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쿠구구구구……
끼이이익──────…… 철컹~~~~!
탑 내부로 통하는 무거운 문이 열리고, 수백년만에 햇살이 스며든다.
자연히 만들어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지어졌다고 생각되는 이 탑은, 드러나있는 돌벽 군데군데를 보강하기 위한 돌이 박혀있다.
쌔하게 피부로 전해지는 냉기는, 그 탓인지 영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부르르르…… 으~~~~ 추워라"
추운 나머지 몸을 떠는 갈프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위를 올려다본다.
"히야~~~~~!! 높구만…… 이거, 위에 도착할 때면 해가 지겠는데요"
장식품은 커녕 창문조차 없는 살풍경한 원형 탑의 내부는, 벽면에 달라붙은 것처럼 설치되어있는 조말한 돌계단이 나선처럼 위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싫으면 여기서 기다려야지 뭐"
라샤가 진한 자색의 망토를 펄럭이더니 길고 아름다운 금발을 쓸어넘기며 말한다.
"그, 그럴 리가요!!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합죠"
당황하며 돌계단에 발을 올리려는 갈프의 목덜미를 미겔이 붙잡는다.
"왜, 왜 그러십니까요?!"
"당황하지 말라고! 잘 봐 아저씨!!"
"헤?!"
쭈뼛쭈뼛 내딛으려던 발을 치운 갈프는 돌계단을 쳐다본다.
"우히익?!"
잘 보니, 말끔히 숨겨져있긴 하지만, 돌계단에 로프가 놓여있으며 측면에는 설치된 함정을 기동시키는 장치가 있었다.
"어이쿠야……"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마는 갈프. 시니컬한 냉소를 띄우며 돌계단을 노려보던 미겔이 중얼거린다.
"얌전히 위로 보내줄 것 같지는 않구만……"
미겔의 졸린 듯이 처진 눈이 점점 더 처진다. 돌계단 여기저기에 보이는 함정 스위치를 찾아내는 듯하다.
"이거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쾅! 하는 녀석이군"
"그, 그런!!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요! 두 분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주십쇼"
엉덩이를 땅에 박은 채로 호소하는 갈프.
"그런 말을 해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정돈되지 않은 수염을 쓰다듬는 미겔은, 딱 봐도 듬직한 거구의 사내다. 등 뒤에 짊어진 대검과 오른쪽 어깨의 보호구 외에는 무장다운 장비를 몸에 두르고 있지는 않지만, 단련된 근육을 보아하니 상당히 실력있는 검사임에 틀림없다.
"여긴 내가 나설 곳이 아닌 모양이군…… 라샤, 너한테 맡길게"
지명받은 라샤가 앞으로 나선다.
"이러쿵저러쿵 말은 하면서, 너무 나한테 의존하는 거 아냐? 이러니까 남자라는 것들은……"
궁시렁궁시렁 말하면서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양손을 벌리며 주문을 영창한다.
"대기를 떠도는 정령들이여! 내 갈길을 막는 자를 제압하고, 보다 탄탄한 길을 나타내라!!"
키────────잉……
슈우욱!!
팟──하는 빛이 가득 넘쳐흐른다.
쩌저저저저적……
파직───!!
눈으로 보이는 모든 함정 스위치가 얼어붙는다.
"호──!! 이거 굉장하군요"
감탄하는 갈프. 그 말을 들은 라샤는 득의양양해서 허리에 손을 얹고는,
"후후…… 이 정도 쯤이야 당연하지. 그 꼬랑지 자라난 위건 꼬마 계집과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하다구"
"이럴 거였으면 굳이 그 둘을 가둬둘 필요도 없지 않았나……?"
"난 말이지, 일은 신중을 기하며 하는 주의야. 게다가 내 마법은 애들 눈속임과는 차원이 다르다구. 함정 청소같은 데에 쓸 정도로 싸지 않단 말이야!! 알겠어?!"
"아이고,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라샤는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되돌려주는 타입인가보다. 평소엔 말빨로 먹고 사는 상인 갈프도 두 손 다 들었다.
"뭐, 그렇다니까. 성격은 둘째치고, 라샤의 마법만큼은 천하제일이지! 의지가 된다고"
갈프의 목덜미를 붙잡고 일으켜세우는 미겔을, 라샤가 째려본다.
"미겔!! 그게 무슨 말이야?!"
귀신같이 알아듣는 라샤의 반응에 철렁하는 미겔.
"헤헤…… 자, 자! 보물은 이제 코앞이잖아!! 자잘한 일은 신경쓰지 말고 '만능의 힘'을 얻으러 가자구!!"
대충 얼버무리며 돌계단을 올라가는 미겔과, 당황해서 그 뒤를 따라가는 갈프와 길. 그런 둘을 다시금 째려보는 라샤였다.
"정말…… 이러니 남자라는 것들은!!"
라샤의 남성 혐오는 뿌리가 깊은 모양이다.
쾅…… 쿵…… 쾅, 쾅!!
사두르그용의 부조 건너편에서 여러 방법으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쾅!!
분한 나머지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차는 이리.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아하아…… 젠장…… 뭘 어떡해도 열리지 않네, 진짜!!"
어깨를 들썩이는 이리도, 이제 달리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땀을 흘리며 멍한 얼굴로 팜을 바라보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팜, 마법으로 이 문을 박살내버려!"
그 말을 들은 팜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에?! ……아, 안돼 그런!! 물건을 망가뜨리는 마법을 사용하면, 정령들에게 미움을 받는다구~~~!!"
"딱히 나쁜 짓에 쓴다는 말이 아니잖아"
"안돼안돼! 말도 걸지 않게 된단 말이야!!"
