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비의 지하도시 사레이엄은, 지하 깊이 내려감에 따라 파괴된 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확실히 일부는 내란으로 인해 생겨났을 법한 흔적이 보였지만, 다른 대부분은 아무래도 한 순간에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벽이나 기둥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처럼 상층부로 뻗어나 거목이 된 한 그루의 나무에 휩싸여 있었다.
이리 일행은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마저 파괴되었기에, 조심조심하며 석화되어버린 뿌리를 타고 최하층으로 향했다.
"아, 저기…… 누님?"
딱히 정해둔 곳도 없이 그저 아래로 내려가기만 할 뿐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진행에, 갈프는 불안을 느꼈다.
"정말 이쪽이 맞습니까요? 그냥 아래로 향하기만 할 뿐인 것이……"
조심스레 물어보는 갈프에게, 이리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말한다.
"역시, 너는 사기꾼같은 상인이 어울리네"
"헷?!"
갈프는 이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이리를 바라본다.
"무슨 뜻입니까요?"
"보면 모르겠어?"
이리가 귀찮다는 듯이 주변의 벽이나 기둥으로 뻗어있는 거목의 뿌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거목의 뿌리는 전부 한 쪽에서 펼쳐진 거잖아?"
확실히 이리의 말대로, 거목 뿌리는 일행이 향하는 방향에서 방사형태로 뻗어있었다.
"……그러니까 저쪽이 이 대사건의 중심지. 어떠한 힘의 근원지라고. 알겠어?"
"하아……"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갈프에게, 등 뒤에서 라엘이 말을 건다.
"갈프 씨. 이리 씨의 말대로예요. '힘'의 근원은 도시의 최하층, 그리고 도시의 중심으로 좁혀진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라엘의 양 어깨에는, 각각 라샤와 팜이 달라붙어 서로 견제하는 것처럼 노려보고 있다. 모두의 이야기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형씨. 너,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지?"
최후미에서 귀찮다는 듯이 걸어오던 미겔이 대수롭지 않게 물어본다.
"……아버지에게…… 들었어요"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라엘에게, 미겔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호오, 꽤나 사정을 잘 아는 아버지구만…… 대체 뭐하던 사람이지? 당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미겔은 라엘을 노골적으로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그건……"
우물거리는 라엘의 태도는, 점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이리가 굳이 미겔의 노골적인 질문을 막지 않은 것도, 이리 또한 라엘의 정체를 알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세계에서도 그렇듯이, 직업에 따라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제각각 특징적인 표정이나 분위기를 띄우는 법이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몸에 베이고 마는 것이다.
이리나 팜, 라샤에 미겔 역시 한 명도 빠짐없이, 모험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라엘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리 무리 사이에 잘못 들어온 백조처럼, 전혀 다른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감추려 해도 언동 하나하나에 감춰지지 않는 고귀함을, 미겔도 이리도 이미 간파한 뒤였다.
"왜 그러지? 말 못하나?"
추궁하는 미겔을 막아선 것은, 또다시 라샤였다.
"조용히 해!! 이 일은 쓸데없는 탐색은 하지 않는다는 룰이었잖아!!"
"그, 그래도, 라샤……"
"우리 둘에게 과거는 필요 없어요. 그쵸, 라엘 님?"
촉촉한 눈동자로 요염하게 속삭이는 라샤 역시, 다른 의미로 라엘의 '냄새'를 감지해낸 모양이다. 라샤는 의외로 명품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정말!! 찰싹찰싹 달라붙지좀 마, 기분 나빠!!"
질투를 활활 태우는 팜이, 필요 이상으로 라엘에게 달라붙는 라샤를 밀쳐낸다.
"이게 어른의 색기라는 거란다! 꼬맹이는 짜져있어!!"
그렇게 말하고 이번엔 라샤가 팜을 밀친다.
"뭐하는 거야!!"
"네가 먼저 그랬잖아!!"
"그렇게 세게 안 했거든!!"
이렇게 되면 꼬맹이들의 싸움 이하다.
"……이런이런"
이리가 한숨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란스러운 와중, 갈프의 발 근처를 걷고있던 길의 코가 쫑긋하며 움직인다.
"멍……"
"응? 왜 그러냐, 길?"
갈프가 대수롭지 않게 길이 바라보던 곳으로 눈을 돌리자, 무너진 회랑 끝에 커다란 문이 보인다.
