 목숨을 지켜주고, 하루나 주변의 동물을 잡아먹은 저 새끼를 처치한다고 약속할게"

 그라볼라스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하루나의 왼손을 살짝 잡았다. 큰 손바닥은 하루나의 손을 감싸고도 남았다.

 "악수 작법은 이걸로 된 걸까"

 하루나는 자기 왼손목을 돌려서 그의 손바닥에 맞추고 가볍게 쥐었다. 그라볼라스도 그에 응해 하루나의 손을 잡는다.

 그라볼라스의 오른손과 하루나의 왼손. 올바른 방법은 아닌 악수.

 원래 모습을 인간의 가죽으로 감춘 거대 해수와, 육지에 사는 평범한 인간인 소녀가 나눈 악수. 


 "다녀올게"

 짧은 말과 함께 손과 그의 몸이 멀어져간다. 튀어나간다, 라기보다는 반쯤 몸을 던지듯이 하루나의 몸을 멀리 떨어트리고 가볍게 도약했다.

 젖은 모래 위에 쓰러진 하루나는 몸에 전해지는 둔한 아픔도 모래투성이가 되버린 코트도 무시하고 그라볼라스와 벌레의 쪽을 보려 했다.

 이미 껍질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라볼라스의 고깃덩어리. 그 내용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빨아들이려는 것처럼, 벌레의 머리는 꽤 낮은 위치에 있었다. 그 머리통에 달린 둥근 눈을 그라볼라스가 자신의 그 큰 손으로 움켜쥐었다.

 눈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분명 기분탓이리라. 바람은 약해졌지만 아직 비는 내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마에 섞여서도 벌레의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모습은 하루나의 기분탓이 아니었다.

 괴로운 듯하게, 벌레가 머리를 치켜든다. 뒷다리 4개로 일어선 벌레의 머리통 위치는 4미트 이상 높아졌다. 벌레의 머리에 매달린 모습이 된 그라볼라스지만, 그는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라!"

 자신의 부름이 그에게 있어서는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못하고 하루나는 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루나가 지어준 이름을. 그가 걸겠다고 말한 이름을.

 그라볼라스는 머리를 흔들며 자신을 떨어트리려 하는 벌레의 목인지 몸통인지 모르는 곳에 양 발을 디뎠다.

 그 그라볼라스의 등에 기묘하게 구부러진 벌레의 낫이 찔러들어온다. 그가 입은 하얀 셔츠는 순식간에 빨간 피로 물들었다. 한번이 아니라 두번, 세번, 네번.

 다섯번째가 그라볼라스의 등을 크게 찢어가르려던 찰나, 드디어 그의 손이 벌레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사람의 몸 치고는 결코 작지 않은, 그리고 300키로 이상인 그라볼라스의 몸이 110미터 정도 날아가서, 마치 공처럼 모래언덕에 패대기쳐져서 튀어오른다.

 기세를 죽이기 위해선지 모래 위를 구르며 꽤 멀리 날아간 그라볼라스에게로, 하루나는 달려가고 싶었다. 그녀와 그의 사이에는 양 눈을 거의 완전히 찌그러트려진 벌레가 끼어있었다.

 저것을 피하기 위해 하루나는 모래에 발을 박차며 빠르게 벌레를 우회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하루나를 벌레는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곁에 무언가 생물체가 있고, 그게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 머리의 촉각으로 이해했다.

 그 생물체가 자신의 눈을 부순 적인가, 아니면 먹잇감인가.

 그건 벌레가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움직이면 배가 고프다. 상처입으면 배가 고프다. 식사를 해도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먹은 고기들을, 박살나서 떨어져나간 자신의 혈육으로 바꾸면 맹렬하게 배가 고파온다.

 먹기 익숙해진 혈육인가. 아니면 아직 먹어본 적이 없는 혈육인가.

 질척질척 눈이 있던 곳에서 체액을 흘리며, 벌레는 6개의 다리를 구사해 달려갔다.