앞서 말했듯이, 위건족의 마법은 정령과 상호이해를 깊게 만들고,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령들의 힘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이라는 사고회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법을 파괴 행위에 사용하면, 정령과의 신뢰관계를 망치게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있는 팜에게 마법을 사용하라고 부탁한 이리였지만,
"……정말, 이러니까 위건족이랑은 해먹기 힘들다니까"
한숨을 쉬며, 어째서인지 몸에 걸친 갑옷이나 의복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미안……이리"
송구스럽다는 듯이 사과하는 팜은, 그런 이리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난 원래부터 미움받는 몸이니까!! ……그보다 팜, 약은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속옷차림이 된 이리가 준비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발을 풀며 물어본다.
"잠깐 기다려봐……"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내 내용물을 확인하는 팜. 안에는 검은 환약이 네댓알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다섯 번 분량, 인가?"
그 말을 들은 이리가 절규한다.
"엑?! 벌써 그거밖에 안 남았다고?! ……어쩔 수 없네, 진짜. ……팜, 다음엔 절대로 너한테 시킬 테니까!! 알겠어?!"
작게 끄덕이는 팜. 대답할 여력도 없나보다.
"……미안"
이리가 마법을 쓰기 위해 옷을 벗는 일과, 팜이 든 환약과는 깊은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노사가 건 저주와 뭔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가 밝혀지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이리는 문을 향해 양 손을 뻗고 의식을 집중한다.
"대지를 구성하는 자들이여!! 내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으니. 그 힘으로 내 갈길을 열어라!!"
주문과 함께 이리의 손바닥이 눈부신 빛을 쏜다.
키──────잉!!
붕…
마법 발동과 함께 백색 연기가 이리의 몸을 뒤덮었다.
2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하고 과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폭포처럼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갈프가 첫 타자로 우는 소리를 낸다.
"히익…… 히엑…… 정말 오룩스 왕도 이런 계단을 올랐을까요? 저는 이제 무릎이 떨릴 지경인지라…… 하아, 힘드네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면 되잖아"
과연 영원처럼 계속되는 회랑에 짜증이 났는지, 라샤의 대답에도 여유가 없었다.
"헷…… 정말 욕심 많은 아저씨라니까"
입으로는 이죽거리면서도 세 사람은 한결같이 돌계단을 오른다.
선두를 가던 라샤의 전방에 정령의 빛이 길을 이끌듯 떠오른다. 이전 팜이 로드를 빛나게 한 것과 같은 원리지만, 라샤는 팜과 다르게 로드를 사용하지 않고도 정령의 힘을 집중시킬 수 있다.
그 정령의 빛 앞에, 드디어 꼭대기로 보이는 작은 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르르륵……
창문 하나 없는 다섯 평 남짓한 자그마한 방에, 어디선가 들어왔는지 자그마한 가루가 천장 일부로부터 흩날리고 있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떨어져 쌓인 자그마한 모래의 산이, 오백년이라는 세월을 서술하는 것 같다.
정령의 빛을 따라 올라온 세 명과 한 마리는, 방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저 문……"
살풍경한 작은 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게 의식용 문인가? 어디, 여긴 내가……"
뿌드득뿌드득 손가락 뼈를 울리며 미겔이 문을 열어보려고 손을 댄다.
끼~~~~~~~~~~~익……
생각과는 다르게, 문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열리고 말았다.
"어라라……"
역으로 경계심을 품게 되었는지, 미겔이 등 뒤의 검으로 손을 뻗으며 주의 깊게 내부를 바라본다.
사방을 깔끔하게 벽돌로 쌓아올린 그 방은, 명백히 무언가의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깔린 융단이나 커튼도, 색은 바랬지만 모양만큼은 거의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중앙 정면의 벽에는 커다란 왕국 문장이 새겨져있다.
"아무래도, 함정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걸"
확인을 끝마친 셋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관이 한 짝 있을 뿐이잖아"
미겔의 말대로, 말끔하게 정비된 방에는, 정중앙에 고귀한 인물을 묻어둔 것처럼 보이는 고급진 관이 한 짝 안치되어있을 뿐이었다.
"정말 여기가 맞아? '만능의 힘'이 있는 곳 말이야!"
"그러니까 너 말이야, 뇌까지 근육이라는 말을 듣는 거야! 잘 보라고!!"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라샤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그곳에는 무언가를 담아두기 위한 움푹 패인 단상이 놓여있었다.
"……이게, 어쨌단 말이야, 라샤?"
아직 사정 파악이 되지 않은 미겔을, 라샤가 있는 힘껏 매도한다.
"정말 멍청이구나, 너! ……이렇게 하는 거야!!"
얼타고 있는 미겔의 손에서 석상을 빼앗은 라샤가 단상을 향해 걸어간다.
철컥……
라샤의 생각대로, 석상은 딱 맞춘 것처럼 패인 공간에 쏙 들어갔다.
"후후…… 준비는 다 됐어!"
딱!
라샤가 손가락을 울리자, 정령의 빛이 화아악 사라졌다.
그리고 망토를 벗어던지듯 양손을 좌우로 크게 펼치며 크게 외친다.
"자! 나에게 '만능의 힘'을!!"
"어이 이봐, '우리들'이잖아?!"
바로 정정하는 미겔.
"아, 미안. 무심코……"
웃으며 얼버무리는 라샤를 미겔이 노려본다.
"……나 참, 방심할 틈이 없다니까"
"호호호호……"
그런 두 사람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갈프와 길.
"정말 동료 맞나요, 댁들?"
그런 얼빠진 대화를 어이가 없다는 듯이 올려보던 길이 별안간 한쪽 귀를 쫑긋 새우며 갑자기 경계 태세를 취하듯 몸을 가누고 으르렁거린다.