"저, 저건?!"
헉 하는 갈프에게, 이리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씩 웃는다.
"보물창고인가! 드디어 보겠구만, 수수께끼의 '힘'을 말이야!!"
안쪽에 보관되고 있는 물건을 사레이엄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그 문이 말해주고 있었다. 검이나 창에서밖에 볼 수 없을 법한 순도 높은 강철을 사용했고, 심지어 두께가 20cm는 되리라 생각되는 육중한 문이 3중으로 겹쳐진 모양으로 준비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엄중한 문은 그리 간단히 열리지 않는 법이다.
"햐~~~~~! 이건 또 꽤나 튼튼해보이는 문이로구만!!"
높이가 10m정도 되보이는 문을 올려보며, 이리가 얼이 탁 빠진 소리를 낸다.
"힘으로 열려고 해도 고생 좀 하겠는데"
라고 말하며 미겔이 문에 손을 대자, 강철문이 마치 커튼처럼 휙 열렸다.
"뭐, 뭐여?! 엄청 간단하게 열려버렸잖아"
힘을 보여주려고 생각했던 미겔이 낙담한 것처럼 말한다.
"이미 마법이 걸려있는 거야. 선객이 와있나본걸"
긴장한 표정을 하는 이리에게, 미겔이 기쁘다는 듯이 말한다.
"헤헤. 나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었구만. 어떤 선객이 있다한들, 이 몸이 혼자서 청소해줄 테니까!"
미겔은 선천적으로 거칠게 행동하기를 좋아하나보다.
"예이, 예이, 그렇습지요"
묘하게 들뜬 미겔에게, 이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 설마?!"
그런 둘의 등 뒤에서, 라엘이 신음한다.
"응?!"
"왜 그래, 형씨? 안에 누가 있는지 짐작가는 놈이라도 있어?"
라엘의 표정이 나빠지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라엘, 누군데?"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 팜에게, 라엘이 북받치는 격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한다.
"아마도…… 방금전의 머펫을 조종하던 놈일 거야"
"그럼, 마도사란 말인가요?"
라며 묻는 라샤.
"네. 혹시 안에 있는 놈이 '그 녀석'이라면, 꽤나 까다로운 상대예요"
볼에 땀을 흘리며 라엘이 말한다.
"방심은 금물, 이란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이리가 검을 뽑는다.
"헤헤, 그거 재밌겠구만. 가자고!"
미겔은 어깨에 매달린 검 커버의 물림쇠를 풀고는, 그대로 안을 향해 돌격했다.
"앗!! 자, 잠깐!"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이리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정말, 여전히 분별력 없는 녀석이라니까!"
라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뭐, 뭐야, 여기는?!"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던 미겔이, 검에 손을 댄 채로 외쳤다.
투우장을 연상케 하는 원형 돔 주변을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예의 거목이 치솟고 있었다.
게다가 그 거목의 중앙에는, 파인 것처럼 커다란 구멍이 생겨있었으며, 그 안에 한 자루의 검이 청백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검은, 원래 그곳에 보관되고 있던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신비하게도, 그 주변을 애워싸는 거목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가지가 마치 검을 지키듯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그 보물인가…… 응?"
팟!! 파밧!!
가끔씩 방전되는 것처럼, 검 주변에서 강한 빛이 발생된다.
암흑 속에서 미겔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자, 검 주위에는 방금 이리 일행을 습격했던 머펫들이, 벌레처럼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빛은 검의 주변에 펼쳐진 무언가 성스러운 마법에 머펫들이 튕겨나가며 발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래쪽 바닥에는 그렇게 튕겨나가 박살난 머펫의 잔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깨에서 대검을 뽑은 뒤, 미겔은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비켜라, 비켜~~!! 그 녀석은 이 몸이 가져가마!"
검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미겔의 뒤를, 당황한 이리가 뒤따른다. 하지만,
핑!
갈프와 오랏줄로 이어져있던 채였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아───, 진짜!!"
이리가 안달이 난 것처럼 외치고는, 손에 들고있던 검으로 밧줄을 잘라내더니 달려가버린다.
그 사이에도 미겔은 차례차례 머펫을 쓰러트리며 전진하는 중이다.
"으랏차차, 방해하지 마라!!"