 다리가 2개인 하루나와 6개인 벌레는 이동속도가 매우 다르다. 게다가 비를 대량으로 머금은 모래는 하루나의 발목을 잡으려는 듯이 그녀가 신은 장화를 휘감았다.

 "아..."

 하루나가 넘어진 것과 벌레의 낫이 그녀의 등에 내려오는 건 거의 동시였다.

 죽는다, 라고 하루나는 생각했다.

 바다에 빠졌을 때와는 달리,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아까까지 그가 해준 맹세를 자신이 깨버리게 되었다고 생각되서 슬퍼졌다.

 "...떨어져"

 그라볼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샌가 비는 그치고,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하루나의 귓가에 닿은 그라볼라스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떨림도 없었다.

 오른낫을 양손으로 잡고, 왼낫을 오른쪽 어깨 깊숙히 박혀 피를 흘리는 그라볼라스. 하루나에게는 그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따. 입은 셔츠는 너덜너덜해져서 그의 피부에 걸쳐져있을 뿐이고 이미 옷이라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등은 크게 찢어져서 검붉은 근육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근육이 펄떡펄떡 움직이며 그의 상처를 막으려 하는 모습을, 하루나는 망연히 보고만 있었다.

 "빨리 떨어져!"

 그라볼라스가 팔에 힘을 넣자, 벌레의 낫이 뿌직 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동시에 그의 등 근육도 크게 상처를 벌리며 기묘한 고깃덩이를 만들어냈다.

 하루나는 당황해서 일어나 그라볼라스와 벌레에게서 떨어졌다. 이대로 더 멀리 떨어져서 차라리 도망가는 편이, 그의 방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루나는 2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변이를, 보았다.

 그라볼라스의 등에서 튀어나온 고깃덩어리는 빨갛지 않았다. 검은 표피를 형성하는 그것은, 그라볼라스의 원래 모습인 범고래의 등지느러미와 꼭 닮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등부터 날아온 대량의 검은 고깃덩이들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감쌌다. 검정색 뿐만 아니라 하얀ㅡ원래 그의 배 색깔이 보인다. 팔에 있던 부분은 가슴지느러미로, 다리에 있던 부분은 꼬리지느러미로, 그의 몸이 형성되어갔다.

 인간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곳에 나타난 것은 아까까지 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을 쓰고 있던 3미터의 체구를 가진 범고래ㅡ그라볼라스였다.

 범고래의 힘세고 강한 꼬리지느러미가 크게 구불거리며 지면을 강타한다. 두왕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젖은 모래가 흔들리자, 그 거대한 몸은 가볍게 하늘로 떠올랐다. 크게 입을 벌린 그라볼라스의 이빨은 벌레의 머리와 낫을 뿌리채 씹어버렸다. 투명한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려 모래에 떨어지는 소리는, 그라볼라스의 몸이 지면에 착지하는 소리에 지워져 사라졌다.

 하지만 그 뒤에 계속되는 그라볼라스의 입에서 울리는 꾸역꾸역하는 듣기 싫은 소리는, 하루나의 귀까지 닿았다.

 머리와 낫을 잃은 벌레에게 남아있는 건 3미트 정도 되는 몸통과 6개의 다리였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은 벌레는 그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그라볼라스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이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누구라고 알 수 있었지만, 당사자인 벌레만은 간단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라볼라스 또한 죽기까지 기다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벌레는 방향도 모르고 달려갔다. 향하는 곳은 바다. 그라볼라스가 찾아왔던 장소. 그리고 육지보다도 훨씬 익숙한 장소였다.

 그라볼라스가 다시 튀어오른다.

 강하게, 높게, 그리고 멀리.

 그 한 번의 도약으로 바다까지 도달한 그라볼라스는 커다란 물보라를 내며 한 번 바다 속에 잠겼다가 금방 해수면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파도에 밀려 멈춰선 벌레의 다리를 물어뜯고, 아무런 고생 없이 그대로 바다로 끌어들였다.