"그르르릉……"
그 소리에 세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석상을 바라본다. 아무 특색도 없었던 석상이 점점 옅은 빛을 쏘아내기 시작한다.
"……소령석……?"
내뿜어지는 빛을 바라보며 라샤가 중얼거린다.
"예?! 그게 뭔가요?"
갈프가 되묻는다.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야. 정령의 힘을 모아 몸을 재현하고, 거기에 혼을 깃들인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있었을 줄이야 깜짝 놀랐는걸"
"그렇단, 말씀은?"
"그래, 옛 문명의 유물이야"
라샤의 말대로, 석상의 주변으로 호출된 정령들의 빛이 관 위에 모이더니,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간다.
"드디어 납셨군"
고대 소령술을 눈앞에 두고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라샤였지만, '만능의 힘'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버렸다.
기쁜듯 눈을 빛내며 숭배라도 하는 것처럼 양손을 마주잡는 갈프.
"이걸로 뭐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어!!"
우러러보는 일동 앞에서,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여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핀트가 맞춰지듯 디테일이 제대로 나타난 그 모습은, 신분이 높은 왕족같아 보인다. 그리고, 마치 잠들어있다가 깨어난 것처럼 감겨있던 크고 아름다운 눈꺼풀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헤헤…… 개봉박두로군!!"
미겔이 싱글벙글 웃는다.
하늘에 떠있는 물처럼 맑고 투명한 점만 빼면, 평범한 인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렇다곤 해도 훌륭한 기술인걸"
"이거 참 고우신 아녀자입니다 그려……"
푹 빠져버린 갈프. 라샤도 그 완벽한 술법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고는, 여성 석상이 처음으로 셋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저를 불러냈나요?>
조용하게 묻는 여성 석상에게, 홀린 듯이 라샤가 대답한다.
"무, 물론이죠!! 정말이지, 여기까지 오는데, 엄청난 고생을 겪고……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랍니다…… 아흐흑……"
동정을 사려고 생각한 것인지, 얼굴을 망토로 가리며 우는 시늉까지 내는 라샤. 하지만, 여성 석상은 그런 일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질문을 계속할 뿐이다.
<그건 어째서죠?>
"어, 어째서냐뇨, 그야, 소원이 있기 때문이죠. 호호호호!!"
무심코 본성이 나와버린 라샤였다.
그러나 여성 석상은 라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지,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목을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에게 무엇을 바란다고 말씀하시는 건지요?>
"무슨, 아니…… 호호호, 싫네요, 정말. 시치미를 떼시다니"
그런 대화에 조바심이 났는지 미겔이 앞으로 나선다.
"댁이 갖고 있잖아?! '만능의 힘'을 말이야!!"
미겔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프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두 사람 앞으로 나섰다. 여성 석상의 앞에 납짝 엎드리며 손을 마주대고 외친다.
"부, 부디, 저를 부자로 만들어주십쇼!!"
꽝!!
그런 갈프의 후두부에 미겔의 주먹이 작렬한다.
"새치기 하지 말라고, 아저씨!!"
"헤헤헤, 저도 모르게 그만……"
머리를 문지르며 쑥쓰럽게 웃는 갈프였다.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여성 석상에게, 수습이라도 하려듯 라샤가 웃으며 말을 건다.
"오, 오호호호호!! 실례했습니다. ……정말 다들, 걸신걸린 마냥 너무 성급했죠. 제대로 순서대로 말할테니, 부디 '만능의 힘'으로 저희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세요!"
<기다려주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말씀하시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요……>
그 말에 일동 어리둥절.
"네?! 그게, 무슨 뜻이죠?!"
기다리다 지쳤는지, 미겔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위협한다.
"이런 썅──!! 이쪽이 숙이고 들어가주니 별 시덥잖은 개소리를……"
퍽!!
라샤가 돌멩이를 미겔의 얼굴에 집어던진다.
미겔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돌아보고는,
"뭐, 뭐하는 거야, 라샤!!"
"그러니까 멍청이라는 거야, 당신은!! 일부러 시치미를 떼면서 우리를 시험하려는 거잖아!!"
"아……"
라샤와 미겔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갈프가 경배하듯 손바닥을 비비며 달려든다.
"모쪼록, 부자로!! 저를 부자로~~~~~!!"
"아 진짜!! 이놈이고 저놈이고!!"
라샤는 갈프의 목덜미를 붙잡고 잡아당기느라 필사적이다.
그런 인간들의 꼴사나운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길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
식은땀을 흘리면서 라샤가 여성 석상을 향해 미소짓는다.
"호호호…… 죄, 죄송하네요, 시간을 잡아먹어서…… 그, 저희들은 '만능의 힘'을 나쁜 짓에 쓰려고는 요만큼도 생각해본 적 없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제가 '만능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로군요?>
과연 라샤도 초조해졌는지, 미소를 지으면서도 미간에는 주름이 생기고 있다.
"무, 물론이죠. 그러니 고생을 해가면서 여기까지……"
라샤의 말을, 여성 석상이 가로막는다.
<기다려주시죠>
"네, 네?!"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만능의 힘'같은 건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엑?!"
"거짓말!!"
화음을 맞추며 외치는 미겔과 갈프.
여성 석상이 하는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웃은 채로 경직되버린 라샤.
"저, 정말, 농담도 참…… 싫네요"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라며, 여성 석상은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리피아나. ……일찍이 루다크 국왕 오룩스의 아내였지요>
"네?!"
"그, 그럼, 다, 당신이 루다크 전설의 기반이 되었던, 그……"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라샤가 몸을 내밀며 물어본다. 왕비의 영혼은, 그 아름다운 케이프를 하늘로 띄우며 이어서 말한다.