대략 반 이상의 머펫을 쓸어내고 거목에 다다를 무렵에, 나머지 머펫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야?!"
미겔이 그 사태에 의문을 품는 순간,
찌릿찌릿찌릿찌릿!!
굉음과 함께 격렬한 전격이 미겔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으힉!!"
놀라며 물러서는 미겔의 눈앞에, 충격으로 인한 뻥 뚫린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큰일날 뻔했네~~!!"
엉덩방아를 찧으며 숨을 삼키는 미겔 옆으로 이리가 달려온다.
반사적으로 둘이 위를 올려다보니, 거묵 위에 걸터앉아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 남자에게 고함치는 미겔.
그러나, 당사자인 남성은 미겔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등 뒤로 흐르는 길다란 흑발과 입가에 자라난 풍부한 수염, 그리고 전신을 감싸는 칠흑의 망토가, 그 남성의 기분 나쁜 분위기를 대변한다.
"뭐하는 놈이냐, 너?!"
자세를 바로잡으며 긴장하는 이리에게, 남성은 마치 땅끝에서 솟아나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후후후후후…… 애석하게도 좀도둑에게 알려줄 이름따위는 없어서 말이지. 알고 싶거든, 그쪽에 있는 왕자님께 묻도록 해라. ……후후후. 잘도 살아있었군, 라엘 왕자"
남성의 말에 출입구에 서있던 라엘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는다.
"라엘…… 왕자?"
"정말 진짜로 왕자님이었어?!"
양쪽 팔에 달라붙어있던 라샤와 팜이 놀라며 라엘을 바라본다.
"……"
라엘의 표정은 점점 곤혹스럽게 변해가더니, 급격하게 괴로운 과거를 떠올린듯 두 눈에 습기가 찬다.
"……내 이름은…… 라엘 레바르트 리만. 지금은 멸망한 레바르트 왕국을 통치하던 리만 왕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입술을 꾹 깨문 라엘의 눈동자에, 증오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놈의 이름은, 루그돌!!"
그렇게 외치며, 라엘은 고개를 치켜들며, 윗쪽에 있는 남성을 노려본다.
"아버지와 사랑하는 나라를 멸망시킨, 증오스러운 원수예요!!"
"……루그돌?"
팜은 처음 듣는 그 남성의 이름을 곱씹으며, 라엘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편, 홀로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머펫의 잔해로부터 보석을 주워담고 있던 갈프는, 그 남성의 이름을 들은 순간, 딱딱하게 얼어붙어버렸다. 손에서 보석이 소리를 내며 후드득 떨어진다.
"뭐야? 당신 아는 사람이야?"
벌벌 떠는 갈프의 모습을 본 라샤가 묻는다.
파들파들 몸을 떠는 갈프의 얼굴은, 피가 쫙 빠져서 완전 창백한 모습이었다.
"아, 알다마다요…… 단신으로 북쪽 대륙을 정복한 마왕이라구요!!"
"뭐, 뭐라고?!"
그 말을 들은 라샤 역시 놀라면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헤헤. 뭐, 뭐어…… 내 상대로는 그럭저럭 괜찮겠는걸"
식은땀을 흘리면서 강한 척하는 미겔을, 이리가 황당해하며 소리친다.
"센 척 할 때가 아니잖아!!"
그런 일동의 반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마왕 루그돌은 그 커다란 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후후후후후…… 어디, 좀 더 가까이서 배알토록 해볼까"
라고 말한 순간, 슥 하더니 몸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부웅……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미겔과 이리에게 등을 보인 채로, 라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뭐, 뭐지?! 방금 그것도 마법인가?!"
난생 처음 직시한 텔레포트 능력에, 미겔이 눈을 비비며 외친다.
"주문도 영창하지 않고…… 그런 술법을?"
루그돌이 지닌 힘의 일부를 두 눈으로 목격한 이리는, 온몸이 긴장한 탓에 닭살이 돋아올랐다.
검을 쥔 라엘은 이가 부러질 듯이 갈면서 루그돌을 노려보고 있다.
팜은 그런 라엘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후후후후…… 날 기억해주다니, 영광이로군, 라엘 왕자"
사악한 미소를 짓는 루그돌에게, 라엘은 결국 분노를 드러내며 외쳤다.