 비 뿐만 아니라 바람도 그쳤다.

 10분 전과 같은 바다라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적이 흐르는 바다를, 하루나는 모래와 비에 젖은 채로 멍하니 바라봤다.

 3분 정도, 그라볼라스가 천천히 부상할 때까지 하루나는 그저 바다와 그 앞에 펼쳐지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두꺼운 구름의 틈새로 태양빛이 뻗어오지는 않았다.



 "여, 하루나. 안녕"

 돌아온 그라볼라스가 입을 열고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왜 이제와서 인사하는 거야"

 그라볼라스는 방금까지 엄격한 얼굴로 피를 흘리며 싸우던 일이 거짓말같이, 평화롭고 상냥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이제와서라니, 인사는 소중하니까... 하지만 약간 지쳤어. 그래서, 하루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뭔데?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줄게"

 "저 벌레가 먹어치우고 남긴 내 근육덩어리 좀 가져다줘. 껍질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무겁지는 않을 거야"

 그런 기분나쁜, 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응, 하고 끄덕이며 모래를 건너 그라볼라스의 껍질이 떨어진 장소에 도착한다. 흑백의 껍질에 닿아도 이제는 쿰척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올리려 했지만, 이 껍질과 남은 덩어리가 꽤나 무거웠다. 30키로 가까이는 되보인다.

 결국, 하루나는 그걸 질질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무겁지만, 원래는 100키로라고 그라볼라스는 말했다. 70키로의 피와 살은 그 벌레에게 먹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벌레를... 그라가 먹었지...)

 그라볼라스의 고향을 어지럽히는 천적의 새끼라고 했다. 새끼는 개나 고양이를 먹고, 그라볼라스의 살을 먹고, 결국에는 그라볼라스에게 먹혔다. 이 또한 먹이사슬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걸까. 

 땀을 흘리며 그라볼라스의 곁으로 돌아온 하루나에게, 그는 짧게 '고마워'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껍질을 어쩌려고?"

 "이렇게 해야지"

 그라볼라스가 그 하얀 턱을 껍질 위로 올리자, 껍질은 조금씩 그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그런 기묘한 광경을 보더라도 이제 하루나는 놀라거나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다.

 "...이제 뭘 봐도 놀라지 않을 기분이야..."

 "그건 다행이네"

 그라볼라스는 끄덕이며 하루나를 올려봤다.

 "하루나는 다치지 않았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레인코트가 살짝 찢어졌다거나 모래투성이가 됐다거나 젖었을 뿐이야... 그라가 훨씬 더 아팠을텐데"

 "나는 튼튼하니까. 아아, 그래도 이젠 틀렸어"

 "어, 어디 아파?"

 "상처는 금방 낫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겠어"

 너무 쉽게, 전혀 심각하지 않은 투로 그라볼라스가 말했기에 하루나는 처음에는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의 모습ㅡ쿠로다 타케노리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라볼라스가 지금까지처럼 학교에 가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하루나의 집에 식사를 하러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쿠로다 타케노리라는 인간이 다시 사라진다는 뜻이다.

 "돌아가지 못한다니... 무슨 뜻이야?"

 "처음부터 꽤나 무리였어. 그 작은 몸집을 유지하기는 꽤 힘들었거든. 아까부터 격렬하게 움직였더니 상처도 생겨서 억누르지 못하게 되버렸어. 근육이 아파서 말이야. 이 3미터 크기도 근육이나 뼈가 꽤 압박이 오니까 괴로워"

 괴롭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그라볼라스의 등에는, 피는 나지 않지만 찢어진 듯한 상처가 몇개나 있었다.

 "엄청 열심히 하면 2주 정도는 사람의 모습으로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벌레는 적응하려고 너무 커져버렸고, 나는 너무 작아졌어. 심하게 무리하면 안 되겠어"

 2주. 약간 긴 가출이라고 어떻게든 변명할 수 있는 일수일까.

 "그럼, 2주 지나면 다시 학교에 올 수 있어?"