<……제 혼이 육체를 벗어나던 때부터, 제게는 시간 개념이 사라졌지요.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답니다. 반대로 제가 물어봐도 될까요? 대체 지금은 언제이며, 왕국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조금 진정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라샤가 설명하기 시작한다.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왕비께서 돌아가신 뒤, 오백년이 지났습니다. 물론 루다크 왕국도 이미 존재하지 않고요"
그 말을 듣자 왕비의 평온하던 표정에 그늘이 진다.
<그럼 왕은? 오룩스 왕은 어떻게 되었죠?>
"왕비님의 죽음에 슬퍼하느라 기력이 쇠하셔서, 왕은 정치에 관심을 잃으셨다고 해요. 덕분에 왕국은 쇠퇴하고, 한때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만능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전승만이 지금까지 기록되고 있죠. 하지만 당시로써는 금단으로 취급받던 마법을 감히 부활시켰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 오룩스 왕은, 그 '만능의 힘'과 함께 스스로 이 나라 어딘가에 봉인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이곳에 온 건가요?>
"바로 그 말씀대로죠!!"
과연 입담이 좋은 라샤. 그 과장된 몸동작에 홀딱 빠져서 몰입해버린 미겔과 갈프.
"저 사람, 상인으로 전직해서 나랑 같이 일하면 그야말로……"
"관둬라, 관둬. 매상 전부 뜯기고 말 테니까"
그런 두 사람을 째려보는 것보다, 지금 라샤는 왕비의 영혼에게 달라붙는 일이 중요한 모양이다. 눈동자를 촉촉하게 적시켜 동정을 유도하듯 호소한다.
"저희는 순수하게 전설의 진상을 확인하기를 바라는 학자랍니다!! 부디 감추지 마시고 보여주시죠, '만능의 힘'을!!"
'학자'라는 말을 듣고, 미겔과 갈프는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왕비의 영혼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모처럼 여기까지 오셨는데 죄송합니다만…… 저는 '만능의 힘'같은 건 지니고 있지 않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왕가의 증표'라는 힘을 빌려, 지난날처럼 왕과 만나,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격려하는 정도밖에……>
"하, 하지만 전승으로는, 오룩스 왕께선 '힘'을 사용하러 이곳에 왔다고……"
아직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얼굴을 굳힌 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라샤에게, 왕비의 영혼이 조용하게 말한다.
<……확실히 왕은, 이 장소에서 금단의 마법으로부터 힘을 얻으셨죠. 하지만, 그건 이렇게 '왕가의 증표'인 석상을 사용해, 제 영혼을 불러내는 일일 뿐이었어요>
"그, 그런……"
라샤의 경직된 얼굴이 울상으로 변한다. 이런 면에서는 미겔 쪽이 훨씬 포기가 빠른 모양이다.
"울어봤자 변하지 않는다고, 라샤. 알았으면 이런 음침한 곳에 볼일은 없지. 빨랑 나가자고!"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미겔을 노려보며, 라샤가 다시 묻는다.
"달리…… 달리 왕께서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셨나요?!"
<……그러고보니……>
왕비의 그 말에, 미겔이 발걸음을 멈춘다.
왕비의 영혼은 무언가 떠올리듯이, 그녀의 등 뒤에 새겨진 왕국의 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루다크 왕국의 문장이 보이시나요?>
"네? 네 뭐…… 저 문장이 뭔가 있나요?"
<저 문장은 초대 루다크 국왕의 공을 기려 도안화된 것이랍니다. 거울과 검, 그리고 단상에 있는 '왕가의 증표'가 그려져있는 모습이 보이시죠?>
그 말을 듣고 다시 문장을 자세히 보니, 거울의 외곽선이 문장의 프레임처럼 되어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이리 일행에게 빼앗은 석상이, 그리고 그보다 더 위쪽엔 커다란 검이 확실하게 그려져있다.
"……진짜네요……"
<왕국에는 '정령왕 사가스의 검', '진실의 거울', 그리고 '왕가의 증표', 이 세 가지가 왕족의 보물로써, 한 전승과 함께 대대로 전해지고 있었죠>
"그, 그 전승이란?!"
다시 흥미를 보이며 미겔이 묻는다.
<그 세 보물을 모두 모으면 얻을 수 있는 마법이라고 들었어요>
"'만능의 힘'이다!!"
일제히 목소리를 맞추며 외치는 일동.
<그게 정말 '만능의 힘'이라 불리는 것인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오룩스 대에는, 아시다시피 마법이란 금단의 힘이었죠. 악용되선 안 된다, 라며 세 보물을 각기 다른 장소에 봉인하고, 그 장소는 왕만이 대대로 알 뿐……. 왕비인 저조차 물어보지도 못했답니다>
"네?! 그럼, 왕비님도 모르신단 말씀이신가요?"
<네…… 보시는대로, '왕가의 증표'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힘이 담겨있죠. 왕께서는 금기를 깨면서까지 '왕가의 증표'를 봉인한 이 장소에 제 관을 안치하고, 이따금씩 저를 만나러 와주셨답니다>
망연해하는 일동.
"그, 그런……"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송구스럽네요……>
"아,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허무하다는 눈빛으로 대답하는 라샤.
<부디 '왕가의 증표'를 가져가주세요. 단, 악의가 없는 여러분들에게 딱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뭐죠?"
<오룩스 왕이 스스로를 봉인했다, 라는 말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겠죠……. 오늘날에는 제가 알고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엔 없고요. 그러니 부디 저를 조용히 잠들게 해주세요. 이 장소도, 부디 다시 봉인해주셨으면 해요>
슬퍼하는 왕비의 표정을 보고 정신을 차린 라샤가 대답한다.
"알겠어요, 저도 같은 여자인걸요……. 약속드리죠! 이 장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부디 편히 잠드세요"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슬픈 미소를 띄우며, 왕비의 영혼은 사라졌다.