"잊을 수 있겠나! 백성을 돌봐야 할 대주교의 신분으로, 야심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킨 네놈을, 단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등을 돌린 상태지만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는 루구들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미겔이, 이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대주교, 가 뭐냐?"
"목사의 대장이야"
"뭐야, 땡중 두목같은 건가?"
들끓는 충동을 억누르던 라엘이, 검에 손을 가져다댄다.
그런 라엘을 바라보며 루그돌이 차갑게 웃는다.
"모처럼 건진 목숨을 허망하게 버리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닥쳐라!! 네놈을 쓰러트리지 않고 나라 재건은 이룩할 수 없다!"
그렇게 외친 라엘은 혼신의 힘을 담아 검을 휘두른다.
그러나, 루그돌은 피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어리석긴……"
루그돌이 중얼거린 그 순간,
서걱!!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라엘의 검이 루그돌의 몸을 양단한다.
"!!"
이상한 손맛에 정신을 차린 라엘의 눈앞에, 루그돌의 몸이 안개가 모이듯 재생된다.
"별로 성장하지 않았군"
그렇게 말한 루그돌은, 라엘을 향해 눈을 부릅뜬다.
"음!!"
찌릿찌릿찌릿!!
그 순간, 격렬한 빛과 함께 우뢰같은 전격이 라엘의 몸을 덮쳤다.
"으악───!!"
튕겨나가듯이 날아간 라엘의 몸이 바닥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쳐지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라엘!!"
반사적으로 뛰쳐나간 팜과 라샤는 라엘을 일으켜세우고는 소생 주문을 영창한다.
뒤에서 보고있던 미겔과 이리는, 찍소리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지? 지금, 분명 저 녀석 베였을 텐데?"
"……그야말로 불사신 마왕!!"
지기 싫어하는 이리조차, 이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겨누는 이리 일행은, 루그돌의 다음 행동에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루그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시시하군……"
그렇게 중얼거린 루그돌의 표정에, 슬픈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팜은 놓치지 않았다.
"뭐?!"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루그돌에게 놀란 팜이었지만, 정작 루그돌은 팜을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의식을 잃은 라엘을 바라보며 말한다.
"유예를 주마, 라엘 왕자. 그 보검, '정령왕 사가스'는 재회의 기념으로 주도록 하마. 그동안 실력이나 쌓아두도록 해라. 난 언제라도 기다리고 있으마"
그렇게 말한 루그돌의 몸이 다시 안개처럼 공중 속에 녹아내려간다.
"후후후후…… 하──하하하핫!!"
높은 웃음소리를 울리며, 루그돌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동시에, 남겨진 일동에게는 깊은 어둠과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2
"사, 살았다……"
기나긴 침묵이 흐른 뒤 처음 입을 연 사람은, 탈진해서 녹초가 된 상태로 주저앉은 갈프였다. 모두들 상상을 초월하는 루그돌의 경이로운 실력에 말을 잃은 것이다.
"아, 그렇지!"
갈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리는, 숨을 삼키며 등 뒤에 있는 '정령왕 사가스의 검'을 다시 바라본다.
"저게…… '정령왕 사가스의 검'인가……"
거목에 끼워진 듯한 그 '두 번째 보물'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조용히 나무 속에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이리가 씩 웃으며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헤헤! 잘먹겠슘돠!!"
새치기를 하려는 이리를, 미겔이 아차하며 뒤쫓는다.
"아, 치사하잖아!!"
라엘을 간호하던 라샤와 팜도 그 움직임에 눈치채고,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외친다.
"이리!!"
"미겔!"
가볍게 뿌리 위로 달려올라간 이리가 검 앞에 서서는 눈을 반짝였다.
"이걸로 두 개째! 흐흐흐……"
이리가 기뻐하며 검에 손을 뻗자,
파직파직파직!!
검에 닿은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한 충격이 전해진다.
"윽!!"
얼떨결에 손을 뗀 이리에게, 뒤따라오던 미겔이 기세등등하게 외친다.
"흥, 바보같기는. 어차피 꼬마 계집이군. 자, 비켜라!"
미겔에게 어깨를 붙잡힌 이리가 뒤로 밀쳐진다.
"퉷, 퉷!!"
손바닥에 침을 뱉은 미겔이 분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이리에게 씩 웃어보인다.
"보기나 해!"
힘으로 뽑으려고 미겔이 검에 손을 댄다.