 이상하게도, 하루나는 그가 다시 쿠로다 타케노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타케노리로 되버린 사실에 두려워했던 것이 마치 거짓말같다.

 "아니, 잠시 고향에 돌아가려고. 그리고 원래 크기로 돌아가지 않으면 몸이 아파서 견딜 수 없으니까. 묻어둔 살덩어리들이 썩어버릴지도 모르고"

 "에..."

 그건, 그라볼라스가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말보다도 훨씬 큰 충격이었다. 

 "돌아간다니... 그라들의 천적을 해치울 방법, 아직 모르잖아? 그런데 돌아가는 거야?"

 마치 그라볼라스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있던 때보다도 이 범고래의 모습이 더 표정이 풍부해보이는 건 기분탓일까.

 "확실히 아직 모르지만, 내가 여기서 단서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게다가 내가 이 섬에 저런 알을 달고 와서 이런 꼴이 되버렸으니 모두에게 주의를 알려야 하기도 하고. 저게 한 마리라서 다행이었지, 떼로 몰려왔다면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졌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라볼라스는 약간 고개를 기울여 바다를 돌아봤다.

 "이 섬은 조금 기온이 높고, 물과 공기가 맛있지 않고, 복잡한 사회 형성에, 의사소통이 어렵고... 아무튼 나같은 생물체에게는 약간 살기 힘든 환경이긴 하지만 말이야"

 고개를 원위치로 돌리고 하루나를 바라본다.

 "싫지는 않아, 이곳이"


 그러니까, 내가 또 여기 왔을 때, 하루나가 웃으며 반겨주면 기쁘겠어



 그렇게 해줄래? 라며 고개를 기울이고 귀엽게 말하는 그라볼라스에게 하루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정도야 쉬운 일이지"

 "고마워"

 등지느러미가 즐겁다는 듯이 파닥였다.

 "그나저나 그라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 거야... 이거 전에 물어봤었던가? 말로 뭐라고 하는지 모른다고 했었던 듯한데"

 "아아, 조금 공부했으니까, 제대로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설명할 수는 있어"

 그라볼라스의 고향 바다. 멀다고 하니까 북극해나 남빙해 쯤일까. 두세달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예상을 했던 하루나였지만, 그녀의 예상은 손쉽게 깨져버렸다.

 "광년이라는 단위는 알겠는데, 내가 어느 속도로 헤엄쳐 왔는지 모르겠어. 공기와 물이 없는 곳이었으니 꽤 멀리 헤엄쳐왔긴 한데. 여기는 은하계라고 하던가? 내 고향은 은하계 밖에 있는 것같은데, 은하계란 직경 10만광년 정도 되잖아. 내 고향에서 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공전주기나 자전주기는 여기 와서 알았으니까 내가 느끼는 시간이랑 하루나가 느끼는 시간이 일치하는지 모르겠어. 돌아갈 때 의식해서 생각해볼게"

 뭘까. 굉장히 의미불명인 말을 하는 듯하다. 어째서 갑자기 은하다 광년이다 하는 단어가 나올까.

 "...저기, 그라"

 "왜그래, 하루나?"

 "왜 우주 얘기가 나와?"

 "아, 나와 하루나의 인식의 차이가, 최근들어 알았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라볼라스는 가슴지느러미로 모래를 두드린다.



 하루나에게 있어서 바다란 이 물만 뜻하는 모양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바다는 이 물을 포함해 사람들이 말하는 하늘ㅡ우주를 말해. 하루나는 나를 이 물 밑에서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사실은 위에서 왔거든. 으음, 뭐라고 할까, 우주해수? 나는 사람들의 말로는 그런 생물체 카테고리에 속할 거야. 뭐, 내가 바다에서 왔건 우주에서 왔건, 큰 차이는 없겠지만. 대체로 바다도 우주도 별로 다를 게 없으니까


 터무니없을 만큼 큰 차이였다.