"…………"
방 안에 다시 어둠과 정적이 찾아왔다.
3
끼익──────
세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듯, 관이 들어있던 방의 문이 슬픈 비명을 지르며 열린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낙심해 모든 기력을 빨린 라샤와 미겔, 갈프다.
"니시시시……"
길만이 '꼴 좋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지을 뿐이었다.
"하아~~~~……"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을 쉬는 셋. 상당히 쇼크인 모양이다.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갈프가 중얼거린다.
"시끄럽네!! 나 참…… 그건 그렇고 재미가 없구만. 애초에 보물이란 대판 싸우고 손에 넣는 것이잖아. 착실하게 모험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니까"
아무래도 미겔의 흥미는 다른 두 사람과는 다른가보다.
"그럼 너한테는 안 나눠주지!!"
"이봐이봐, 난 필요 없다고는 한 마디도……"
"시끄러워!!"
그렇게 말하며 미겔을 째려보는 라샤도, 평소같은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아……"
또다시 한숨을 쉬고, 찬찬히 '왕가의 증표'를 바라본다.
"그렇다곤 해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제서야 출발선에 섰을 뿐이라니……"
라며 중얼거리는 라샤를, 분노가 가득 실린 목소리가 습격한다.
"누가 고생을 했다고?! 아앙~~~?!"
숨을 삼키며 앞을 보자, 아무도 없을 터인 회랑 출구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라샤는 반사적으로 몸을 가누며 눈을 부릅뜬다.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고!!"
무시무시한 태도를 보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보물창고에 갇혀있을 터인 팜과 이리, 그리고 거대한 몸뚱이로 출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버둥대고 있는 갑옷 무사였다.
"아, 어───휴! 잘도 무사했구나……"
생각도 못한 사태에 라샤의 허세도 입 안을 멤돌 뿐이었다.
버둥대는 갑옷 무사의 양 어깨에 걸터앉은 팜과 이리가 셋을 노려본다.
"잘도 우리들을 이용해먹었겠다! 이 빚은 반드시 받아내주지!!"
그 말을 듣고 어느쪽이 더 강한지 판단했는지, 미겔 뒤에 숨어있던 갈프가 훌쩍 뛰어나오더니 팜과 이리 앞에 넙죽 엎드렸다.
"히익~~~~! 저, 정말 잠시 딴마음을 품고 말았습니다요~~~~~!!"
아무리 온화한 팜이라도, 과연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안돼안돼!! 더이상 속지 않아!!"
발버둥치는 갑옷 무사의 머리를 두드리며, 이리가 외친다.
"자, 당신 적은 눈 앞에 있다고! 소중한 석상을 훔쳐간 좀도둑이 말이야!!"
이리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든 라샤 일행을 바라보더니, 라샤의 손에 있는 '왕가의 증표'를 확인하자마자 갑옷 무사가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구오~~~~~~~~~~!!"
"으악!! 바보야! 갑자기 움직이지 마!!"
걸려있던 돌덩이를 무너트리며 난동부리기 시작한 갑옷 무사에게, 팜과 이리가 당황하며 달라붙는다.
자아를 잃은 것처럼 발광하는 갑옷 무사는, 손에 든 토마호크를 휘두르며 라샤 일행을 습격한다.
"히이이익~~~~!!"
후웅!!
간발의 차, 당황해 물러선 라샤의 코앞을 날아가듯 스쳐가는 토마호크. 예기치 않게 시작된 대난투에, 다들 허둥지둥할 뿐이다.
"자, 잠깐 기다려봐!! 이렇게 좁은 곳에서~~~!!"
'왕가의 증표'를 품은 라샤가 좁은 방 안을 향해 도망친다.
"그만두길 원한다면 석상에서 손을 떼시지!!"
갑옷 무사의 어깨에 딱 달라붙은 채로 이리가 외친다. 사방팔방에 토마호크를 휘두르는 이 상황에서는, 갑옷 무사의 몸에 달라붙어있는 편이 가장 낫다.
붕!!
콰───앙!!
마구 휘두르는 토마호크를 피하며 춤추던 갈프와 길도 방 안으로 굴러들어가고 만다.
"히이이익~~~!! 히이이이이이익~~~~!!"
다양한 포즈로 갑옷 무사의 공격을 피하는 라샤도 필사적이다.
"대, 대기를 떠도는 정……?! 꺄악!!"
쿠궁……
"정말!! 마법도 쓰지 못하겠잖아!"
당황해하는 일동의 모습을, 홀로 문에 기대어 바라보던 미겔이 크게 웃는다.
"와──하하하하. 이거 좋구만!"
"자, 잠깐 미겔!! 뭘 웃기만 하는 거야!! 어떻게 좀 해봐!!"
"살고 싶다면 석상을 버리면 되잖아"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꺄악~~~~~!!"
부웅……
콰─────앙!!
라샤의 등 뒤를 토마호크가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다.
얼떨결에 만세 포즈를 하며 석상을 놓치고 마는 라샤.
"앗!! 이런!!"
카앙…… 데굴데굴데굴……
석상은 떽떼굴 굴러가더니, 머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납짝 엎드려있던 갈프 앞까지 굴러간다.
"어라?! 니히히히……"
숨을 삼키면서도 갈프는 망설임 없이 석상을 낚아채더니 빙그레 웃으며 그대로 주머니에 넣는다. 그 순간,
휙!!
갈프의 코끝을 향해 토마호크가 다가온다.
"히, 히이이익~~~~!! 우발적으로 그랬어요~~~~!!"
눈물을 내뿜으며 내던지듯 석상을 버린다. 이번엔 그 석상을 길이 물고 달려간다.
"구오오오~~~~~~!!"