파직! 찌릿찌릿찌릿!!
"으개애액~~~~~~!!"
이리가 건드렸을 때보다 훨씬 격한 방전이 보물창고 내부를 눈부시게 비춘다.
그런 광경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라샤의 등 뒤에서, 갈프가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사심의 검!"
그 목소리에, 라샤가 갈프를 보며 묻는다.
"뭐야? 당신, 저 검에 대해 뭔가 아는 거라도 있어?"
"네…… 분명, 예전에 사심을 품은 자는 뽑을 수 없는 보검이 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요"
"……빨리 말하라고, 그런 건"
새카맣게 그을린 미겔이, 검을 뽑으려던 자세 그대로 쓰러진다.
"조금이라도 사심이 보이면 즉각 반응해버린다는 말입니다요"
갈프의 설명에, 이리와 라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하아……. 이 중에 그런 검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포기하는 표정을 짓던 라샤 옆에 있던 팜이 슥 일어선다.
"나, 해볼래!!"
그렇게 말한 팜은 천천히 검을 향해 다가갔다.
"파, 팜! 아무리 네가 위건족이라도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막으려는 이리에게, 팜이 싱긋 웃으며 말한다.
"걱정하지 마, 이리. 이야기하기만 할 뿐이니까"
그대로 팜은 이리를 지나쳐, 검의 앞에 서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위대한 정령의 왕, 사가스여, 바라건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다오"
주문을 영창하듯 조용히 말하자, 팜의 주위를 응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령의 빛이 떠오른다.
"……팜"
이리가 불안하게 바라본다. 마법을 사용하는 자에게 있어서 정령의 왕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일개 하급 마도사가 정령왕에게 알현을 요구하는 일은, 경우에 따라서는 정령왕의 분노를 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버리면, 앞으로 일절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버릴 수도 있다.
그를감안하고 위험한 도박에 나선 팜에게, 이리는 다시금 믿음직스러운 파트너라고 실감함과 동시에,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었다.
키────잉!!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팜의 주변을 떠다니던 정령의 빛이 슥 떨어지며, 팜의 몸은 검이 발하는 눈부신 빛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팜?!"
이리가 비통한 절규를 외친다.
그러자, 그 순간,
후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에서 뿜어져나오던 빛도 금방 사라지더니, 팜이 천천히 돌아섰다.
"……괜찮아, 팜?!"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이리에게, 팜이 조용하게 웃으며 말한다.
"정령왕 사가스와 이야기하고 왔어. 팜이 말을 잘 전하지 못하겠어서, 이것저것 잔뜩 이야기했는데, 사가스는 화내지 않고 들어줬어!"
동경하는 존재와 대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인지, 팜의 볼에는 살짝 홍조가 올라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한 순간이라 생각되던 그 순간이, 사가스와 팜에게 있어서는 긴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그래서?! 사가스는 뭐래?"
결론을 재촉하는 이리에게, 팜은 천천히 '사가스의 검'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어?"
이리가 검을 바라보자, 지금까지 꿈쩍도 하지 않던 검 주변의 뿌리가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주륵주륵주륵……
스르르륵……
부드러운 빛을 내뿜으며 '사가스의 검'은 뿌리에서 벗어나, 천천히 떠올랐다.
"해냈다! 사가스에게 인정받았구나, 팜!"
기쁘게 외치는 이리에게, 팜이 조금 쑥쓰럽다는 듯이 대답한다.
"헤헤…… 하지만, 사가스에게 이런 말을 들었어. 좀 더 제대로 공부하라고"
"그래도, 괜찮은걸! 우히히, 이걸로 두 개째인가……"
라며 혼자 좋아하던 이리에게, 팜이 뭔가 말하려 한다.
"아, 이, 이리, 있잖아……"
말을 걸려는 팜의 곁에 '사가스의 검'이 스──윽 하며 다가온다.
"엉?"
기쁨에 젖어있던 이리를 그대로 통과한 '사가스의 검'은 그대로 라엘에게로 이동했다.
키──잉
정신을 잃고 쓰러진 라엘의 가슴팍에서 한층 더 강한 빛을 내뿜은 '사가스의 검'은 그대로 천천히 라엘의 품으로 들어갔다.