 그 사실을 들은 하루나의 첫 반응이라고 한다면.

 "...그라는, 우주인이였구나... 이상한 생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범고래가 아니었다니..."

 약간 얼빠진 반응이었다. 이미 감각이 마비되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람이 아니야, 우주범고래가 아닐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 어떻게 여기... 지구... 까지 온 거야?"

 "헤엄쳐서, 말했던가"

 "그건 이상하잖아! 우주는 공기도 없고, 먹을것도 없을테고, 애초에 우주는 엄청 춥거나 덥거나 하잖아? 잘 모르겠지만 추진력은 어떻게 된 건데"

 "공기나 먹을것은 비축해두고 있었어. 춥고 더운 건 참았지. 추진력이라는 건 우주를 헤엄치기 위한 에너지를 말하는 거야? 그건, 이걸로"

 이마의 푸른 수정을 가슴지느러미로 가르키며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그라볼라스를, 하루나는 놀라야하나 까무러쳐야하나, 아니면 이게 꿈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한 순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제와서지만... 이 무슨 비상식적인 생물이야, 그라는..."

 "그런가"

 "그렇다구..."

 하루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웃으면서 보내줘"

 "...어, 벌써 가려고?"

 "이제 육지에는 올라가지 못하니까. 헤이하치를 부탁해...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둬 줘. 나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고 정도는 말해줘"

 "그런 말 했다가는 사이토 군이 화낸다구"

 "그것도 그런가... 아, 이걸 줄게. 원래 네 물건이지만"

 그라볼라스가 갑자기 입을 열더니 핑크빛 혀를 내밀어도 하루나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혀 위에 어디서 본 듯한 오카리나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 하루나의 세계엔 놀랄 일이 많은 모양이다.

 "...내, 오카리나"

 오랜만에 본 그것을, 하루나는 '자기 물건'이라고 처음 인식했다. 지금까지 그건 '할머니의 오카리나'였지, 자기 소유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내 오카리나'라는 말이 나온 사실에, 하루나 스스로도 놀랐다.

 살짝 손을 대보았다. 그라볼라스의 입 안에 있던것 치고는 그렇게 젖어있지 않았다. 작은 상처가 늘어나고 안에 모래가 차서 지금 당장 불지는 못하겠지만, 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으로써는 딱히 상관 없었다.

 다시, 돌아왔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까 바닷속에서 발견했어.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하루나 거였구나. 다행이야"

 "응... 고마워, 정말로"

 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평소처럼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하면 될까. 

 "저기, 그라. 그라의 동료들은 고맙다는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해?"

 "으음, 우리들은 말이 아니라 음파로 대화하니까. 음파를 날려서 직접 전하지"

 "...그건, 나한테는 무리겠네"

 "뭐야, 하루나는 우덜식으로 인사하고 싶다고 생각했구나"

 그렇다. 그라볼라스는 줄곧 하루나의ㅡ인간식에 맞춰주었다. 말도, 사는 방식도, 먹을것도.

 마지막 인사 정도는 그라볼라스에게 맞춰주고 싶었다.

 "감사, 와는 다르지만, 사이 좋은 친구를 지나칠 때에는 가슴지느러미를 서로 맞대거나 해"

 가슴지느러미. 사람의 부위로 치자면 팔 정도 될까.

 "악수, 같은 걸까"

 "글쎄?"

 하루나는 파도치는 곳에 있는 그라볼라스의 가슴지느러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1미터 가까이에 있는 그 검게 빛나는 가슴지느러미의 끝을, 하루나는 양손으로 잡았다.

 차갑다. 그리고 겉보기에서 연상되는 것보다 훨씬 껄끔거리는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본다.

 "간지러우니까 좀 더 확실히 만져줘. 싫다면 됐지만"

 하루나는 그라볼라스의 요청에 힘차게 그의 가슴지느러미를 잡는 것으로 대답했다.



 "고마워"



 둘의 말이 겹쳐졌다.

 그리고 헤어질 때까지, 그 외의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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