평소 나태하던 모습은 어디로 팽개쳤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길에게, 갑옷 무사는 그저 농락당할 뿐이었다.
"이 멍청한 개가!! 놀고있을 때가 아니라고!!"
더욱 격하게 휘두르는 토마호크를 피하며, 라샤가 길을 향해 뛰어든다.
"갸릉……"
훌렁 자빠지는 길. 그와 함께 석상은 또다시 허공을 멤돈다.
착!!
"헤헤! 잡았다~~~!!"
석상을 손에 넣은 사람은 팜이었다.
"잘했어, 팜!!"
라며 이리가 외치는 순간, 자신의 등 뒤에 있던 팜이 '왕가의 증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갑옷 무사가 이번엔 등 뒤를 긁어내듯 버둥댄다.
"구오──────!!"
"와앗~~~~!! 바보야 그만해~~~~!!"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팜과 이리.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헐떡이며 지켜보던 라샤가, 앉은 채로 미겔을 째려본다.
"미겔, 언제까지 느긋하게 보고만 있을 셈이야!! 저게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고!!"
그 말을 들은 미겔이 귀찮다는 듯이,
"……어쩔 수 없구만"
라고 중얼거리며 겨우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다. 거드름 피우는 그 모습에 이리가 야유를 날린다.
"헹!! 폼잡으면서 갑옷도 입지 않고 말이야! 상처라도 입기 전에 순순히 물러나는 편이 좋을걸!!"
그런 이리의 도발을 들었는지, 미겔이 어깨의 검에 손을 대며 엄지손가락으로 손잡이의 물림쇠를 '챙'하며 푼다.
앞서 말했듯이 미겔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대검은 거의 그의 키만한 거대한 검이다. 즉, 평범하게 잡아끌어서 꺼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미겔의 검 손잡이는 평범한 통 모양 손잡이가 아닌, 한쪽을 열어서 꺼내는 커버 형태로 되어있고, 벌어지는 부분의 위아래 두곳에 물림쇠가 달려있는 형태다. 뽑을 때에도 질질 끌며 뽑는 것이 아닌, 어깨로 지탱하며 아래쪽을 끌어올리는 식이다.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회전시켜서 뽑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미겔같은 완력과 민첩성을 두루 겸비해야만 다룰 수 있는 물건이다.
스윽 한 걸음 내딛는 미겔을, 이리가 다시 한 번 야유한다.
"뭐냐? 그 무식하게 큰 검은?! 그런 멍청한 물건이나 사고 앉았으니 갑옷도 사지 못하는 거라고!!"
그 말을 들이며 씨익 웃는 미겔.
"헤헤…… 이 몸은 갑옷따윈 필요 없어서 말이야. 태어나서 지금껏, 칼에 베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미겔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검을 휘두른다.
슈웅!!
가벼운 소리를 내며 대검이 어깨 위로 미끄러지듯 솟아오른다.
지이잉……!!
"으힉!!"
이리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한 순간 정적이 찾아온 뒤,
쿠우웅~~~~~!!
두 동강이 나버린 갑옷 무사가, 고철덩어리로 돌아가버렸다.
"우왓!!"
철푸덕!!
그대로 팜과 이리가 바닥에 내던져진다. 한 순간에 형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굉장하다~~~!!"
자기가 불리한 입장이 되버렸는데도, 팜은 미겔의 출중한 실력에 솔직하게 감탄해버린다.
그 말을 들은 이리가 어이없다는듯이 말한다.
"하, 저 정도 쯤이야!!"
슝!!
그런 이리의 코앞에, 검이 겨누어진다.
"!! 꼴깍……"
너무나도 빠른 동작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리의 머리에, 미겔의 매도가 쏟아진다.
"난 말이야, 혼자 오십 명의 기마대를 상대한 남자라고! 입을 조심해서 놀려야지, 형씨!!"
'형씨'라는 한 마디에 열이 오른 이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스릉
하는 소리를 내며 미겔의 검이 이리의 셔츠를 찢는다.
방금 전 보물창고의 문을 부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갑옷을 입고 있지 않던 이리의 셔츠 가슴팍이 찢어지며, 풍만한 가슴 굴곡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자 미겔이 당황하며 말한다.
"?! ……혀, 형씨, 여자였수?!"
그 말에 인내심이 끊기고 만 이리.
"누가 형씨냐아아~~~~!!"
퍽!! 쾅! 푹!! 꽝!!
털썩……
안면에 신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미겔이, 대자로 뻗으며 쓰러진다.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며 노려보는 이리.
"……정말!!"
쓰러딘 미겔을, 팜이 싱글벙글 웃으며 훔쳐본다.
"후후후. 그 누구에게도 베인 적이 없다는 것 치고는……"
흰자위를 드러낸 채 신음하는 미겔.
"베인 게 아니라고……"
그런 미겔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흥, 멍청하긴!! 팜, 가자!"
라며 이리가 걸어나가기 시작한 순간,
끼릭끼릭끼릭!!
쿠웅────!!
"우왓!!"
"뭐, 뭐야?!"
별안간 돌바닥이 벗겨지더니, 무수히 많은 파편이 되어 두 사람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의 파편이 팜과 이리의 몸에 달라붙으며, 두 사람을 벽쪽으로 밀어붙인다.
"당했다!!"
조용히 주문을 영창하는 라샤의 모습을 보고, 이리가 외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은 파편과 함께 벽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이 되버렸다.
"……큭. 제, 젠장~~~~!!"
"괴로워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팜과 이리였으나, 자석처럼 달라붙은 파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런 두 사람에게, 라샤가 높은 톤으로 웃는다.
"오──호호호호호! 바보들이구나, 둘 다"
가까이 다가온 라샤가, 지나가는 길에 쓰러져있는 미겔의 얼굴을 짓밟는다.