"……으, 으응……"
'사가스의 검'이 내뿜는 빛으로 인해 깨어난 라엘은, 자신의 품에 있는 검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 이건?!"
라엘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말을 잃었다.
대답을 요구하듯, 이리가 팜에게 고개를 들이밀자, 팜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한다.
"미안, 이리. 사가스에게 부탁했어. 라엘의 힘이 되어달라, 고……"
"에───엑?!"
팜의 그 말에, 라엘을 뺀 모든 사람의 절규가 보물창고 안에 울려퍼졌다.
3
사레이엄을 지키듯이 갖춰진 외륜산이, 저녁노을빛을 받으며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보물창고를 나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일동의 표정은 무겁다.
"이걸로 두 개 모았다, 고 생각했는데……"
"'만능의 힘'을 찾는 이상, 그런 녀석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게 되버렸어……"
이리의 불평을 듣고는, 미겔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온 건지, 라엘도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사가스의 검'을 바라본다.
"미겔, 꽤나 약한 소리를 하네? 넌 세계 제일의 검사잖아?!"
라엘의 모습을 걱정한 건지, 라샤가 화를 낸다.
"그런 말 해도 말이야……"
받아쳐주지 않는 미겔을 도발하듯이, 라샤가 라엘의 어깨에 기대더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왕자님과 운명을 함께할 각오를 다졌답니다!"
"아, 네……"
약해진 라엘의 옆에서 알랑대는 라샤의 태도에 화난 팜이 지지 않으려듯 라엘의 팔에 달라붙어 말한다.
"나도 라엘이랑 함께할 거야!!"
"건방진 말 하지 마! 너같은 꼬맹이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아줌마보다는 낫거든~~~!!"
"뭐, 이년이!!"
"메───롱이다!"
저급한 말다툼을 하는 둘에게, 이리가 말을 건다.
"저, 저기, 팜……"
"말리지 마, 이리!"
팜은 라샤와 언쟁하던 기세를 탔는지 강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나도, 갈게"
이리가 쑥쓰럽다는 듯이 볼을 긁으며 말한다.
그런 이리의 말을 들은 팜이 팔짝 뛰어오른다.
"어?! 정말?!"
"그래…… 역시, '만능의 힘'이 없으면 저주를 풀 수도 없고, 그 늙은이를 찍소리 못하게 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으니까!"
"아싸! 또 같이 여행할 수 있겠네, 이리?!"
"그래"
마주보며 씩 웃는 팜과 이리.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미겔도 각오를 다진 모양이다.
"칫…… 어쩔 수 없나"
그런 일동에게 솔직하게 감동한 라엘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글썽인다.
"고마워요, 여러분. 정말…… 정말 뭐라 말해야 좋을지……"
"이봐이봐, 착각하지 말라고. 딱히 너같은 녀석을 위해서가──"
라고 말하려는 미겔을,
빡!!
라샤가 있는 힘껏 때린다.
"너는 잠자코 있어!!"
이제 완전히 기운을 차렸는지, 지금까지 피로가 날아간 것처럼 활발해진 팜이 선두에 선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지! 그렇게 정했으면 자, 출발이다!!"
앞으로 나선 팜이, 팔을 크게 흔들며 기운차게 걸어나선다.
"야 야, 팜! 너무 까불지 말라니까! ……응?"
평소 페이스로 돌아와 즐겁게 팜을 뒤쫓던 이리가, 문득 등 뒤를 돌아보더니 숨을 삼켰다. 무려, 갈프와 길도 뒤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설마 당신들까지 같이 가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양 손을 싹싹 비비며 영업용 미소를 띄우는 갈프가, 아첨을 떨며 말한다.
"헤헤헤…… 다들 같이 있는 편이 장사가 될 것 같습니다요"
그런 갈프에게 질려하면서도, 이리는 웃어보였다.
"후…… 뭐, 괜찮겠지!"
이리하여, '만능의 힘'을 찾아 여행을 하던 팜과 이리에, 네 명과 한 마리의 동료가 추가되었다. 모두 제각각 개성적인 파티다.
'왕가의 증표', '정령왕 사가스의 검', 세 보물 중 둘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아직 방심해선 안 된다. 나머지 세 번째 보물을 얻으려면, 분명 그 마왕 루그돌과 싸우게 된다.
각각의 가슴에 불안과 희망을 품고, 이리 일행은 다음 모험을 향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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