"너도 마찬가지야!!"
꾸욱……
"……읏!!"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라샤가 허리에 손을 얹고 두 사람을 향해 미소짓는다.
"당신들은 거기서 평생, 왕비님의 상대나 하고 있으라고!"
발버둥치는 팜의 손에서 '왕가의 증표'를 빼앗은 라샤는, 미겔과 갈프를 독촉하며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잘 지내렴, 안녕~~~~~"
움직이지 못하는 두 사람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 이제 곧이었는데~~~~~!!"
"이보다 더 열받을 수가 없겠다고!!"
두 사람의 외침은, 허무하게 탑 안을 멤돌 뿐이었다.
4
대지를 태워버리는 것만 같은 눈부신 태양빛도 점차 사그러들고 있었다. 라샤와 미겔, 그리고 갈프와 길이 유적에서 밖으로 나가려도 할 무렵에는 태양도 하루의 역할을 끝마치고, 유유히 지평선 너머를 향해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 언제나 말은 잘하는 주제에 마무리가 어설프다니까, 너는!!"
"……면몫 없구만……"
오렌지빛의 석양과 함께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밤바람이, 라샤의 망토에 달라붙자,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발걸음도 빨라진다.
팜과 이리가 타고 온 말을 힐끗 바라보며, 암반 뒷쪽으로 돌아가는 라샤와 미겔. 그들이 타고 온 말은 그곳에 묶어두고 온 모양이다.
"응?!"
라샤와 미겔은 자신들의 말을 보고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두 마리 모두 모래 위에 쓰러져있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황하며 달려가는 라샤. 재빨리 말의 목에 손을 대고 맥을 살핀다.
"자고 있어……"
"얘도야!!"
아연실색하며 마주보는 두 사람의 코끝에, 바람을 타고 날아온 가루가 날아온다.
"?!"
반사적으로 망토자락을 끌고와 입을 틀어막은 라샤가 돌아보자, 가죽주머니 주둥이를 이쪽으로 향하며 가루를 바람에 실어 보내는 갈프의 모습이 보인다.
"갈프, 너 이새끼!!"
검에 손을 뻗으며 외치는 미겔. 하지만 갈프는 쫄지 않고 교활한 미소만 띄울 뿐이다.
"니──히히힛. 두 분 모두,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니시시시시시"
길도 함께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이, 이 욕심쟁이 영감이!!"
갈프에게 달려들려는 라샤와 미겔이었으나, 이미 그쯤은 예상했는지, 상당히 강력한 수면제를 준비해온 모습이다.
"으, 윽……"
라샤도 미겔도, 두 걸음 떼었을 뿐인데 무릎을 꿇고 말았다.
"피곤하시죠? 부디 편히 쉬고 계십쇼. 니히히히히!"
그 말을 들은 순간, 의식의 마지막 끈이 풀렸는지 미겔이 푹 쓰러졌다.
"쿨──. 쿠울──……"
그대로 대자로 뻗어 코를 골기 시작한다.
급격히 몰려오는 수마와 필사적으로 싸우는 라샤의 손에서 석상을 손쉽게 빼앗은 갈프가, 잠든 둘을 내려다보며 웃는다.
"그야말로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입죠. 니──히히히힛!!"
"……갈…프……"
분하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 라샤를 흘겨보며, 의연히 자기 말로 향해 걸어가는 갈프와 길.
쿠웅─────!!
말을 타려던 갈프의 등 뒤에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뭐지?!"
갈프가 돌아보니, 팜과 이리가 갇혀있던 탑의 최상층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크, 큰일이군!!"
갈프는 당황하며 말을 걷어찼다.
"켈록…… 켈록……"
탑의 벽면에 뻥 뚫린 구멍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안에서 재채기를 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아닌 팜과 이리였다.
"아 진짜, 오늘 마법 엄청 써댔네, 정말"
역시 이리의 옷과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는 뭔가 관계가 있나보다. 상의 소매가 뻥 뚫린 이리의 모습이 보인다.
한편, 팜은 관을 안치해둔 문을 슬쩍 보고는,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미안해, 왕비님……. 나중에 꼭 고쳐줄게……"
라샤 일행을 찾기 위해 구멍에서 아래쪽을 내려보던 이리가, 급히 말을 달리는 갈프의 모습을 발견한다. 팜을 향해 소리친다.
"팜! 이번에야말로 네가 나설 차례야!! 저 아재를 멈추게 해!"
"좋아 알았어!!"
파괴 마법만 아니라면 팜도 힘이 넘치는 모양이다. 입술을 핥짝 핥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구멍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 저거구나!!"
엄청난 기세로 달리는 말의 모습을 확인한 팜은, 마치 조준하는 것처럼 양 손을 펼치며 말을 바라본다.
"대지에 뿌리박고있는 정령이여! 바라건대 저 자의 발걸음을 멈추어라! ……대지에 물기를!!"
주문과 함께 팜의 손바닥에 정령의 빛이 집중된다.
"이랴!! 이랴!!"
격하게 채찍질을 하며 말을 달리는 갈프.
"누구에게도 건네줄 순 없지!! '만능의 힘'은 내 거야!!"
염불을 외듯이 말하는 갈프의 앞에, 갑자기 이변이 생겨났다.
스스스스슥……
"?!"
땅울림과 함께 모래사장이 갑자기 위로 치솟는다.
쿠구구────!!
믿기지 않게도, 용솟음치는 모래 아래에서 수많은 덩굴과 식물 종류가 무럭무럭 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 뭐야~~~~~?!"
이상한 속도로 뻗어오는 풀줄기가 갈프와 길을 습격한다.
"이히히히히힝!!"
놀란 말은 앞발을 쳐들고, 갈프와 길을 떨어트리더니 굉장한 기세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 이놈아~~~~~?!"
불만을 내뱉을 틈도 없이, 갈프와 길의 몸을 향해 무수한 덩굴이 뻗어온다.
"히익~~~~~~!!"
비통한 외마디비명도 광대한 사막의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갈프와 길은 점점 덩굴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석양이 서쪽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둥지로 돌아가는 새의 지저귐이 밤의 시작을 알린다.
"드르렁─── 쿠울──……"
느긋하게 대자로 뻗어서 자는 미겔과, 쌕쌕 소리내며 잠들어있는 라샤를 로드로 툭툭 건드리는 팜이 보인다.
"요놈! 요놈!"
너무나도 팜다운 귀여운 복수였다.
한편 이리는 갈프를 쫓아 모래사장에 와있었다. 석양에 비춰져 실루엣처럼 떠오른 덩굴덩어리는, 마치 사막에 나타난 오브젝트같이 보이기도 한다.
완전히 덩굴에 휘감겨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 갈프와 길은, 판토마임처럼 묘한 포즈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한 사람과 한 마리를, 이릭가 팔짱을 낀 채로 차갑게 바라본다.
무언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는지, 특기인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갈프가 입을 연다.
"하하…… 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려. 저도 말입죠, 걱정했다구요…… 저, 정말입니다요!"
"……"
"믿어주십쇼. 저는 싫다고 말했는데, 그 둘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래요! 두 분을 속이고 싶다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요!"
조용히 듣고있던 이리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흐응. 그래서?"
움찔하는 갈프.
"그래서? ……그래서, 라니……. 어…… 아…… 아아! 보십쇼, 이, 이렇게 '왕가의 증표'를 드리겠습니다요, 예"
석상을 홱 가로채는 이리.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확인하는 것처럼 석상을 바라보고는, 다시 갈프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리고?"
움찍하는 갈프.
"예? 그리고? ……"
여기까지 와서 시치미를 떼는 갈프에게, 말투를 바꿔서 위협하는 이리.
"바싹 말라 비틀어져서 미라가 되고 싶은 거라면, 뭐 상관 없지만"
깜짝 놀라는 갈프가 당황하며 외친다.
"그, 그럴 리가요!! ……바, 받은 돈도 다 돌려드리겠습니다요"
"좋아!"
드디어 싱긋 웃는 이리.
반대로 낙담해하는 갈프.
그런 주인을, 길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약으로 잠들었던 말도, 팜의 마법으로 눈을 뜨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타고온 말과 또 한 마리의 말에 팜이 짐을 싣고 있다.
"미안해, 아까는 놀라게 해버려서"
아무래도 갈프를 떨어트리고 도망간 말이 돌아왔나보다.
"푸르르릉……"
팜이 코끗을 쓰다듬어줘서 기분이 좋은지 목을 흔들어댄다.
잠든 그대로 밧줄로 꽁꽁 묶은 라샤와 미겔의 곁에, 갈프와 길까지 앉아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제 사람을 속이거나 하지 말라고!!"
여행 준비를 마친 이리가 설교하듯이 말한다. 넙쭉 엎드린 갈프는,
"무, 물론입죠. 내일부터…… 아니, 지금 당장부터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예!!"
혀에 침이라도 바른 것처럼 술술 말하는 그 모습에 질렸다는 표정의 이리.
"글쎄 어떠려나……"
꽁꽁 묶인 채로 몸을 펴는 갈프가 이리를 붙잡으려는듯이 말한다.
"부탁이니까 제발 저도 같이 데려가주십쇼오오"
하지만, 이리는 딱 잘라 거절한다.
"안──돼!!"
"그런 잔인한……"
한심한 표정의 갈프를 무시하고, 이리는 말로 향한다.
"팜! 준비 됐으면 출발하자!!"
'출발'이라는 말에 정신차린 팜이 당황하며 이리에게 말한다.
"자, 잠깐 기다려! 바로 돌아올게!"
그 말에 벙 찌는 이리.
"팜?! 어디 가려고?"
"왕비님의 방을 고쳐놔야지~~~!!"
팜은 이미 성을 향해 달려가며 외치고 있었다.
"……나 참. 이상한 데에서 성실하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리도, 팜을 멈추게 만들 생각은 없어보인다.
팜이 입구에 도착한 순간, 헉 하며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쿠구구구구……
깜짝 놀란 팜이 성을 올려본다.
쿠와아아앙……
"꺄악────!!"
당황해서 바위 뒤로 숨는다.
쿠웅──────!!
순식간에 굉음을 울리며 왕비가 잠든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히익────!!"
망연히 바라보는 팜에게 이리가 다가오더니, 무너진 성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이걸로…… 이제 관이 훼손될 걱정도 없어졌군"
슬픈듯이 올려다보는 팜.
"우리들이 오지만 않았더라면……. 왕비님, 화내고 있겠지, 분명……"
그런 팜의 어깨를 상냥하게 토닥이며 이리가 속삭인다.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걸"
"응?"
이리는 말없이 팜의 발밑을 가리킨다.
"?"
이리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모래 위에 반짝이는 반지 하나가 굴러와 있었다.
"분명 네 마음에 대한 왕비님의 보답이야. 받아두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슬프게 빛나는 반지를, 팜이 소중히 품는다.
"……응"
"자, 출발하자, 팜!! 우리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만능의 힘'이니까!"
"물론이지!!"
활기차게 대답하며 팜이 일어선다.
'왕가의 증표'를 손에 넣은 팜과 이리는, 두 번째 보물을 목표로 다음 모험을 출발하려 하고 잇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배웅하는 듯이, 부드러운 달빛이 모래의 바다를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